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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탄생 (13부)

13. 와인의 신대륙 상륙 – 북아메리카

북아메리카의 포도 재배는 예수회 선교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참고로 예수회는 1534년 8월 15일에 군인 출신 수사였던 이냐시오 데 로욜라에 의해 설립된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 수도회로, 대항해시대에 동방 항로 및 신대륙을 발견함에 따라 미개척지역으로 가톨릭교회를 확장시키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곳이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멕시코 북서부의 바하 캘리포니아의 러레이도 선교원에서 와인이 생산되기 시작한 연도는 1701년이었다고 한다. 또한 오늘날의 캘리포니아에 해당하는 지역까지 와인 생산이 확산된 것은 18세기 중반으로, 1760년 캘리포니아 남부에는 15개의 선교원이 있었고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의 선교원에서 와인을 만들었다고 한다.

미국 최고급 와인이 쏟아져 나오는 지금의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 / 사진 제공: 배두환

18세기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유명했던 포도밭은 LA 근처의 산 가브리엘 선교원의 포도밭이었다고 한다. 1790년대 여기서 생산된 와인은 약 16만 리터였고, 브랜디의 생산도 상당했다. 그리고 현재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의 노른자위라 할 수 있는 나파 밸리나 소노마에서 와인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보다 나중의 일로, 1820년대 즈음이다. 이때부터 개인 소유지의 포도밭들이 등장하면서부터 대규모 포도 재배가 활성화되었고 우리가 아는 현재의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의 위상 근간이 마련되었다. 미서부 캘리포니아의 괄목할만한 성장은 나중에 다뤄야 할 만큼 미래의 일이고, 북미 와인 산업의 시작은 역시 대항해시대의 개척자들이다.

미국 오리건주의 포도밭 / 사진 제공: 배두환

콜럼버스와 더불어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전설적인 항해가인 지오반니 다 베라짜노 Giovanni da Verrazzano가 바로 북아메리카 대서양 해안을 탐구한 최초의 유럽인이다. 그는 오늘날 노스캐롤라이나의 해안 지대의 포도나무를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농부가 가지런하게 정리해 놓은 것처럼 수많은 포도 덩굴이 나무를 휘감으며 자라는 모습이 롬바르디아의 포도나무와 비슷하다. 이곳은 훌륭한 와인 생산지가 될 것이 분명하다.” 참고로 이 베라짜노가 바로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유명 와이너리인 카스텔로 디 베라짜노의 그 베라짜노다.

베라짜노 성과 와이너리의 모습 / 사진 제공: 배두환

베라짜노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린 지오반니 다 베라짜노는 1485년 지금의 카스텔로 디 베라짜노에서 태어났다. 참고로 카스텔로는 이탈리아어로 ‘성’이라는 뜻이다. 그가 이탈리아를 떠난 건 1507년 즈음으로, 프랑스 해군과 계약을 맺고 프랑스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디에프(Dieppe)로 이주했다. 그는 1522년, 프랑시스 1세에게 북대서양을 종단하는 뱃길을 뚫자고 설득했고 승낙을 얻어냈다. 탐험대를 조직한 그는 <Delfina>라는 배를 몰고 긴 항해 끝에 1524년 4월 17일 지금의 뉴욕 항을 최초로 발견한 인물이 되었다.

지오반니 다 베라짜노 / 사진 출처: www.verrazzano.com

현재 뉴욕에서 브루클린과 스태튼 아일랜드를 잇는 베라짜노 다리(Verrazano-Narrow Bridge)가 바로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다리다. 참고로 이 다리를 건설할 때 실제로 이탈리아 베라짜노 성의 벽돌을 일부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다리 이름은 ‘Z’가 하나인데, 그 이유는 당시 주지사가 Z를 하나만 쓰는 걸 선호했기 때문이라고. 여하튼 뉴욕에 이 베라짜노 이름을 딴 마라톤도 존재한다. 안타깝게도 그는 1528년 세 번째 탐험에서 원주민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베라짜노 다리 / 사진 출처: www.verrazzano.com

기록에 따르면 지금의 미국 땅에서 와인이 가장 먼저 만들어진 곳은 플로리다 지역이다. 유럽에서 대서양을 건너서 미대륙에 상륙했다면 당연히 미동부, 그러니까 지금의 뉴욕, 플로리다, 캐롤라이나 등이 북미 최초의 와인 생산지가 될 수밖에 없다. 여하튼 미동부에 최초로 와인 문화의 꽃을 피운 이들은 16세기 프랑스에서 종교 박해를 피해 이주한 위그노들이었다. 위그노는 프랑스의 개신교 신자들을 이야기하는데, 당시 루이 14세의 박해를 받는 바람에 프랑스를 떠나서 세계 각지로 망명을 했고, 그중 하나가 북미였다. 다만 새로이 정착한 북미 지역에서도 프랑스 식민지에는 정착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뉴욕, 뉴저지, 플로리다 같은 주가 해당이 된 셈이다.

베라짜노의 항해 경로 / 사진 출처: www.verrazzano.com

참고로 위그노 신자는 프랑스 본토에서 전성기에 약 100만 명 내외로 전체 인구의 5% 정도를 차지했다고 한다. 특히 그 세력은 프랑스 남부에서 컸으며, 귀족층과 부르주아 계층에 널리 침투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많은 귀족들이 당시 프랑스 남서부 지방, 그러니까 님, 몽펠리에, 몽토방, 보르도까지 주요 와인 생산지에서 거주했었기 때문에 북미로 이주한 위그노들은 그곳에서 와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와인이란 술이 아닌 식량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위그노들은 플로리다 북부 세인트 존 강 입구에 보금자리를 건설하고 첫해부터 야생 포도나무로 와인을 생산했다. 이들이 와인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긴 사람이 있는데 바로 영국 출신의 존 호킨스(John Hawkins)다. 존 호킨스는 23살이던 1555년 아프리카 가나에서 잡혀 온 흑인 노예를 보고, 노예무역이 큰 장사가 되리라 판단하면서, 아프리카-영국-아메리카를 연결하는 삼각무역에 뛰어들어 큰돈을 번 인물이다. 그가 남긴 기록에는 위그노들이 식량 문제도 해결 안 하면서 와인만 만들고 있는 걸 보고 한심하다고 적혀 있다.

캐롤라이나에 터를 잡은 위그노 교도들의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스페인 개척자들에게 땅을 내주고 쫓기는 신세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위그노들을 내쫓은 스페인 개척자들도 포도밭을 개간하고 와인을 만들었다. 영국도 빠르게 움직였다. 대영제국이 북아메리카에 세운 식민지 중 첫 번째로 성공한 식민지가 바로 제임스타운으로, 이는 청교도 인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건너온 폴리머스 식민지보다 앞선 것이다. 제임스타운에서는 2년 뒤부터 포도 재배를 시작했는데, 여기 주민들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와인을 강제적으로 생산해야 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1619년에는 매년 열 그루의 포도나무를 심어서 관리하고 가지치기 방법을 반드시 배워야 했으며, 이 교육을 위해 여덟 명의 프랑스 와인 생산업자를 초빙했다고 전한다. 또한 1622년, 제임스타운의 모든 가구가 국왕의 명령으로 포도 재배와 와인 생산법을 담은 지침서를 받기도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지침서의 저자인 프랑스인 ‘보노에유’가 아메리카 대륙을 한 번도 가본 일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후 버지니아에서 포도 재배를 의무로 규정하는 법령이 1623년과 1624년 연달아 통과되었고 이곳 주민들은 가구별로 20세 이상 남성 한 명당 20그루의 포도나무를 재배해야 했다.

1614년의 제임스타운 / 사진 출처: commons.wikimedia.org/wiki/File:Colonial_Jamestown_About_1614.jpg

이토록 강제적으로 와인을 생산하게 한 이면에는 스페인이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 보여준 성공, 그러니까 미대륙을 식민지화하고 그곳에서 와인을 만들어 돈으로 창출하는 것을 따라잡기 위해서였다. 특히 영국은 와인 공급을 전적으로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지의 유럽 대륙에서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 식민지에서의 와인 공급이 절실했던 셈이다. 그러나 영국의 야심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포도보다 담배 산업이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넘어 온 포도나무들은 버지니아의 땅에 적응하지 못했고, 현지의 야생 포도로 만든 와인의 질은 현저히 떨어졌다. 결국 영국의 신대륙 와인 산업은 담배에 밀려 흐지부지되게 되었다.

존 칼뱅 / 사진 출처: wikimedia.org/wiki/File:Portrait_of_John_Calvin,_French_School.jpg

현재 미국 와인 산업을 책임지는 곳이 미동부가 아닌 미서부라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후에도 여러 유럽의 강대국들이 미동부 대륙에서 와인 산업에 대한 희망을 품고 갖가지 노력을 기울였지만, 완벽한 성공으로 기록된 것은 없었다. 그나마 성공한 이들이 전에도 언급한 위그노다. 1680년 종교 박해의 광풍이 다시 프랑스를 휩쓸고 갔을 때 최초의 대규모 위그노 개척자들이 올리브유, 비단, 와인 생산을 목적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재차 발을 디뎠다. 이때 만든 와인들이 꽤 성공적이었고 영국으로 보낸 샘플도 당시 ‘자칭 전문가’들에게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포도밭에 몰아친 치명적인 병충해 때문에 10년을 넘길 수 없었다. 시도와 실패. 이 두 단어는 북미에서 무려 18세기 후반까지 끊임없이 반복됐다. 정부의 대규모 지원에도 불구하고 200년째 똑같은 문제, 그러니까 토착 품종과 유럽 품종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지도 여전히 확실한 답을 내리기 어려웠고, 유럽 품종이 사시사철 계속되는 서리, 우박, 병충해를 견디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결책이 없었다.

미국은 현재 모든 주에서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사진은 워싱턴 주의 포도밭 / 사진 제공: 배두환

그렇다면 과연 북미 대륙에서 최초로 와인의 대량 생산에 성공한 사람은 바로 누구일까? 바로 스위스에서 이주한 뒤푸르(J.J. Dufour)다. 미동부의 와인 산업이 맥없이 실패하고 있는 걸 본 그는 내륙으로 옮겨 지금의 켄터키 주에서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1799년에 공동 출자 회사인 켄터키 포도원 조합을 결성하고 35개 품종의 포도나무 10,000그루를 심었다. 참고로 이 와이너리는 여전히 와인을 만들고 있다. 와이너리 이름도 ‘First Vineyard’. 여하튼 뒤푸르가 시작부터 바로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심었던 10,000그루가 3년 뒤에 흑균병과 백분병을 비롯한 병충해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

퍼스트 빈야드 / 사진 출처: www.kentuckywine.com

하지만 그는 첫 번째 실패에서 교훈을 얻었다. 병충해의 폭탄에서 살아남은 두 가지 품종을 발견한 것이 하나고, 또 하나는 포도 재배에 있어서 땅의 성질이 중요함을 파악한 것이다. 그는 켄터키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이주해 인디애나에서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이른바 2차 포도밭에서는 스위스에서 건너온 뒤푸르의 모든 가족들이 매달려서 와인을 만들었다. 그리고 1808년, 드디어 800갤런의 와인이 생산되었다. 뒤푸르의 와인 생산은 꾸준히 증가했고 1820년에는 12,000갤런으로 정점을 찍었다. 뒤푸르의 성공으로 자극을 받은 여러 사람들이 켄터키는 물론 그 근처의 인디애나, 오하이오에서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했고, 이 삼총사는 미국 포도 재배 산업의 선두 지역으로 떠올랐다. 1860년대에 실시된 조사에 따르면 미국 전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양은 160만 갤런(6백만 리터)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568,000갤런이 오하이오, 180,000갤런이 켄터키와 인디애나에서 생산되었다고 한다.

(다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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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쟁이부부

선후배 사이였던 와인 매거진 기자 출신 남자, 소믈리에 출신 여자. 살아오며 경험한 와인의 절반을 함께 마셨고, 앞으로 만나게될 와인들은 항상 같이 마시게 될 동반자 관계. 평소엔 식당 주인, 때론 여행작가, 이따금 와인 강사, 이곳에선 와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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