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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탄생 (16부)

16. 와인의 근대화 3탄 – 프랑스 대혁명, 그리고 와인

피비린내 나는 프랑스 대혁명은 프랑스 사회와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와인 산업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우선 프랑스 대혁명이 어떻게 와인 산업에 큰 영향을 미쳤는지 이해하려면,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하게 된 이유를 알아야 한다.
프랑스 혁명은 1789년에서 1794년까지, 프랑스 왕국에서 발발하여 테르미도르 반동 이전까지 지속되었던 혁명을 말한다.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다른 혁명들과 구분하기 위해,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며, 이는 17~18세기에 걸쳐 일어난 여러 시민 혁명들 중에서도 가장 의의가 깊은 것으로 꼽힌다. 우선 내부적으로 연이어 즉위하는 무능력한 왕, 사치와 권력 유지에 급급한 귀족들, 구체제의 모순을 뿌리 뽑았고, 외부적으로도 프랑스 혁명의 영향력이 주위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면서 19세기 이후 각국의 시민 혁명의 촉발제로 작용했다.

공격 받는 바스티유 감옥 / 사진 출처: wikimedia by Jean-Pierre Houël

여담이지만, 혁명 시기 즈음에 즉위했던 루이 14, 15, 16세는 완벽하게 무능함이 돋보인 왕이었다. 루이 14세는 부족한 예산들을 순수하게 빚으로 충당했고, 이를 끝끝내 갚지 않고 20억 리브르에 이르는 막대한 부채를 증손자인 루이 15세에게 넘겨주고 승하했다. 루이 15세 역시 물려 받은 빚을 돈을 더 많이 빌리는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에 상황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천문학적으로 쌓인 국채는 루이 16세 치세에 이르러 국가 예산의 반 이상이 선대 왕들이 남긴 빚을 갚는 데 쓰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왕족과 귀족들의 사치는 전혀 줄지 않았다.

루이 16세 / 사진 출처: wikimedia by Joseph Duplessis

설상가상으로 이때 닥친 가뭄과 흉년이 서민들을 지옥으로 몰고 갔다. 1785년에는 극심한 가뭄이, 2년 뒤인 1787년에는 큰 홍수가 닥쳤고, 이듬해에 가뭄과 우박, 벼락, 그리고 1788년에서 1789년 사이 겨울에는 기록적인 추위가 프랑스를 강타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징세원들은 더 가혹하게 서민들을 수탈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이삭줍기라는 전통이 있었다.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을 떠올려보면 쉽게 연상이 될 것이다. 따뜻한 색채와 함께 목가적 풍경이 돋보이는 이 그림이 사실은 치열한 생존현장을 보여주었던 것. 당시 농촌에서는 밀을 수확한 후 바닥에 떨어져있는 이삭은 밀밭의 주인이 아니어도 가져가도 된다는 전통이 있었다. 유럽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떨어진 곡식의 낱알을 주워가도 된다는 것을 묵인해주는 전통이 있었고, 가난한 이웃들을 배려해주고 생존을 보장해주는 최소한의 관습이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에서는 이런 관행도 무시하고 가혹하게 농민을 수탈했다.

이런 가혹한 수탈은 언급했듯이 무능한 왕 때문이었다. 돈이 없던 왕은 귀족들로부터 돈을 빌리면서 그들에게 수조권을 줬다. 수조권은 영토에 대한 조세를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데, 쉽게 이야기해서 논이나 밭을 소유한 귀족이 그곳에서 일하는 농민들로부터 세금을 곡식이나 돈으로 받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왕한테 빌려준 돈은 못 받고 대신 수조권을 얻었으니 그 돈만큼 서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했다. 이 수조권은 당시 프랑스 전체의 절반 이상의 규모로, 기간은 수십 년 분이었다. 물론 이를 타계하려는 귀족들도 있었지만, 기득권들에 의해 번번히 무산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하기도 했다. 영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미국은 독립하고 경쟁국이었던 영국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었으나, 프랑스가 20억 리브르의 지출을 들여 얻은 건 자존심밖에 없었다. 결국 국가 재정이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

By 장 프랑수아 밀레 / 사진 출처: wikimedia

결국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이 벌어졌고, 이 소식이 퍼지자 프랑스 전역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분노한 민중은 기득권이었던 영주, 귀족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토지대장을 불태웠다. 이 뜻은 봉건제가 폐지 되었다는 말이다. 국민의회의 봉건제 폐지 법령을 매우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조: 국민의회는 봉건제를 완전히 폐지한다.
제3조: 사냥과 개방 방목지에 대한 독점권도 폐지된다.
제4조: 모든 영주 법정은 보상 없이 폐지된다.
제5조: 재속사제 단체와 수도 단체, 성직록 수취자, 교회 재산관리위원회 등이 권리를 보유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십일조와 그 대체 부과조들은 폐지된다.
제7조: 사법관직 또는 시 행정관직의 매매는 즉각 폐지된다.
제11조: 모든 시민은 출생에 관계없이 성직, 사무직, 군사직의 모든 직무와 위계에 오를 수 있다.
국민의회의 봉건제 폐지 법령 中

물론 프랑스에서, 사전적 의미의 봉건제 폐지는 이미 예전에 끝이 났지만, 프랑스 농민들이 받던 탄압은 봉건제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혁명을 기점으로 못을 받은 셈이다. 이후에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국민의회에서 가결이 되었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 주권재민, 사상과 표현의 자유, 사유재산의 자유 등을 골자로 한 이 선언이 바로 현대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By 외젠 들라크루아 / 사진 출처: wikimedia

그렇다면 와인 산업이 대혁명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무엇일까? 사회적으로 큰 문제였던 조세 문제가 혁명의 도화선 역할을 했기 때문에 와인에 부과되는 세금에 대한 이슈가 도마에 올랐다. 포도 재배업자들로서는 토지세만 해도 버거운데, 시장에 와인을 팔 때마다 세금을 내야 했으니 설상가상이었다. 참고로 이때는 와인의 판매세뿐만 아니라, 와인의 반입세도 부과했다. 예를 들어, 파리로 와인을 반입하려면 성문과 센 강 입구에서 관세를 내야 했던 것. 이 관세가 처음 실시될 때는 금액이 크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물가 상승률을 앞질렀고, 1789년에는 세금 때문에 와인 가격이 3배로 치솟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반입세는 품질이나 종류에 상관없이 통을 기준으로 책정됐기 때문에, 소매가로 따지면 값싼 저급 와인에 부과되는 세금이 값비싼 고급 와인보다 높았던 셈이다.

1615년의 파리,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 사진 출처: https://namu.wiki

이런 상황에서 파리에 와인을 반입하는 갖가지 불법적인 행태들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와인을 실은 수레를 다른 농산물로 덮은 다음에 세관을 지나가는 초보적인 방법부터, 와인이나 브랜디를 주전자에 넣은 뒤 여자의 치맛자락에 속에 숨기는 방법, 성벽 가까이 건물을 짓고 와인에 풍선을 달아 날리는 방법, 터널이나 수로를 뚫고 와인을 밀수하는 난이도 최상의 밀반입도 있었다. 정부가 터널이나 수로를 막으면 바로 새로운 게 생겨났는데, 기록에 따르면 1788년까지 정부가 폐쇄한 터널의 개수는 80개였다고 한다.

빈센트 반 고흐의 <La guinguette> / 사진 출처: wikimedia

그리고 당시에는 갱게트(guinguette)를 활용하는 것이 가장 노골적인 탈세 방법이었다. 갱게트는 프랑스어로 ‘야외에서 먹고 마시며 춤을 추는 교외의 술집’이라는 뜻이다. 와인을 파리 내부로 반입하는 데 돈이 많이 드니, 파리 근교에서 술을 마셨던 것. 당시에는 갱게트까지 몇 킬로미터만 걸어가면 파리 시민 누구나 시내의 4, 5분의 1의 가격으로 와인을 마실 수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그 당시 가장 유명했던 갱케트인 <르 탕부르 루아얄>은 1년 동안 무려 130여만 리터에 달하는 와인을 판매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혁명 이후, 혁명 정부는 간접세를 프랑스 전역에서 모두 폐지했다. 새로운 법안 발효일인 1791년 5월 1일 자정, 200만 리터의 와인을 실은 수백 대의 수레가 환희로 들뜬 채 파리 시내에 입성했다고 전한다.

프랑스 대혁명은 포도 재배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사진 제공: 배두환

또한 프랑스 혁명은 포도밭 확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전에는 불모지였던 땅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포도밭으로 점차 변경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농경지의 활용에 따르는 여러 제재들이 사라진 것. 혁명 이전에 정부는 곡물 부족을 우려해서 포도밭을 억제했다. 그리고 귀족들의 세금이나 교회의 십일조는 곡물로 받았기 때문에 농부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곡물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농부들은 교회에서 걷어가는 십일조가 3~10퍼센트였다. 그리고 농부의 압착기 소유를 금지했기 때문에 영주의 것을 빌려 쓰면서 사용료를 지불해야 했는데, 이 또한 수확량의 5~30퍼센트였다. 안타까운 사실은 영주도 압착기를 썼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주가 압착기를 다 쓰길 기다리다가 결국 수확기를 놓치기 일쑤였다. 이런 악습들이 없어지면서 농부들도 원하는 작물을 선택해서 재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건만 맞으면 많은 이윤을 올릴 수 있는 포도 농사야말로 제격이었다.

과거의 포도 압착기 / 사진 제공: 배두환

둘째. 내국 관세 폐지 덕분에 지역 간의 이동이 자유로워졌고, 와인 가격이 하락했다. 이 당시 와인 생산자의 가장 큰 고객은 정부였다. 나폴레옹이 전쟁을 지속하면서 군인들을 위한 와인을 많이 사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 때문에 무역이 중단되자, 프랑스 국내산 와인으로 소비자들이 눈을 돌리면서 내수 시장이 더욱 더 활발해졌다.

셋째. 혁명으로부터 온 가장 큰 변화는 역시 포도밭의 분배였다. 혁명 초기에는 교회의 재산이 국유화되고, 나중에는 외국으로 추방당했거나 정치범으로 기소된 사람들의 재산이 몰수되면서 포도밭의 주인이 많이 바뀌었다. 1790년대부터 포도밭에 대한 경매가 시작되었는데, 수지 맞는 사업에 뛰어들 기회를 잡기 위해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다만 보르도는 교회 소유의 포도밭이 적었기 때문에 부르고뉴보다 혁명의 영향을 덜 받았다. 현재 두 지역의 와인 산업의 특징을 구분하는 포인트도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교회 소유의 포도밭이 많았던 부르고뉴는 토지가 경매에 의해서 분해되었고, 세대가 지나면서 땅을 상속하는 과정에서 더욱 더 쪼개지면서 복잡한 포도밭 지도가 그려지게 됐다.

사원이 소유했던 부르고뉴의 포도밭은 혁명 이후 경매로 쪼개지게 된다. / 사진 제공: 배두환

국유지 경매도 일어났다. 이 경우 혁명 정부가 왕정으로부터 물려 받은 부채 청산을 위해 동원한 수단이었다. 경매를 선택한 이유는 조금이라도 비싼 가격에 넘기기 위해서였는데, 토지를 나누어 구입하거나 공동 입찰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경매라는 게, 지금도 그렇지만, 서민들에게는 기회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에도 국유지 경매의 최대 수혜자는 부르주아였다. 이렇게 해서 수많은 포도밭의 주인이 교회와 귀족에서 인근 도시의 투자가, 사업가, 전문가로 바뀌었다. 이때 부르고뉴의 유명 포도밭인 로마네 콩티도 1794년 7월에 경매로 주인이 바뀌었는데, 이때 이 포도밭을 설명하는 경매 소개 문구가 장황하기 그지 없다. 매우 장문이어서 포인트만 짚어보자면, “보관만 잘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맛이 좋아지며 8년, 혹은 10년이 지나면 노약자에게는 진통제가 되고 죽은 자를 되살리는 명약이 됩니다”라는, 지금으로서는 믿기 힘든 홍보 문구다.

사람을 살리는 명약으로 알려지던 로마네 콩티 / 사진 제공: 배두환

결론적으로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의 포도 재배와 와인 산업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혁명 덕분에 포도 재배업자들은 구체제 동안 계속되었던 여러 가지 구속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포도밭의 개수와 수확량이 증가했고 간접세 폐지로 와인은 시장을 더욱 넓고 깊게 파고들 수 있었다. 정부는 국가적인 차원에서나 지역적인 차원에서나 포도 재배와 고급 와인의 생산을 장려했다. 정부가 와인 산업에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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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쟁이부부

선후배 사이였던 와인 매거진 기자 출신 남자, 소믈리에 출신 여자. 살아오며 경험한 와인의 절반을 함께 마셨고, 앞으로 만나게될 와인들은 항상 같이 마시게 될 동반자 관계. 평소엔 식당 주인, 때론 여행작가, 이따금 와인 강사, 이곳에선 와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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