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있는 싱가포르의 겔랑이라는 지역은 북쪽으로는 후강(Hougang) 과 토페요 (Toa Payoh) 그리고 남쪽으로는 바닷가 지역 (Marine Parade) 그리고 서쪽으로는 칼랑 (Kallang) 과 센츄럴 (CBD) 그리고 동쪽으로는 공항 지역 (Changi)에 맞다아 있다.
이렇게 얘기하니 마치 싱가포르의 최중심지에 살고 있는 느낌이 드는데 그도 그럴것이 각 지역으로의 접근성이 용이한 겔랑 로드와 심스 애비뉴를 끼고 있으니 겔랑에서 출발하여 싱가포르 전역으로 도착하는데 최장 시간이라고 해봤자 30여분이 걸리니 교통여건으로만 본다면 최중심지나 다를바가 없다. 그러나 이 교통의 요지 겔랑에는 100년 전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 되돌아 보게 만드는 일대의 역사적 사건과 배경이 반전으로 기다리고 있다.
싱가포르에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터 가장 많이 들어온 질문이 어디에 사느냐이다.
물론 그 질문은 개인적인 관심과 호기심이 묻어나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싱글에 한국에서 온 여자사람임을 염두에 둔다면) 그 호기심반 관심반 받는 호구조사식의 질문을 난 항상 단 한마디로 일축해 질문하는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들곤 한다.
I live in Geylang. (So what? )
겔랑에 사는디요. (그래서 어쩔건데)
그러면 이 한국 여자사람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지닌 로컬 아줌니 아저씨들은 여기에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되묻고는 한다.
Why?(Do you live in Geylang?) 이러시면서…
와이 (왜)라니… 나 참… 이런 관심 많은 사람들을 봤나.
처음에는 뜨거운 관심이 부담스러웠고, 또 어쩔땐 당혹스럽기까지 했던 이 통과의례같은 질문의 이유를 겔랑에서 살게된지 그리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한 때 (그리고 지금도 일부 합법적으로) 매춘의 소굴로 유명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되고 난 후 싱가포르에 오기 전에 집 구하는 것을 도와주었던 싱가포리안 친구를 아주 잠시나마 원망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당혹스러운 질문도 능청스럽게 받아 넘기며 오히려 뻔뻔스러운 농담으로까지 받아쳐 줄 줄아는 마음의 여유(?) 까지 생긴듯 하다.
우여곡절 끝에 이사와서 적응하게 된 이 겔랑은 싱가포르에서도 가장 옛날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참으로 매력적인 곳이다.
어떤이에게는 이 겔랑이 매춘과 마약의 소굴로 잘못 인식이되어 혐오를 띠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는데 뭐 어쩌겠는가. 그것도 싱가포르 역사에서 피할수 없는 한 부분이며 또 사실이기도 한것을.
고리타분한 역사 얘기는 가뿐히 생략한다치더라도 먼 옛날 싱가포르가 포르투갈,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를 받았었고 또 한 때는 (1819년대) 국제 무역항으로 개발되어 크게 성장했다가 1867년에는 대영제국의 식민지에 편입 되었고, 그 이후에는 제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가 또 다시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은 역사는 새삼스럽지만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큰 사건들로만 미루어 봐서도 싱가포르에 세계 열강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었고 이 작은 무역항을 차지하기 위한 열강들의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그말인 즉슨 멀리서 온 외국인들 (특히 기반시설을 만들기 위해 온 노동자들, 군인들)을 위로할만한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음은 불보듯이 뻔하다.
거기에 중국에서 가뭄과 빈곤에 허덕이다 이주해 온 (영어를 할 줄 모르고 교육수준도 낮은) 저임금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는 사태와 맞물려 상대적으로 교통이 편하고 당시에 항구와 인접해 있던 이 겔랑에 특이한 문화가 형성된 결과를 나은 것이다.
중국에서 또는 근접한 동남아 국가에서 더 나은 삶을 위해 싱가포르로 이주해 정착한 그네들의 어머니, 딸 그리고 심지어는 어린 남자아이까지도 낮은 교육수준으로 인해 할 수 있는 일은 분명 한정되었을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알고 난 후 접하게 되는 겔랑의 모습은 애처롭고 한 편으로는 따뜻하기 그지 없다. 생계를 위해 몸을 팔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과 각종 기반 시설을 건축하러 온 노동자들 그리고 외국인 이민자들이 뒤섞여 정착하며 나름대로의 사회적 커뮤니티를 만들어 서로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도움을 주기에도 여념이 없었던 100여년 전 당시의 모습은 겔랑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샵하우스라는 건축물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당시 겔랑에는 말레이계 화교들이 많았는데 그 화교들의 출신지도 각각 다양했다.
특히나 같은 지역 출신의 화교들은 모임을 만들어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도움을 주고 받곤 했는데 그들이 소위 모임의 “지부” 또는 “본부” 로 사용했던 건물들이 현재까지도 남아서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는 샵하우스들이다.
계속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