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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탄생 (9부)

9. 와인의 혁명 1 – 와인병과 코르크의 등장

중세시대를 대표했던 와인 저장 용기인 나무통은 둥그렇고 움직이기 간편해서 운송에는 좋았으나, 와인을 보관하는 용기로는 적당하지 않았다. 와이너리에서 출고된 와인을 나무통에 담아 그대로 주점으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와인을 주전자나 잔에 바로 따라서 서빙을 했다. 물론 나무통 내부를 제대로 청소를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산소의 접촉과 함께 이중 공격을 당한 와인들은 본래의 맛을 잃고 변질되기 일쑤였다.

오크통의 둥그런 모양과 형태는 적재하기도 운반하기에도 적당했다. / 사진 제공: 배두환

이상적인 와인 보관 용기였던 유리병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만들어졌다. 기원전 1세기경 ‘glass blowing(불어서 유리 만들기)’을 발명해 낸 로마인들은 역사상 최초로 와인을 유리잔에 담아서 마신 민족이다. 참고로 이 ‘glass blowing’ 기법이라는 것은 철로 된 기다란 파이프의 앞 끝에 유리를 말아 올려 둥글게 한 후 반대편 끝에서 입으로 바람을 불어 넣어 풍선처럼 부풀리는 방법이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이 기법을 이용해 유리 공예를 한다. 로마 시대의 유리 공예가들은 이 방법으로 지금 봐도 화려한 와인 잔이나 병들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때는 일시적으로만 쓰였을 뿐이고, 부유층의 과시용으로 다시금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초반부터였다.

1~2세기경에 만들어진 유리 제품 / 사진 제공: 배두환

물론 로마 시대 이후와 16세기 이전에도 유리는 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스테인드글라스다. 불어서 만드는 유리 제품은 가능했지만, 창문과 같이 커다란 판유리를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이 스테인드글라스는 작은 유리 조각을 모자이크 방식으로 이어 붙였다고 한다. 초기에는 무색의 투명한 유리를 사용했으나, 7세기부터는 화려한 색으로 이어 붙인 스테인드글라스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는 유럽 각지에서 제작이 되었기 때문에 유럽 여행을 하다 보면 교회나 성당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랭스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 사진 제공: 배두환

여담이지만, 이 유리 공예 분야에서 정점을 찍은 곳이 바로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무라노 섬이다. 1204년에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자 비잔틴의 유리 공예가들은 베네치아에 정착했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유리 공예 기술을 지녔던 그들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솜씨로 화려한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대량의 유리 공예 제품을 만들려면 500도를 웃도는 열을 내는 용광로가 필요했고, 베네치아 정부에서는 화재의 위험(당시 베네치아는 대부분이 목조주택이었다)을 제기하며 그들을 모두 무라노 섬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유리의 섬, 무라노가 탄생한 것이다. 이미 중세 시대부터 무라노에서 만들어진 화려하고 정교한 유리 공예 제품은 최고의 사치품으로 유럽 전체에서 인기였다.

무라노 섬의 유리 공예 샵 / 사진 제공: 배두환

15세기부터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일반인들도 어느 정도 유리를 접할 수 있게 됐다. 매우 흥미롭게도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보급되고 서적이나 잡지가 전반에 퍼지자 안경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점이다. 인쇄술의 등장 이후 100년이 채 되지 않아 수많은 안경 제작자들이 유럽 전역에서 우후죽순 생겨났다고 한다.
유리로 된 와인병은 안경의 대중화 바로 직후 16세기부터 서서히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물론, 최초에는 재력이 있는 사람들의 사치품으로 시작이 되긴 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와인의 보관 용기로서의 유리병의 대두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와인병 자체의 유행이 획기적이라는 것이 아니다. 유리병의 등장은 곧 코르크의 발명으로 이어졌고, 이는 코르크스크류의 발명 그리고 스파클링 와인과 포트 와인의 등장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는 그야말로 수천 년 와인의 역사에 있어서 황금기이자 혁명 그 자체였다.

근대 와인 병의 발전 / 사진 출처: hogsheadwine.com

초창기 유리로 된 와인병은 두께가 얇고, 가벼우며, 바닥은 보통 정사각형이었다. 하지만 1630년대 영국에서 용광로의 땔감을 나무에서 석탄으로 교체하면서 새로운 유리병이 탄생했다. 와인병의 선조라 할 수 있는 이 병은 단단하고 두꺼웠다. 색은 짙었는데, 녹색과 검은색도 있었다. 몸통은 길고 둥근 모양이었으며, 끝으로 가늘어지는 형태였기 때문에 입구를 막기 위한 줄이 달려 있었다. 이 병은 개별 생산되었기 때문에 크기는 제각각이었지만, 부피는 비슷했다고 한다. 물론 주문 생산이 되기도 했다. 주문 생산한 병에는 둥그런 문양을 만들어 귀족의 이름 혹은 가문의 문장을 새겼다.

750ml 사이즈의 병에 와인을 담아 와인을 대량 판매하는 행위는 그리 오래된 과거가 아니다. / 사진 제공: 배두환

새로운 유리병은 튼튼했고 가격도 저렴한 편이었다. 예전 버전은 개당 6~8펜스였다고 하고, 17세기 말의 신형 유리병은 주문자의 이름이 새겨진다면 12개에 5실링, 없으면 4실링이 채 안 됐다고 한다. 이 병은 ‘영국 병’이라고 불렸으며, 영국의 상류층에서 부의 전유물로 상징되며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고 전해진다. 기록에 따르면, 영국의 뉴캐슬의 한 공장에서 1684년 한 해 생산된 병만 해도 무려 36,000개에 달했다고 한다.
이후 18세기 초반이 되면서 영국 병은 납작한 형태로 바뀌더니 공 모양의 몸통에 뭉툭한 목이 달린, 실험실 플라스크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다시 전체적인 모양새가 원형에서 사각형으로 바뀌었는데, 그 이유는 와인병을 눕혀서 와인을 보관하면 와인의 신선함이 오래간다고 알려지면서부터다. 이런 유행이 번지기는 했지,만 그 당시에는 유리병이라는 것은 단순히 와인을 보관하는 용기에 불과했다. 즉, 와인의 숙성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눕혀서 와인을 보관하면 와인의 품질이 오래간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 사진 제공: 배두환

와인을 병에 담아 판매하는 상인들도 간혹 있었지만, 병 크기가 다 달랐고 불투명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내용물의 양을 정확히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당연하지만 와인의 용량을 속여서 파는 상인들이 존재했다. 결국 영국 정부는 1686년 와인을 병에 담아 판매하는 행위가 불법이라고 공표했다. 이 조항이 다시 수정된 건 아주 먼 훗날인 1860년이었다고 한다. 그때까지 소비자들은 와인을 나무통에 사서 다시 병에 따르는 행위를 계속했어야 했다.
와인병의 발전은 코르크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바로 이 발견이야말로 와인 보관의 역사에서 전환점을 맞이한 대사건이라 할 수 있다. 와인병도 고대부터 시작됐지만, 코르크도 고대부터 이미 사용됐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코르크에 송진을 발라 암포라를 막아서 와인이 변질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정말 영특한 민족이었음이 분명하다.

코르크는 여전히 와인 병을 밀봉하는 매우 중요한 도구다. / 사진 제공: 배두환

그리고 이 방식이 부활한 것은 천 년의 시간이 지난 17세기였다. 그 긴 공백 시간 동안 와인은 가죽이나, 나무, 천 따위가 마개로 쓰였는데, 가장 널리 쓰였던 방법은 나무를 깎아 만든 마개로 나무통이나 비슷한 저장 용기의 구멍을 막은 뒤 천으로 빈틈을 메우는 방식이었다. 물론 이 방법도 와인의 변질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여하튼 유리가 산업화되면서 아주 잠시 유리로 만들어진 마개가 쓰이기도 했지만, 유리병이 워낙 다채로운 모양을 자랑했기 때문에 장기적인 대안이 되기에는 불충분했다.
결국 코르크 마개였다. 코르크는 신축성이 뛰어났고, 와인과 닿으면 수분을 머금어 팽창하기 때문에 와인병 입구의 모습이 제각각이어도 유연성 있게 끼어들어갔고, 와인의 수분을 먹고 몸집을 불리면서 산소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다만 최초의 문제는 끼워 넣은 후에 빼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코르크스크류의 발명으로 해결됐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들어맞는 부분이다.
코르크스크류의 등장도 17세기 영국이었다. 이 기발한 아이디어는 당시 총포류에 지급되던 탄환의 심지가 꼬여 있는 것에서 얻었고, 최초로 코르크스크류를 만들어 낸 것도 런던의 총포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특허를 낸 사람은 영국의 사무엘 헨샬(Samuel Henshall)로 연도는 1795년이다. 그가 만든 T자형 코르크스크류는 손잡이가 나무로 되어 있었고, 코르크가 너무 깊이 박히지 않도록 나선형 송곳의 길이가 적당해서 많은 이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프로방스의 도멘 드 라 시타델르의 코르크스크류 박물관 / 사진 제공: 배두환

코르크가 와인 마개로서 지니는 유일한 단점은 공급의 어려움이었다. 코르크를 만들 수 있는 나무는 유일하게 코르크 나무 뿐이다. 이 나무가 자라는 곳은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한정되어 있었다. 이는 와인을 병에 담아서 팔고 싶다면 반드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과 무역을 터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메수엔 조약은 이 공급 문제를 말끔히 해결했다. 1703년 포르투갈과 영국이 맺은 메수엔 조약은 주로 군사와 자유 무역에 관한 조약이었고, 영국산 양모와 포르투갈산 와인에 대해 서로 특혜 관세를 부여했다. 포르투갈 와인이 영국에서 붐을 일으키는 동안 와인 상인들은 코르크로 일석이조의 이득을 봤다

포르투갈의 코르크 나무 / 사진 제공: 배두환

참고로 현재 코르크 나무는 대략 전 세계에 2백만 헥타르 정도 분포하고 있는데, 포르투갈이 점유율 34%로 가장 많이 기르고 있다. 코르크 나무가 자라서 껍질이 두꺼워지면 껍질을 벗겨내는데, 이 작업은 보통 9년에 한 번씩 한다고 한다. 코르크 나무의 수령은 약 300년이니, 사는 동안 대략 30번 정도 코르크 마개를 생산하는 셈이다.

유리병과 코르크의 등장은 17세기의 독특한 두 와인, 스파클링 와인과 포트 와인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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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쟁이부부

선후배 사이였던 와인 매거진 기자 출신 남자, 소믈리에 출신 여자. 살아오며 경험한 와인의 절반을 함께 마셨고, 앞으로 만나게될 와인들은 항상 같이 마시게 될 동반자 관계. 평소엔 식당 주인, 때론 여행작가, 이따금 와인 강사, 이곳에선 와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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