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와인과 각종 주류, 관련 기사를 검색하세요.

달콤한 유혹, 브뤼헤

북 브뤼헤 역(Brussel noord-Brugge). 브뤼셀에서 열차로 출발한 지 정확히 1시간 7분 후 브뤼헤에 도착했다. 열차가 떠나는 시간까지 맥주를 오장육부에 가득 채우고 탑승한 터라 잠이 밀려왔다. 중간에 열차 탑승권을 검수하는 직원이 깨우기 전까지는 잠이 의무인 양 눈을 감았다. 출발할 때부터 해는 배웅 인사 없이 지기 시작했고, 도착하니 한밤이 되었다. 다행히 비는 그쳤다. 평소 열차 안에서 다음 여행지 예습을 하는 게 습관인데, ‘에라 모르겠다’라며 자 버렸다. 기차역 안내소에서 지도 한 장을 빼 들고, 숙소까지 가는 길을 찾아보았다. 역 건물에 벗어나자마자, 아스팔트 위에서 올라오는 비와 땅이 섞인 냄새, 습한 기운이 뚫린 옷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피부 여기저기에 상주하는데, 난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낯선 도시를 대하는 긴장감, 또 시작됐다.

브뤼헤 역에서 나와 숙소로 향하는 길

호스텔에 짐을 풀고 1층 로비에 앉아 브뤼헤 일정을 정리하는데, “저기요, 혹시 혼자 여행 왔어요?”. 나보다는 족히 10살 연하의 한국 여성이 물었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대부분 묻는 이가 여행에 익숙하지 않아 속성으로 여행 정보를 캐가기 위함이다. 일종의 갈취 모드로 돌변하는 때도 있어서, 얄미운 마음에 처음에는 그녀 앞에 울타리를 쳤다. 내가 이만큼 장황하게 이야기한 이유는 결론적으로 그런 마음이 없는 친구였기 때문이다. 주위를 살펴보니 한국인은 없고, 밤에 도착해서 좀 무서운 찰나에 한국인인 날 발견한 거다. 경계 태세는 이미 해제되었고, 펼친 지도를 잠시 놔두고 그녀와 마주했다. 주로 혼자 여행을 하는 터라, 오랜만에 한국어로 대화하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추후 방문할 브뤼헤 맥주 카페 이야기로 흘러갔고, 그녀도 내 여정에 함께하기로 동의했다.

빨간 외벽의 스너플 백패커스 호스텔(Snuffle Backpackers Hostel) 숙소

브룩스 비르트예(t’Brugs Beertje)는 플라망어로 ‘브뤼헤의 작은 곰’이란 뜻이다. 브뤼헤의 중심인 마르크트 광장에서 남쪽 골목으로 내려오면, 흰색 간판에 곰이 맥주잔을 안고 있는 간판을 볼 수 있다. 플라망어로 ‘beer’는 맥주와 곰이란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세월이 누적된 인테리어는 맥주 카페의 나이를 짐작하게 한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라 안을 둘러보기보다는 맥주 리스트로 이 집을 판단하고 싶었다. 무려 300여 종의 벨기에 맥주 메뉴를 보유하고 있었다. 스프링 제본한 메뉴판은 이미 많은 사람이 넘겨봐서 그런지 헐거워져 있었다. 여성 취향의 복숭아 맥주 린데만스 뻬슈레제(Lindemans Pecheresse)와 1886년에 양조를 시작한 브루어리 드 릭(Brouwerij De Ryck)에서 빚은 아렌드 트리펠(Arend Tripel)을 주문했다. 아렌드 트리펠은 기본적으로 균형이 잘 잡힌 맥주이며, 쓴맛, 과일 맛, 단맛이 조화를 이룬다. 그녀에게 권한 린데만스 뻬슈레제는 람빅 맥주로, 그녀에게 아무 정보 없이 마셔보라고 권했다. 복숭아의 단맛이 나지만, 자연 효모로 빚은 맥주이기에 낯선 산미가 올라온다. 그런데 그녀는 생각보다 괜찮다는 반응이었다. 알코올 도수도 높지 않고(2.5%) 탄산이 많아서 샴페인 같다는 평이다.

마르크트 광장에서 서쪽으로 3분 정도 걸어가면 보이는 브룩스 비르트예

을씨년스럽다. 분명 구글 지도가 이 근처라고 표시하는데, 찾고자 하는 펍이 보이지 않는다. 늦은 밤, 거리 자체가 불친절하다. 그녀는 무섭다며 다른 곳으로 가자고 재촉했다. 같은 길을 세 번씩이나 돌다가 의문의 구멍 앞에서 멈춰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펴보니 열려 있는 한쪽 문에 찾고자 하는 펍의 이름이 휘갈겨져 있었다. 여기가 맞단 말인가. 지하세계로 통하는 입구 같아서 망설였다. ‘’t Poatersgat’는 벨기에 방언으로 ‘The Monk’s Hole’, 즉 ‘스님의 구멍’이란 뜻이다. 수도원에서 빚은 맥주와 관련 있는 뜻인지, 쉽사리 감이 잡히지 않는 단어다. 허술하게 잠긴 목재로 된 문을 젖히고 계단을 따라 내려갔더니 넓은 공간 속에 삼삼오오 사람들이 맥주를 즐기고 있었다.

밤에 찾은 ‘t Poatersgat 술집

미묘한 흰색 조명과 촛불로 연명하는 공간. 그리 번잡하지도, 조용하지도 않은, 날(生) 것 같은 분위기. 가정집이라면 다락방, 산속이라면 동굴의 아우라가 전해진다. 눅눅하지 않은데도 왠지 습도가 높은 곳에 앉아 있는 기분. 분위기 흐름에 맞춰 맥주도 자연 효모로 빚은 괴즈(Geuze)와 도수가 높은 베스트말레 트리펠(Westmalle Tripel)로 선택했다. 최대한 무겁고 진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같이 온 친구는 내 중후한 선택을 살짝 비웃는다. 본인은 달곰한 체리 맥주가 더 마시고 싶다며. 이 아이 나랑 맞는 것 같으면서 때론 튕겨 나간다. 괴즈 맥주를 마시더니 신맛에 적응하지 못하고 내 앞으로 잔을 밀어 놓는다. 자몽 에이드를 처음 마실 때의 내 기분도 이러했을 거다.

밀당하는 괴즈 맥주

다음 날 아침, 다시 이곳을 지나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밝을 때 제대로 보고자 갔는데, 한밤중에 느낀 그 신비로움은 사라지고, 그저 공용 쓰레기통 입구처럼 보였다. 역시 밤에 가야 제맛인 맥주 카페다.

낮에 찾은 ‘t Poatersgat 술집

“브뤼헤에서 가장 오래된 펍, 카페 블레싱헤(Café Vlissinghe)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1515년에 설립된, 500년이 된 맥주 카페다. 브뤼헤에서 가장 큰 어른, ‘블레싱헤’이다. 500주년이 되는 2016년 9월, 10월에는 카페에서 이벤트도 진행했다. 카페 단독이 아닌 브뤼헤 시의회도 동참하여 미니 박람회, 비디오 다큐멘터리, 전시회 등을 열어서 카페 충성 고객을 비롯한 방문객들에게 그 역사를 알렸다고 한다.

500년 된 맥주 카페 블레싱헤

브뤼헤는 서유럽의 베네치아라고 불릴 정도로 거리의 모습이 베네치아와 닮았다. 이곳의 여행은 마르크트 광장에서 시작하기에, 군중들이 광장 중심에 몰려있다. 블레싱헤에 방문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지도를 잘 따라가야 한다. 북쪽에 나 있는 다리를 건너 운하를 따라 걷자. 흰색 벽돌의 골목을 거닐다가 여기가 맞나 하고 의심이 생길 때쯤 카페가 모습을 드러낸다. 역사가 말해주듯, 이 카페는 브뤼헤의 보물과도 같은 곳이라 도시가 이 곳을 꽁꽁 싸맸나 보다. 붉은색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서 부엌을 지나, 나무벽 칸막이까지 통과하면 왼쪽에 작은 바가 있는 메인 룸이 나온다. 플라멩코 스타일의 내부와 이탈리아 또는 스페인 부두에서 봤음 직한 테라스가 관전 포인트다. 발을 옮길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는 카페의 역사를 대신 말해주며, 나무 테이블 가운데 보존된 대형 벽난로는 겨울을 나기에 충분해 보였다. 한겨울에 이 카페를 방문하면 온전히 날 받아줄 것만 같았다. 여름에 이 카페에 왔다면, 실내보다는 정원을 추천한다. 살짝 드리운 햇볕을 조명 삼아 늘어지게 먹고 마시기 충분한 곳이다. 오래전에 이곳에서는 ‘크루볼렌(Krulbollen)’이라는 스포츠를 지역민이 함께 즐겼다고 한다. 내가 보기엔 컬링과 볼링의 그 중간에 있는 스포츠이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세월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고풍스러움

벨기에 사람들은 맥주 안주로 살라미와 피클을 많이 먹는다고 해서, 이 두 메뉴를 호가든 그랑 크뤼, 오발(Orval) 맥주와 함께 주문했다. 호가든 그랑 크뤼는 8.5%의 높은 도수와 강한 과일 향을 자랑한다. 여성은 이 맥주보다는 호가든 로제(Hoegaarden Rosée)를 선호한다. 시선 강탈은 체리 빛이 맡는다. 체리 향과 장미의 풍미가 가득하다.

과일 향이 강한 호가든 그랑 크뤼

맥주 몇 잔에 자존심을 버리고 취한 기운을 내버리러 시내를 돌았다. 브뤼헤 돌길 사이로 드문드문 출몰하는 초콜릿 상점. 맞아, 벨기에는 초콜릿의 나라잖아. 초콜릿 향이 나는 맥주를 선호해서 그 원액에도 관심이 많다. 상점 쇼윈도 앞에 소녀들이 안을 바라보며 흐뭇해한다. 아이 손을 잡고 걷는 부모에게는 이곳이 정체구간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벨기에 초콜릿을 찾는 고객은 다양하다. 다양한 욕구를 충족할 만한 초콜릿들이 생각보다 광범위하게 깔려있다. 체리가 박혀 있는 초콜릿, 모양은 투박하지만 맛은 잘생긴 초콜릿, 식용보다는 장식용으로 제작된 초콜릿. 관광객의 지갑을 녹일 수밖에 없는 벨기에의 초콜릿까지. 입은 맥주에 취하고 눈은 초콜릿에 취한다. 나에게 브뤼헤는 마냥 달콤한 도시다.

거리에 가득한 초콜릿 상점

 

Tags:
신동호

발로 기억하는 보헤미안, 혀로 즐기는 마포술꾼.

  • 1

You Might also Like

Leave a Comment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