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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랑 (Geylang), 100년 전 시간 속으로… 이야기 하나

겔랑 (Geylang), 100년 전 시간 속으로… 이야기 하나

HanChloe 2016년 6월 22일

 

사진 1. 겔랑의 중심도로 겔랑로드 (battypost.com)

사진 1. 겔랑의 중심도로 겔랑로드 (battypost.com)

 

내가 살고 있는 싱가포르의 겔랑이라는 지역은 북쪽으로는 후강(Hougang) 과 토페요 (Toa Payoh) 그리고 남쪽으로는 바닷가  지역 (Marine Parade) 그리고 서쪽으로는 칼랑 (Kallang) 과 센츄럴 (CBD) 그리고 동쪽으로는 공항 지역 (Changi)에  맞다아 있다.

이렇게 얘기하니 마치 싱가포르의 최중심지에 살고 있는 느낌이 드는데 그도 그럴것이 각 지역으로의 접근성이 용이한 겔랑 로드와 심스 애비뉴를 끼고 있으니 겔랑에서 출발하여 싱가포르 전역으로  도착하는데 최장 시간이라고 해봤자 30여분이 걸리니 교통여건으로만 본다면 최중심지나 다를바가 없다. 그러나 이 교통의 요지 겔랑에는  100년 전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 되돌아 보게 만드는 일대의 역사적 사건과 배경이 반전으로 기다리고 있다.

 

사진 2. 싱가포르 내의 겔랑 위치 (구글)

사진 2. 싱가포르 내의 겔랑 위치 (구글)

싱가포르에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터 가장 많이 들어온 질문이 어디에 사느냐이다.

물론 그 질문은 개인적인 관심과 호기심이 묻어나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싱글에 한국에서 온 여자사람임을 염두에 둔다면) 그 호기심반 관심반 받는 호구조사식의 질문을 난 항상 단 한마디로 일축해 질문하는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들곤 한다.

I live in Geylang. (So what? )

겔랑에 사는디요. (그래서 어쩔건데)

그러면 이 한국 여자사람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지닌 로컬 아줌니 아저씨들은 여기에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되묻고는 한다.

Why?(Do you live in Geylang?) 이러시면서…

와이 (왜)라니…  나 참… 이런 관심 많은 사람들을 봤나.

처음에는 뜨거운 관심이 부담스러웠고,  또 어쩔땐 당혹스럽기까지 했던 이 통과의례같은 질문의 이유를 겔랑에서 살게된지 그리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한 때 (그리고 지금도 일부 합법적으로) 매춘의 소굴로 유명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되고 난 후 싱가포르에 오기 전에 집 구하는 것을 도와주었던 싱가포리안 친구를 아주 잠시나마 원망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당혹스러운 질문도 능청스럽게 받아 넘기며 오히려 뻔뻔스러운 농담으로까지 받아쳐 줄 줄아는 마음의 여유(?) 까지 생긴듯 하다.

 

사진 3. 자세히 보면 호객행위를 하는 아시아 여성들을 발견할수 있다.

사진 3. 자세히 보면 호객행위를 하는 아시아 여성들을 발견할수 있다.

 

사진 4. 겔랑의 레드라잇 디스트릭트 (Geylang red light district map, google)

사진 4. 겔랑의 레드라잇 디스트릭트 (Geylang red light district map, google)

우여곡절 끝에 이사와서 적응하게 된 이 겔랑은 싱가포르에서도 가장 옛날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참으로 매력적인 곳이다.

어떤이에게는 이 겔랑이 매춘과 마약의 소굴로 잘못 인식이되어 혐오를 띠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는데 뭐 어쩌겠는가. 그것도 싱가포르 역사에서 피할수 없는 한 부분이며  또 사실이기도 한것을.

고리타분한 역사 얘기는 가뿐히 생략한다치더라도 먼 옛날 싱가포르가 포르투갈,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를 받았었고 또 한 때는 (1819년대) 국제 무역항으로 개발되어 크게 성장했다가 1867년에는 대영제국의 식민지에 편입 되었고, 그 이후에는 제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가 또 다시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은 역사는 새삼스럽지만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큰 사건들로만 미루어 봐서도 싱가포르에 세계 열강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었고 이 작은 무역항을 차지하기 위한 열강들의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그말인 즉슨 멀리서 온 외국인들 (특히 기반시설을 만들기 위해 온 노동자들, 군인들)을 위로할만한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음은 불보듯이 뻔하다.

거기에 중국에서 가뭄과 빈곤에 허덕이다 이주해 온 (영어를 할 줄 모르고 교육수준도 낮은) 저임금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는 사태와 맞물려 상대적으로 교통이 편하고 당시에 항구와 인접해 있던 이 겔랑에 특이한 문화가 형성된 결과를 나은 것이다.

중국에서 또는 근접한 동남아 국가에서 더 나은 삶을 위해 싱가포르로 이주해 정착한 그네들의 어머니, 딸 그리고 심지어는 어린 남자아이까지도 낮은 교육수준으로 인해 할 수 있는 일은 분명 한정되었을 것이다.

사진 5. 겔랑의 상징물 샵하우스

사진 5. 겔랑의 상징물 샵하우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알고 난 후 접하게 되는 겔랑의 모습은 애처롭고 한 편으로는 따뜻하기 그지 없다.  생계를 위해 몸을 팔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과 각종 기반 시설을 건축하러 온 노동자들 그리고 외국인 이민자들이 뒤섞여 정착하며 나름대로의 사회적 커뮤니티를 만들어 서로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도움을 주기에도 여념이 없었던 100여년 전 당시의 모습은 겔랑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샵하우스라는 건축물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당시 겔랑에는 말레이계 화교들이 많았는데 그 화교들의 출신지도 각각 다양했다.

특히나 같은 지역 출신의 화교들은 모임을 만들어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도움을 주고 받곤 했는데 그들이 소위 모임의 “지부” 또는 “본부” 로 사용했던 건물들이 현재까지도 남아서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는 샵하우스들이다.

 

사진 5. 겔랑의 상징물 샵하우스

사진 5. 겔랑의 상징물 샵하우스

사진 6. 겔랑의 상징물 샵하우스

사진 6. 겔랑의 상징물 샵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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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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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Chl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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