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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탄생 (6부)

6. 와인의 부활(1) – 보르도의 부상

1000년이 되자 포도는 유럽 전역에서 재배되었다. 10세기와 11세기에 프랑스에 땅을 가진 많은 이들은 와인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숲을 개간하고 늪을 메워서 포도밭을 만들었다. 불모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슬람 제국이 쇠퇴하면서 이베리아반도를 빠져나가면서 이 지역의 와인 생산은 복수라도 하듯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와 같은 포도밭의 증가는 독일이나 영국 등지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국은 현재로서는 와인 생산국이라기보다는 소비국에 매우 가깝지만 11세기에는 꽤 많은 포도밭이 있었고 와인 생산도 활발한 편이었다. 헝가리에서도 숲을 없애고 포도를 심었는데, 바로 이때 탄생한 와인 생산지가 토카이다. 이들이 만들어 낸 달콤한 귀부 와인은 늦게 빛을 발하기는 했지만, 17세기 이후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세계 와인 애호가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700년이 지난 먼 이후의 일이다.

포도를 와인으로 만드는 사업은 중세 시대에도 꽤 수지가 좋은 사업이었다. / 사진 제공: 배두환

이처럼 유럽 곳곳에서 포도밭 면적이 늘어나게 된 이유는 당연하지만, 와인의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1000년에서 1300년까지 300년 동안 유럽 대륙의 인구는 4천만에서 8천만 명으로 두 배가 늘어났다. 이러한 인구 증가와 함께 유럽 곳곳에서 늘어난 인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었다. 특히 본래부터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었던, 런던이나 파리는 그야말로 대도시라는 단어가 어울릴 만큼 인구가 늘어났다.

인구와 도시의 성장은 와인의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 사진 제공: 배두환

도시의 성장과 이로 인한 무역의 확대, 그리고 무역으로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한 부유한 중산층과 상인 계급이 등장했고 이들은 교회, 귀족 계급과 함께 막대한 고급 시장을 형성했다.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와인은 부유층을 상징하는 사치품이었다. 문제는 시장은 있으나, 포도 재배에 적합하지 않은 지방이 대부분인 이들 시장에 와인을 어떻게 공급하냐였다. 이탈리아 북부의 대도시에 거주하는 이들의 경우, 토스카나를 중심으로 한 중부의 와인(예를 들어 키안티)을 마셨고, 스페인의 신흥 도시에서 사는 이들은 이슬람 세력이 퇴장한 후로 급증한 스페인 와인을 즐겼다. 독일 와인은 라인, 마인, 모젤강 유역을 중심으로 생산된 것들이 강을 타고 쾰른이나, 프랑크푸르트와 같은 대도시로 흘러 들어가기도 했고, 영국이나, 프랑스 등지로 수출이 되기도 했다.

현재의 꼬냑 생산지는 중세 시대에 유명한 와인 생산지였다. / 사진 제공: 배두환

유럽 와인 시장의 영원한 큰 손인 영국의 와인 시장은 자급자족으로 충족을 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커서 수입 와인이 필수였다. 특히 이들이 주로 수입한 와인은 그나마 가까운 프랑스 서부 지역이었는데, 초기에는 지롱드강 북부가 대상이었다. 12세기 아키텐 공작이었던 기욤 10세가 1130년 라로셸 La Rochelle 항을 개발했는데, 이곳은 원래 인근 석호에서 바닷물을 증발 시켜 나온 소금을 수출하는 곳이었다. 소금은 현재도 중요하지만, 냉장고가 없던 당시에 소금은 생선과 육류를 썩지 않게 하는 신이 내린 선물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수요가 굉장했다. 소금을 생산하는 일이나 혹은 소금을 수출하는 운송업에 종사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로 항구가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이들의 갈증을 풀어줄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항구의 내륙 지역에 포도를 심었다. 그때는 와인 생산으로 이름 꽤나 날렸지만, 바로 밑 지역의 보르도가 급부상하면서 점차 하락세를 걷게 되는데, 참고로 이 지역이 바로 지금의 꼬냑 생산지다.

서유럽의 중세 전성기 시절 가장 부유하고, 가장 큰 권력을 지녔던 여공작, 엘레오노르 / 사진 출처: wikimedia

보르도가 국제 와인 무역의 중심지로 떠오른 것은 13세기다. 와인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은 들어봤을 엘레오노르의 세기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재혼 스토리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엘레오노르는 위에서 잠깐 언급한 아키텐 공작의 기욤 10세의 첫째 딸로 태어났다. 참고로 프랑스 역시 로마법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많은 영주가 장자 상속제도를 따랐다. 다만 이 제도를 따르려면 아들을 가져야 하는데 아들을 갖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재산을 상속받은 아들이 전쟁이나 질병 따위로 일찍 사망하는 경우가 당시에는 매우 빈번했기 때문에, 이 경우 큰딸이 상속을 받거나 영지를 물려받아 직접 경영하는 것도 가능했다.

와인의 흥망성쇠도 정치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다. 사진은 무똥 로칠드 / 사진 제공: 배두환

다만 상속을 받은 여성일지라도 결혼을 하게 되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재산을 남편과 공유해야 했다. 그리고 이 공동 재산을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은 오로지 남편에게 있었다. 즉 ‘공동’이라는 말이 붙긴 했지만, 남편의 동의 없이는 아내가 마음대로 재산을 처분할 수 없는 상황인 것. 만약 남편이 장기간 전쟁에 나가 있거나 병환이 심각한 상태라면 법적으로 아내가 재산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이 생겼다. 또한, 남편이 죽게 되면 아내가 결혼 당시에 부모로부터 받은 재산에 대한 권리를 돌려받게 된다.

엘레오노르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십자군 전쟁이 매우 활발하게 벌어지던 시대였다 / 사진 출처: wikimedia

이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보자. 기욤 10세에게는 3명의 자식이 있었고 본래 상속을 물려줄 막내아들(기욤 에그레이)이 있었다. 다만 그가 4살에 어머니와 함께 사고로 사망했고 장자상속제도를 이을 마땅한 자식이 없자 큰 딸인 엘레오노르가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을 위치에 선 것이다. 기욤 10세는 1137년 성지 순례길에 올랐다가 오염된 물을 마셔 병을 얻었고 사망하기 전 훗날이 걱정된 기욤 10세는 영지를 지켜줄 유력한 사윗감으로 상위 주군인 프랑스 왕 루이 6세의 아들 루이 7세를 점 찍고는 루이 6세를 후견인으로 지명했다.
한편 루이 6세도 이질 때문에 생사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고,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자신만큼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던 기욤 10세가 자신을 후견인으로 지정하자, 그는 자기 아들과 엘레오노르를 혼인시킨 후 자식을 낳으면 자연스럽게 아키텐을 흡수할 수 있을 거라 판단하고 이를 시행에 옮겼다. 1137년 7월 25일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가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다만 기욤의 유언에 따라 엘레오노르의 재산 아키텐은 루이와 엘레오노르 사이에 아들이 생길 때까지 독립적인 공작령으로 유지되었다. 그리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루이 6세가 세상을 떠났고 곧바로 엘레오노르는 프랑스 여왕이 되어 왕궁으로 입성하게 된다.

엘레오노르가 루이 7세와 결혼하면서 그에게 준 예물. 유일하게 남아 있는 엘레오노르의 유물이라고 한다. / 사진 출처: wikimedia

하지만 둘의 사이는 함께 원정길에 오른 2차 십자군 전쟁에서 틀어졌다. 예루살렘을 순례하고자 하는 루이 7세와 에데사 백작령을 탈환하자는 엘레오노르의 의견 충돌도 문제였고, 루이 7세는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엘레오노르를 무력으로 억류하기도 했다. 결국 최악의 패전을 겪고 목숨을 부지해 고국으로 귀환하는 동안 엘레오노르의 숙부가 이슬람군에게 참수형을 당하는 불상사까지 벌어진다. 엘레오노르는 숙부의 죽음과 루이 7세에 대한 환멸이 더해져 이혼을 결심하게 된다. 엘레오노르는 루이와의 결혼을 무효로 하려고 했으나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게 거절당했다. 그러나 둘째 딸 알릭스가 태어나자 엘레오노르에게서 아들을 얻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루이도 이혼에 합의한다. 자녀들의 양육권은 루이 7세가 가졌지만, 아키텐의 영지는 엘레오노르에게 반환되었다.

앙리와 결혼한 후 영국 왕비가 되면서 부부가 통치하게 된 광활한 영토의 크기 / 사진 출처: wikimedia

이혼 후 홀로 자신의 영지인 푸아티에로 돌아오던 엘레오노르는 두 명의 영주에게 납치당할뻔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엘레오노르는 자신과 아키텐을 보호해줄 강력한 남편이 필요함을 느꼈다. 그리고 노르망디 공작이자 앙주 백작인 앙리를 선택한다. 그녀는 푸아티에에 도착하자마자 사절을 보내 앙리에게 결혼식을 올리자는 내용을 전했고, 결혼 취소가 된 지 8주만인 1152년 5월 18일 둘은 결혼을 했다. 그리고 2년 후 1154년 10월 25일 앙리는 자신의 어머니와 오랜 시간 왕위 계승을 놓고 전쟁을 벌였던 스티븐이 죽자 헨리 2세가 되어 영국의 국왕에 오르게 된다. 파란만장한 삶의 엘레오노르는 아키텐 공작에서 프랑스의 여왕으로, 그리고 다시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변신한 역사상 전무후무한 희대의 여성이 됐다.

엘레오노르의 아들 사자왕 리처드 / 사진 출처: www.bl.uk

이후 13년 동안 헨리와의 사이에서 5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낳았는데, 이중 아들 둘은 훗날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헨리와 엘레오노르의 사이는 결국 파탄 났고, 심지어는 아들 헨리가 헨리 2세에게 일으킨 반란을 지원하다 1173년부터 헨리 2세가 죽는 1189년까지 유폐되었다. 결국 뒤를 이은 아들 리처드 1세가 그녀를 곧 해방해주었고, 왕태후가 되자 아들이 제3차 십자군에 참전하면서 자리를 비우는 동안 섭정으로 통치했다. 리처드가 죽은 이후에도 막내아들 존의 치세까지 살았다. 자식 중에서 그녀보다 오래 산 사람은 존과 딸 카스티야의 왕비 엘레오노르밖에 없었다.

보르도가 왜 세계 와인 생산의 중심이 되었는지는 역사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 사진 제공: 배두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엘레오노르는 살아생전 아키텐의 상속권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가족들끼리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그녀를 해방해주었던 효자 리처드가 어머니에게 공국을 돌려주었지만 엘레오노르는 라로셸만을 편애했고, 보르도의 와인 생산업자들이 과중한 세금 때문에 가스코뉴의 고급 와인이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하소연해도 못 들은 척했다. 참고로 가스코뉴는 보르도와 남서부 일대를 가리킨다. 엘레오노르의 막내아들인 존이 영국의 왕위에 오른 뒤에야 보르도는 라로셸의 그늘에서 벗어나 특혜를 받을 수 있었다. 1203년 존은 프랑스와 전쟁을 벌일 때 보르도가 군수물자를 지원한 것에 보답하고자 그동안 가스코뉴 와인에 부과되었던 세금을 낮춰주었다.
물론 라로셸의 항의가 잇따랐고, 존은 아무렇지 않게 보르도와 똑같은 혜택을 주었다. 프랑스 서부 지방의 와인은 이제 같은 조건에서 영국 와인 시장을 놓고 경쟁을 벌이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 바로 이때 영국 왕실의 특혜가 보르도 와인에 주어진다. 보르도가 카스티야(지금의 스페인)의 공격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한 대가로 보르도 와인을 메인으로 주문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보르도 와인 생산업자들로서는 신이 내린 축복과도 같았다. 결국 1224년 라로셸이 프랑스에 귀속되면서 보르도의 독주가 시작된다.

엄청난 자본은 보르도 와이너리를 한 단계 더 앞서게 할 수 있었다. 사진은 무똥 로칠드 / 사진 제공: 배두환

이후로 13세기가 막을 내릴 때까지 가스코뉴 와인은 영국 시장을 거의 독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1243년 한 해에 헨리 3세는 프랑스 와인 1,445통을 구매했는데, 거의 다 가스코뉴 와인이었다고 한다. 이 통이 당시 영국에서 통용되던 250갤런짜리라고 가정했을 때 그가 사들인 와인의 양은 무려 1,655,000리터에 달하는 양이다. 물론 영국 전체 와인 수입량에 비하면 미미할 수 있지만, 포인트는 바로 영국 왕실에서 샀다는 사실. 이것만으로도 가스코뉴 와인은 프랑스 어느 지역의 와인보다 그 가치를 인정받은 셈이다.

포도밭의 바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보르도 와인 산지. 사진은 샤또 몽로즈 / 사진 제공: 배두환

보르도시 인근에 포도밭들이 빼곡하게 들어서게 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13세기 초반 지금의 부채꼴 모양으로 지속적으로 확대된 보르도 와인 산지는 유럽에서 가장 미래가 밝은 와인 생산지로 급부상했다. 여기에는 오늘날 그라브에 해당되는 곳은 물론 보르도를 타고 내륙으로 가로지르는 여러 강들의 와인 산지, 예를 들어 생테밀리옹이나, 포므롤, 앙트르 드 메르 와인들도 함께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멀게는 가이약Gaillac과 카오르Cahors에서 생산된 와인도 보르도로 옮겨져서 가스코뉴 와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수출됐다. ‘클라레Claret’라는 말도 이때부터 나왔다. 스페인에서 생산되는 짙은 빛깔의 와인과 구별하기 위해 밝은 빛깔의 가스코뉴 와인을 부르는 용어다.

보르도의 독주는 근처의 다른 와인 산지들의 쇠퇴를 불러왔다. 사진은 샤또 몽투스 / 사진 제공: 배두환

시장이 커지면 규칙이 생기는 법이다. 보르도의 와인 상인들은 자신들의 권리와 이윤을 보호하기 위해 엄격한 규칙을 만들었다. 즉 이전에 가스코뉴 와인으로 통용되던 가이약이나 카오르 등지의 남부 지역 와인은 일정 기간 이후에만(보통 11월 중순과 크리스마스 사이) 보르도로 반입할 수 있다는 규칙이었다. 이는 곧 보르도 시장에서 자신들이 만든 제품이 모두 다 팔린 뒤에야 남은 와인의 진출을 허용하겠다는 의미였다. 이와 같은 규칙은 매우 오랫동안 그 명맥을 유지했고, 보르도 와인들의 기상은 높였으나, 남서부 지역 와인 생산자들의 좌절과 절망을 야기하기도 했다.
13세기 중반에는 영국 왕실에서 주문하는 와인의 4분의 3이 보르도 것이었고, 1282년 에드워드 1세Edward I는 웨일스와 전쟁을 치르는 병사들을 위해 가스코뉴 와인 600배럴을 주문하기도 했다. 유럽을 강타했던 흑사병과 같은 악재에도 보르도의 상인들은 와인을 수출하는 데 전념했다. 정확한 통계 자료는 없지만 보르도 와인 최대의 시장은 영국이었고, 14세기 말엽에는 수출된 와인 중 4분의 3이 영국으로 향했다. 나머지는 스페인과 플랑드르, 독일, 프랑스의 기타 지역으로 골고루 분산되었다.

중세 영국인들이 좋아했던 클라레는 마치 보졸레처럼 맑고 영롱하고 신선한 와인이었다. / 사진 제공: 배두환

매년 10월이면 수백 척의 선단이 프랑스 와인을 싣고 보르도에서 닻을 올렸다. 그리고 소규모 화물선은 낭트와 라로셸에서 출발했다. 영국까지 걸리는 시간은 날씨와 정치 상황에 따라 달랐지만, 최소 일주일이었다. 12월이 지난 뒤에도 보르도의 창고에 남은 와인은 통을 바꿔서 이듬해 봄에 출하했는데, 이를 ‘레크’라고 불렀다. 이 와인은 급이 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격도 저렴했다. 사실 요즘 입맛으로 따지면 새로 통을 갈아서 숙성시킨 이 레크가 훨씬 더 고급 와인으로 통용될 것이다. 하지만 중세 시대 영국인의 입맛은 현대의 보졸레 누보처럼 맑고 가볍고 영롱한 클라레였다.
모든 것에는 명암이 있듯이 프랑스 와인의 성공은 영국 와인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영국 와인은 물밀 듯이 들어오는 가스코뉴 와인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맛도 좋고 값도 싼 프랑스 와인이 등장하자 소비자들은 영국 와인에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고, 1,300여 개에 달하던 상업용 포도밭 대부분이 다른 용도로 변경되면서 종말을 고했다.

보르도가 프랑스에 귀속되면서 영국 시장에서의 보르도 와인은 가격이 치솟았고 결국 보르도 와인의 이미지가 고급화되는데 일조했다. / 사진 제공: 배두환

보르도의 와인 수출은 1300년대 초반에 전성기를 구가했다. 1305년에서 1308년까지 3년 동안, 매년 가스코뉴의 항구를 출발하는 와인은 98,000배럴에 달했고, 이를 양으로 따지면 약 9억 리터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정치 상황의 변화는 오랫동안 와인 산업에 영향을 미쳤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백년전쟁이다. 결국 1450년대 이후 보르도가 프랑스로 귀속되면서 영국으로 수출되는 와인의 양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프랑스 국왕들은 와인 무역이 보르도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수출을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세금을 부과했다. 덕분에 소량으로나마 와인 무역은 계속되었고, 영국에서 판매되는 보르도 와인의 가격은 상승했다. 15세기 후반 보르도 와인의 값은 1갤런당 8펜스를 훌쩍 넘겼다. 이는 가스코뉴에서 와인 무역이 한창이던 1300년대 초반에 비하면 두세 배에 해당하는 가격이다. 우리는 여기서 보르도가 왜 세계의 다른 와인 생산지보다 질과 양 그리고 가격에서 어떻게 앞서 나갈 수 있었는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다음 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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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쟁이부부

선후배 사이였던 와인 매거진 기자 출신 남자, 소믈리에 출신 여자. 살아오며 경험한 와인의 절반을 함께 마셨고, 앞으로 만나게될 와인들은 항상 같이 마시게 될 동반자 관계. 평소엔 식당 주인, 때론 여행작가, 이따금 와인 강사, 이곳에선 와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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