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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술 마시는 집’, 영국의 펍과 프랑스의 카페에 대하여

유럽의 ‘술 마시는 집’, 영국의 펍과 프랑스의 카페에 대하여

염태진 2023년 11월 9일

[영국의 술 마시는 집, 펍]
펍(Pub)은 ‘영국의 심장’이라고 합니다. 펍은 퍼블릭 하우스(Public House)를 줄여 부른 말인데, 우리말로 굳이 번역하면 ‘공공장소’라는 뜻이 됩니다. 말 그대로 공공의 기능을 제공하면서 알코올음료를 서비스할 수 있는 공간을 말합니다. 펍에 대한 엄격한 정의는 없지만, 영국의 에일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CAMRA에서는 펍은 4가지 특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펍은 회원이 아니어도 이용할 수 있어야 하고, 펍에서는 음식을 주문하지 않아도 생맥주나 사이다를 제공받을 수 있으며, 펍의 공간은 식사를 위해 배치되지 않은 공간이 하나 이상 있어야 하고, 테이블 서비스뿐만 아니라 바에서 음료를 구매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펍에 대한 스토리를 가장 광범위하게 펼쳐낸 조용준 작가의 <펍, 영국의 스토리를 마시다>라는 책에서는 “펍은 영국 역사에서 하원 역할을 했다”라는 윌리엄 하코크 경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펍은 최신 뉴스나 가십, 여론을 나누고 토론을 벌이는 정치 마당이라는 역할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펍은 음식이 없어도 맥주로 식사를 할 수 있고, 맥주 한 잔을 앞에 두고 정치를 논할 수 있는 영국의 ‘술 마시는 집‘이었습니다.

펍의 역사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영국의 인(Inn), 태번(Tavern), 에일하우스(Alehouse)의 기원에 대해서 말해야 합니다. 영국의 브리튼 섬은 기원전 55년 로마의 침공을 받아 그 제국이 멸망하기까지 실질적인 지배를 받았습니다. 로마는 브리튼에 두 가지 유산을 안겨 주었는데, 도로와 와인 문화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고 했을 만큼 로마의 도로는 견실하기로 유명합니다. 현재 영국의 간선 도로의 바탕이 이때 만들어진 로마의 도로라고 할 정도입니다. 이 도로를 따라 지어진 저택이 인과 태번의 기원이라고 합니다. 당시 로마인들은 인과 태번에서 정찬을 곁들이며 와인을 마셨습니다. 이때는 아직 브리튼 섬에 에일이 전파되지 않은 시기였고, 로마인들은 와인을 즐겨 마시는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과 태번이 다시 등장하여 부활하기 시작한 때는 12세기입니다. 이때 영국에서는 영주가 농노에게 토지를 대여하고 그 연공을 받는 장원제가 성립되었습니다. 농노는 영주에게 연공을 받치고 남은 생산물은 시장에 내다 팔았는데, 이 과정에서 시골과 도시는 서로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화폐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12세기에는 예루살렘을 오가는 순례자들이 증가했습니다. 이렇게 물류가 늘고 여행자가 증가하자 선술집에서 묵으면서 술을 마시는 문화가 발전했습니다.

인과 태번은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인은 우리말로 ‘여관’으로 번역되는 것처럼 숙소를 겸비하고 식사와 와인, 게다가 세탁과 마구간까지도 제공하는 곳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사설 여관인 주막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태번은 가게를 의미하는 라틴어 Taverna에서 유래되었는데, 그 어원을 따라가면 테이블을 의미하는 라틴어 Tabula가 나옵니다. 16~17세기에 전성기를 보낸 태번은 와인을 전문으로 팔고 보통 상류층 계급이 이용하는 곳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에 비교하자면, 신윤복이 그린 ‘주사거배’에 나오는 선술집과 비슷한 형태라 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선술집은 원래 ‘서서 술을 마시는 집’이라는 의미였는데, 점점 술청에 술을 제공하는 목로주점의 형태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선술집의 유형으로 에일하우스가 있습니다. 에일하우스는 로마인이 사라진 브리튼 섬에 앵글로-색슨인이 정착하면서 가져온 에일을 파는 하층민의 선술집이었습니다. 간혹 에일하우스가 숙소를 겸하기도 했는데, 그러면 에일하우스와 인의 차이는 없었다고 합니다. 정리하자면, 인은 숙소를 겸비한 술 마시는 집, 태번은 요리를 제공하는 중간 정도의 술 마시는 집, 에일하우스는 가장 싼 술을 파는 하층민의 술 마시는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부터 시작한 영국의 술 마시는 집은 근현대에 들어오면서 펍이라고 불리기 시작합니다. 퍼블릭 하우스라는 말은 17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17세기가 되면서 도시의 소시민들이 일상적으로 맥주를 마시게 되었고, 거의 모든 맥주가 상업적인 양조장에서 만들어졌습니다. 18세기가 되면서 펍의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의 시기(1837~1901)는 펍의 전성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를 영국에서는 ‘빅토리아 시대’라고 부르는데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영국의 최전성기였습니다.

펍의 시대에 시민들이 가장 많이 마신 술은 진과 에일이었습니다. 진은 1688년 명예혁명과 함께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들어온 증류주입니다. 진은 다른 술에 비해 세금이 적고 값이 싼 데 반해 알코올 도수는 높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저렴한 가격에 얼큰하게 취하는데 이만한 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진을 마시면서 통제 불능의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진에 중독된 사람들이 가정을 버리고 거리에서 취해 돌아다니면서 사회적인 불안 요소가 된 것입니다. 술에 대한 인문학서인 <술에 취한 세계사>에서는 진 때문에 피폐해진 영국의 현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령, 술에 취해 돌봐야 할 아이가 몸에 불이 붙어도 방치한 여인이나 술에 취해 아기를 장작으로 착각해 난로에 넣은 여인의 이야기 등입니다. 그중에 최고는 진을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살해하고, 아이의 옷을 벗겨 시장에 판 돈으로 진을 마셨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겨울에 옷이 벗겨진 아이를 두고 떠날 수 없었던 여인은 아이의 목을 졸라 살해하고, 펍에 가서 진 1쿼터를 마셨습니다. 진에 대한 폐해는 그림으로도 남아 있습니다. 18세기 영국의 풍속화가 윌리엄 호가스는 <진 거리(Gin Lane)>라는 그림에서 ‘진 크레이지(Gin Craze)’를 묘사했습니다. 이 그림에는 술에 취해 젖가슴을 드러내고 계단에 쓰러져 있는 여인, 계단에서 떨어지고 있는 아이, 해골처럼 삐쩍 마르고 앙상한 갈비뼈를 드러내고 있는 남자, 술에 취해 들것에 실려 가면서도 술잔을 입에서 떼지 않고 있는 남자 등 다소 과장되고 끔찍하게 진의 폐단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술에 취한 세계사>에 기록된 당시의 상황과 비교하여 크게 과장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윌리엄 호가스의 ‘맥주 거리와 진 거리’

진이 사회적인 골칫거리가 되자 영국 정부는 진보다 맥주를 장려하기 시작합니다. 1830년 조시 4세는 맥줏집에 관한 법률, 일명 비어하우스 법을 제정합니다. 이 법률에 의하면, 맥주를 양조하려고 하는 자는 단지 2기니(금화의 1/4 온스)의 세금만 내면 언제 어디서나 맥주를 제조하고 팔 수 있었습니다. 이 법의 의도는 맥주의 가격을 낮추고 접근성을 강화해 진보다는 맥주를 마시도록 장려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법으로 인해 맥주를 만드는 인과 에일하우스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1841년에는 면허를 받은 맥주 양조장의 수가 45,500개에 이르게 됩니다. 영국에 일찍부터 가양주의 성격을 벗어나 상업화된 맥주 양조장들이 대거 생겨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기하급수적으로 맥주 양조장이 늘어나자, 이 법률은 여러 차례 개선되었으며, 수정된 후속 법안이 1993년까지 유지되다가 최종적으로 폐지되었습니다.

당시 맥주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스타일은 에일의 대표, 페일 에일이었습니다. 페일이란 뜻은 이미 한차례 영국에서 유행했던 스타우트 포터에 비해 좀 더 엷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필스너의 황금색보다는 색이 짙었습니다. 페일 에일은 특별히 쓴맛은 아니었지만 비터라고 불렸습니다. 물론 병에 담기면 페일 에일이고 캐스크에 담기면 비터라고 구분하기도 합니다. 또한 페일 에일의 보존 기간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홉을 좀 더 추가하고 쓴맛과 알코올 도수를 높인 인디아 페일 에일도 유행하였습니다.

[프랑스의 술 마시는 집, 카페]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중에 <카페 콩세르의 구석에서(Corner of a Café-Concert)>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19세기 파리에 있는 한 카페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림에는 맥주잔을 앞에 두고 담배를 피우는 사내와 맥주 여러 잔을 한 손에 쥐고 서빙하는 종업원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뒤편에 관악기와 첼로를 연주하는 연주자의 모습도 보입니다. 카페 콩세르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가벼운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전통적인 오페라나 발레 극장은 입장료가 비쌌기 때문에, 중산층뿐만 아니라 소시민이나 노동자까지 카페 콩세르처럼 입장료가 저렴한 공연장을 찾았습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여러 개의 맥주잔을 한 손에 들고 있는 여종업원의 모습입니다. 마네는 맥주잔을 여러 개 들고도 맥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서빙하는 종업원의 솜씨에 감탄해 그중 가장 뛰어난 종업원에게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고 작업실로 초대했다고 합니다. 종업원은 자신의 주인도 함께 가서 돈을 받는 조건으로 마네의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그림 속에서 파란 셔츠의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나이가 그 주인입니다.

에두아르 마네의 ‘카페 콩세르의 구석에서’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유럽의 여느 맥주 홀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림의 제목을 보고 카페라는 걸 알았습니다. ‘카페에서도 맥주를 파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마네의 작품 중 카페가 등장하는 그림에는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많습니다. ‘카페 콩세르(The Café-Concert)’, ‘카페에서(At the Café)’ 와 같은 작품입니다. 그렇습니다. 19세기 파리의 카페는 유럽의 ‘술 마시는 집’이었습니다. <카페의 역사>라는 책에서도 카페에서 술을 주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얀 셔츠에 검은 정장을 입은 웨이터는 손가락 끝에 쟁반을 올린 채 숨을 헐떡이며, ‘흑맥주 셋, 압생트 둘, 베르무트 셋!’이라 소리친다.”라는 구절입니다. 바로 파리의 카페에서 커피가 아닌 술을 주문받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카페가 생긴 것은 전적으로 커피 때문이긴 합니다. 검은 음료가 처음으로 프랑스에 상륙한 때는 17세기입니다. 16세기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 커피하우스가 생겨난 이후, 1644년 프랑스의 마르세유 항구에 커피가 도착하고, 1669년에는 태양왕 루이 14세가 사는 파리의 궁정에까지 전파됩니다. 여담이지만,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의 온실에서 직접 커피콩을 재배할 정도로 커피 애호가였다고 합니다. 왕은 직접 재배한 콩을 로스팅하고 갈아 넣어 만든 커피를 궁전의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프랑스의 카페는 1686년에 문을 연 ‘카페 프로코프(Café Procope)’가 실질적인 출발입니다. 카페 프로코프는 시칠리아 출신의 셰프 프란체스코 프로코피오 데이 콜텔리가 향신료, 얼음, 레모네이드 등을 판매할 수 있는 왕실 허가를 받은 후에 예리한 사업적 감각으로 커피를 추가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의 카페는 실내 장식이 화려했습니다. 벽에는 커다란 거울과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고, 테이블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대단히 사교적인 공간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당시의 유명한 작가와 예술가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었습니다. 몰리에르, 라신, 라퐁텐, 장 자크 루소, 디드로, 몽테스키, 볼테르 등. 특히 18세기 극작가인 볼테르가 카페를 방문한 일화가 재미있습니다. 카페 프로코프는 프랑스 극장 맞은편에 있었는데, 볼테르는 신부처럼 위장하고 몰래 카페에 앉아, 연극이 끝나고 몰려든 관객들이 자신의 연극을 평가하는 것을 즐겨 들었다고 합니다. 카페 프로코프의 성공에 고무되어 파리에 카페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납니다. 루이 14세의 다음 왕인 루이 15세의 통치 기간에는 파리에만 600개의 카페가 생겨났고, 프랑스 혁명 직전에는 그 수가 800개를 넘었습니다.

2010년도의 카페 프로코프

그런데 당시의 카페는 현대의 카페와는 조금 다릅니다. 가장 큰 차이는 당시의 카페는 커피뿐만 아니라 술의 비중이 컸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19세기 후반에 시행된 카페와 관련된 법에 잘 나타납니다. 일명 ‘카페법’이라고 하는 이 법률의 취지는 카페와 카바레 등 주류 소매업소의 폭발적 증가와 그에 따른 무질서와 타락을 통제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법령에 따라 주류 소매업자는 도지사의 승인을 받은 뒤에 개업할 수 있었습니다. 이전까지는 관할 세무서에 개업 신고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즈음에 이 법은 더욱 강화됩니다. 알코올 중독이 국가의 존망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 카페에서 파는 술이 다시 공공의 표적이 된 것입니다. 1915년의 법에서는 술을 여러 종류로 분류하여 등급별로 제한을 두었는데, 23도 이상의 술은 아예 파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한편 파리의 중심가에서 카페가 성행했다면, 도시의 변두리에서 서민들이 드나드는 곳은 카바레였습니다. 카바레는 카페에 비해 음료의 청결 상태는 불결했고 건강에 좋지 않은 음료를 팔았습니다. 와인과 맥주에 불순물을 섞어 팔았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서민들은 휴식 공간이 필요했고, 카바레에서 담배를 피우고 값싼 술을 마시며 여가 시간을 즐겼습니다. 물론 가끔 싸움도 일어나고, 창녀들이 드나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카페에서 팔던 술은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압생트가 있습니다. 압생트는 알코올 도수가 40도 이상이 되는 증류주입니다. 값싼 술이었기 때문에 가난한 화가나 작가 등이 즐겨 마신 술이었습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나 빈센트 반 고흐도 즐겨 마셨다고 합니다. 과거의 압생트는 그렇게 질이 좋은 술이 아니었습니다. 압생트를 너무 많이 마시면 향쑥 성분 때문에 중독 증세를 일으키기도 했다는데, 고흐의 정신 착란의 원인을 압생트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맥주로 보자면 페일 라거 중 하나인 필스너가 유행하던 시기입니다. 필스너는 1842년에 체코의 플젠 지방에서 처음 만들어진 스타일로 1862년에 파리에까지 상륙합니다. 이어 유럽과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지역의 맥주를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영국의 캐스크에 담긴 에일이나 벨기에의 개성 강한 맥주, 심지어 독일의 전통적인 맥주들까지 필스너에 무릎을 꿇습니다. 마네의 카페 그림에서 보이는 밝은 황금색의 맥주도 필스너일지 모릅니다. 그밖에 마네의 그림을 통해 당시의 여러 가지 맥주를 엿볼 수 있습니다. 가령 <폴리-베르제르의 바(A Bar at the Folies-Bergère)>에서는 대리석 테이블에 빨간 삼각형 모양의 라벨을 가진 맥주병이 보이는데, 이것은 영국의 바스(Bass) 양조장의 맥주로 영국에서 유행한 페일 에일입니다. <좋은 맥주(Le Bon Bock)>는 그림의 제목이 바로 복 맥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림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배불뚝이 신사는 한 손에 맥주잔을 들고 있습니다. 브라운 컬러의 살짝 투명한 이 맥주는 독일 출신의 복 맥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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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태진

맥주인문학서 저자. 맥주로 내장도 채우고 뇌도 채우며 '날마다 좋은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 iharu@kakao.com / 인스타 iharu04 / 브런치 https://brunch.co.kr/@ih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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