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높은 차원의 럭셔리를 계속해서 추구하다보면 종국엔 이곳에 닿지 않을까요.
물질적 부와 풍요로움을 지나, 완벽한 정신적인 자유로움을 선물하는 곳.
영혼이 ‘반짝’하고 깨어나는 이 미지의 섬에 일주일간 숨었습니다.
필리핀 7,107개 섬 중 최북단 10개의 섬을 품은 바타네스. 천혜의 자연을 자랑해 ‘세상의 끝’이라고도 불리며, 필리핀 사람들이 가장 가 보고 싶어하는 여행지이기도 하다. 호기심을 가득 안고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섬에 가기 위해 마닐라에서 국내선을 탑승했다. 작은 비행기가 떠오르더니 한 시간 반, 끝없이 펼쳐지던 짙푸른 바다가 에메랄드빛으로 변할 무렵 바타네스에서 가장 큰 섬인 바탄 섬에 내렸다. 바타네스의 10개 섬 중에 사람이 사는 섬은 단 3개. 공항이 있는 이 곳 바탄 섬과 잇바얏 섬, 삽탕 섬이다. 이 세 섬의 사람들은 다른 필리피노와 달리 ‘이바탄’이라고 불린다. 바타네스의 특이했던 역사적 환경적 조건에 영향을 받아 이들만의 문화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바탄들은 따갈로그어, 영어도 함께 사용하지만 93.9%가 이들의 언어인 이바탄어를 사용 하고, 현재까지 산호, 석회암으로 전통 가옥을 짓고 살며 그들만의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선택 받은 사람들의 땅
바타네스에는 약 17,000명의 이바탄들이 거주한다. 이들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그들만의 전통, 서로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깊이 뿌리내린 바타네스란 아름다운 곳에서 느슨하고 평화로운 삶을 꾸리고 있었던 사람들… ‘어쩌면 이토록 하나같이 이곳의 흐름에 거스르지 않고 욕심 없이 세상을 조용하게 살 수 있을까’라는 경외심과 함께 궁금증이 차 오를 때 즈음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바타네스는 순수 이바탄만이 거주할 수 있도록 법으로 보호하고 있는 곳이라는 것. 외부인은 이곳의 주민이 될 수도, 땅을 사거나 비즈니스 허가를 받을 수도 없다. 외부인이 이곳에 살 수 있는 경우는 오직 이바탄과 결혼을 했을 때 뿐이다. 필리핀 정부에서 이바탄들의 순수한 삶의 방식과 훼손되지 않은 자연을 지키기 위해 특별한 제약을 둔 것이다. 이 땅에 대한 두터운 신뢰와 존경이 있는 이바탄들만이 모여 있기 때문에 바타네스의 자연은 훼손되지 않은 태초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품고 있다. 굽이굽이 드넓은 초원 언덕에는 방목된 동물들이 유유히 풀을 뜯고 있고, 시선을 조금 멀리 가져가면 파란 태평양이 펼쳐진다. 시야 어디에도 눈에 걸리는 인공물은 없다. 바타네스에 우뚝 솟은 것이라곤 휴화산인 이라야 산 뿐이다. 일년 중 대부분 산 정상이 구름을 가득 머금고 있어 비현실적인 신비로운 자태를 뽐내는 이라야 산은 바타네스의 아름다운 풍경에 정점을 찍는다. 이곳 사람들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이런 풍경을 즐길 수 있다니 살짝 질투가 나다가 곧 왜 이곳 사람들이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는지 깨닫게 된다.
바람이 시작되는 곳
바타네스의 또 다른 이름은 ‘태풍의 섬’이다. 태풍이 만들어지고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후는 이바탄들의 생활 양식에 영향을 미친다. 잦은 태풍으로 조업을 나가지 못할 때를 대비해 생선을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보관법이 발달했다. 지붕 끝이나 벽에 생선을 매달아 해풍에 말려 보관하는 방법이다. 먼 바다에 못 나갈 때를 대비해 해안가에서 커다란 그물을 들고 바로 달려 나가 고기를 잡는 독특한 어업 형태도 만들어 졌다. 또 태풍에 강한 고구마, 생강, 강황, 마늘 등의 뿌리작물을 재배하고 주로 먹는다. 강한 바람에 견딜 수 있도록 집의 돌 벽은 10cm 이상 두께로 짓고,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지하실도 갖추고 있다. 하지만 태풍이 이바탄들에게 준 가장 큰 영향은 ‘욕심 없는 마음’ 일 것이다. 사람들은 자연이 주는 것, 자연이 가져가는 것에 순응하고 감사한다. 이바탄들의 집 안을 둘러보면 최소한의 물건만을 갖추고 있는데, 이것이 물욕에 집착하지 않는 그들의 삶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강력한 태풍이 많은 것을 무너뜨린 뒤에도 두려움이나 당황하는 모습은 없다. 그저 자신이 할 일을 하며 서서히 망가진 것들을 고쳐갈 뿐이다. 혹자는 태풍이 지나간 뒤의 이러한 이색적인 평화로움과 초연함을 느끼고 싶어 일부러 이곳을 찾기도 하고, 태풍을 만나기 위해 오래 머물기도 한단다.
스스로 삶을 일구는 사람들
바타네스에서 몇 일 간 머물다 보니 이 집에서 전날 봤 던 비슷한 느낌의 가구들을 어떤 집에서 보고, 길을 걷다 본 적 있는 문이나 문고리를 다른 곳에서 또 마주하게 된다. 처음엔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건으로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사람들이 직접 만드는 것이란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바탄들은 자급자족을 했다. 섬 안의 웬만한 물건들은 여기서 나고 자랐다면 직접 만들 수 있다. 여러 번 마주쳤던 몇 가지 물건들의 정체는 중,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에서 배우는 기술로 탄생한 물건들이었다. 지금은 도시의 공장제품들도 섬에 들어오고는 있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필요한 것을 직접 만들거나 이웃과 노동을 품앗이하거나, 서로 나누고 바꿔 사용하는 것에 익숙하다. 열 살 즈음 되어 보이는 아이가 나무를 뚝딱뚝딱 가지고 놀더니 1시간만에 자신만한 책상을 완성하는 장면이나 집이나 마을 시설물을 공동으로 힘을 모아 짓고 있는 모습들은 다분히 인상적이었다.
고요한 세상 끝의 성당
바타네스 곳곳에는 작고 성스러운 성당들이 자리하고 있다. 400년 동안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던 영향으로 로만 카톨릭 인구가 95% 이상이고, 성당은 이들의 삶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 바타네스 성당의 건축 양식을 보면 바타네스의 전통 가옥과 유럽의 건축양식이 절묘하게 섞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독특한 건축 양식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걸음을 멈추고 종교에 상관없이 한 번쯤 성당 안에 들어가 시간을 보낼 것을 권하고 싶다.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섬에서 하늘을 향하고 있는 소박한 성당들은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잡념을 내려놓은 채 고요한 마음을 즐기기에 최적의 장소이자 특별한 위로를 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집 밥처럼 입에 붙는 이바탄 음식들
바타네스의 전통 가정식은 푸짐한 한 상 차림이다. 수북한 밥, 고기나 생선이 들어가는 수프 시니강, 필리핀식 갈비찜 아도보, 생선 요리, 채소 볶음 등 우리네 밥상과 구성도 조리 방식도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식사를 마치면 등장하는 디저트로는 고구마 튀김인 카모테큐 Kamote Cue , 쌀로 만든 디저트 비빙카 Bibingka 가 등장하곤 하는데, 이들은 우리의 맛탕과 약밥이 떠오를 정도로 맛도 모양도 비슷하다. 바타네스에 있는 동안 음식 때문에 고생 한 기억이 없다. 비슷비슷한 밥과 국, 반찬들을 여러 번 먹었지만 집 밥처럼 질리지 않았다. 이국적 음식의 묘미도 꽤 있다. 강황 가루를 넣고 찐 노란 밥, 코코넛즙으로 낸 단 맛, 처음 접해보는 채소들의 오묘한 식감은 오감을자극한다. 매 끼 식도락의 즐거움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삽탕에서의 하루도 추천한다. 잇바얏 까지는 필자도 이번에는 가보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을 언제나처럼 next time 으로 위로해 본다. 언제나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언젠가 한 번은 다시 오고 싶어지는 곳, 이 곳은 그때도 변하지 않고 지금 모습 그대로 남아있을것만 같은 확신이 든다.
Editor Hye Won 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