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와인과 각종 주류, 관련 기사를 검색하세요.

Pacific Crest Trail Hiking 2018_04 – 곰이 나오는 산을 지나서

Pacific Crest Trail Hiking 2018_04 – 곰이 나오는 산을 지나서

선경 고 2018년 7월 4일

아이딜 와일드(288.7km)~빅 베어 레이크(428.3km)

4/11 수
일단 마음을 비우고 나니 모든 게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오래전 화wo구간이라 하더라도 PCTA에서 폐쇄한 데는 이유가 있을 터, 이것저것 다 욕심부리다간 몸이 남아나지 않는 장거리 하이킹이 아니던가. 엊그제 우체국 앞에서 주저앉아 있던 우리에게 전화번호를 주며 트레일까지 무료로 태워다 주겠다던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고 짐 정리를 마친 후 체크아웃을 했다. 일행이 마저 짐 정리를 하는 동안 오랜만에 만난 라 스트라다 아저씨와 짧은 작별인사를 하고 우회 구간의 시작점으로 출발을 했다. 마을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좋지만 필요 이상이 되니 왠지 죄책감 같은 것이 들며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있는, 혹은 불편한 자리에 앉아있는 느낌이랄까? 그런 마음이 들었는데 출발을 하려니 홀가분하다.

우회 구간은 마을 뒤편의 데빌 슬라이드 트레일(Devils Slide Trail)에서 시작해서 San Jacinto 산 정상으로 우회하거나 그 바로 아래에서 PCT와 합류하는 길을 따라가면 된다. 북한산 인수봉처럼 돌로 된 봉우리가 하나 거대하게 자리하고 있었는데 암벽등반으로 인기가 있는 만큼 사고가 잦아 ‘데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우리를 데려다주는 아저씨가 알려준다.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산행을 시작하는데 초반에 길을 잘못 들어 당황했다. 트레일인 줄 알고 가고 있었는데 그냥 산길이었던 거다. 처음엔 분명 트레일이었는데 어디서 길을 잃은 거지? 이때 이미 일행은 사라지고 난 다음으로 이후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한참을 헤매다 겨우 길을 찾아서 산 정상을 향해 가는데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 이게 뭐라고.

이틀 쉬고 오르막을 걷는데 바람이 엄청나다. 몸이 밀릴 정도에 바닥도 돌투성이라 걸음이 조심스러워 넘어지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바닥이 쏟으며 걷고 있는데 멀리서 ‘쿠아아앙~’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조금 전 떠나온 마을, 아이딜 와일드의 한 가운데 세워져 있던 마을 상징-곰, 마운틴 라이온, 독수리가 한데 어우러진 동상-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마을의 상징이 될 정도이니 종종 눈에 띈다는 얘기겠지? 그렇다면 곰이나 마운틴 라이온이 있다는 이야기일까? 사방을 둘러보며 나무 뒤에 있을지도 모르는 그 ‘동물’을 찾아 눈 동그랗게 뜨고 제 자리에서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안 보이는 걸까, 있는데도 내가 보지 못하고 있는 걸까? 되돌아 가야 하나?? 누군가 와서 서로 의지가 되진 않을까? 최대한 크게 뜬 눈 만큼이나 귀도 쫑긋 세워서 작은 소리라도 들으려고 숨소리를 죽였다. 한 번 더 그 소리가 들린다면 정체라도 짐작할 수 있을 텐데 기다려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때 저 멀리 트레일이 꺾어지는 부분에 있는 검은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크진 않지만 시커먼 그림자가 마치 곰이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치며 시선을 고정한 채 숨 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는데 한참을 바라보아도 움직임이 없다. 어쩌지? 이대로 계속 가도 될까? 그렇게 고민하며 기다려봐도 움직임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걸어가 보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임이 있으면 당장 뒤돌아 달아날 준비를 온몸으로 한 채.

한데 이상하다. 소리도 더이상 들리지 않고 움직임도 전혀 없다. 조금 더 용기를 가지고 다가가 보니, 웬걸 커다란 나무등걸이 불에 타고 윗부분은 껍질이 벗겨져 누렇게 된 거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한참이나 겁에 질려서 오도 가도 못했다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서 마침 내려오는 등산객에게 물으니 밤에는 곰이나 마운틴 라이온이 목격되니 절대 혼자 산에 머무르지 말란다. 정상의 헛(돌로 만든 오두막 같은 임시 대피소)까지 간다니까 마침 몇몇이 그곳에 머무른다니 다행이라고, 꼭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란다. 갑자기 발걸음이 바빠졌다. 노을이 보고 싶어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려 했는데 거기에 마음까지 보태진 것이다.

멀리서 보면 곰이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나무

한참을 바람과 싸우며 산 정상 헛에 겨우 도착해서 문을 여는데 안 밀린다. 잠긴 건가? 어라? 당기는 건가? 그때 안에서 ‘밀어~~’하는 소리가 들린다. 엉성하게 지어진 건물이라 문 틈새로 찬바람이 들어와서 여기저기 막아놓았던 게다. 안으로 들어가니 몇몇 하이커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데 아는 사람들과 모르는 사람들이 함께 있기에 인사를 나눈다. 밥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금방 도착했는지 옷 갈아입는 두 사람이 있다. 눈에 익은 덴마크 청년이 안쪽에서 밥 먹고 있다가 자리 잡은 다른 사람들 위치를 물어보니 여기저기 알려준다. 마침 그가 밥 먹고 있는 자리가 비어있어 그 자리에서 자겠다 했더니 일어나려고 하길래 일단 먹던 밥 마저먹으라 하고 나도 숨을 좀 돌린다. 찬 바람에 체온이 자꾸 떨어지던 참에 들어와 숨을 돌리긴 했지만 그사이 땀이 식으니 체온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다 먹었으면 나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 잘 자리 펴고 침낭 꺼내놓고 옷 갈아입고 물 끓여서 크노르(독일산 즉석 파스타/쌀 요리 브랜드) 쌀 요리를 준비한다. 코펠에서 바로 끓이지 않고 다른 용기에 옮겨 뜨거운 물은 부은 뒤 다운 재킷 안에 끌어안고 있으니 몸이 조금 따뜻해진다. 식사 후 일몰을 보기 위해 가지고 있는 옷을 죄다 껴입은 데다가 우비 치마까지 둘러 입고 나가서 정상 가는 길을 찾는데 조금 전 헛에서 사라졌던 세 남자가 나타났다. 정상 가는 길을 물으니 일몰 보려는 거면 늦었다며, 정상은 바위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해도 지고 바람도 불어서 위험하다고 말린다. 안 그래도 오늘내일 바람이 거세다고 했지. 게다가 해는 이미 졌다고 해서 헛으로 돌아와 그들이 찍은 영상과 사진을 감상하는데 내가 너무 아쉬워하니까 한 하이커가 앞으로 네다섯 달 동안 볼 많은 일몰이 남았다고 아쉬워하지 말란다. 그러고는 다들 잘 준비를 하는데 맙소사 누가 또 왔다. 이 시간에? 결국 그 사람까지 좁은 헛 안에서 9명이 끼어서 잠을 청한다. 헛 안에 있던 낡은 이불로 문틈을 꼼꼼하게 막아서 찬바람을 최대한 막은 터라 그래도 견딜 만하게 되었다. 거센 바람 소리만은 어쩌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내 그 소리를 이기고 좁은 헛 안에 코 고는 소리가 진동한다.

고산이라 아직도 눈이 남아있다

4/12 목
코 고는 소리와 바람 소리에 뒤척이다 새벽녘에서야 겨우 잠들었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일어나보니 몇몇이 벌써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시간을 보니 6시가 조금 넘었다. 밤새 영하로 내려갔었는지 헛 밖에 있던 작은 물통의 물이 얼어있다. 4월 중순이라지만 3200m의 위엄을 보였다고 할까. 바람의 기세도 줄지 않아 헛 안에서 여유를 즐기려던 계획을 바꿔서 나도 출발 준비를 한다.

밤새 추위와 바람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준 헛(Hut)

눈이 있어서인지 곳곳에 물이 흐르고 있어 정수기로 마실 물을 준비하고 추위에 곱아드는 손을 호호 불어가며 서둘러 산 아래로 내려왔다. 바람이 어찌나 거센지 계속 움직이고 있는데도 체온이 올라가지 않는다. 1000m 정도를 내려와서야 바람도 잦아들고 몸에 열기가 살짝 도니 조금 살 것 같다. 그제서야 나무들이 뿜어내는 달달한 향내와 얼굴보다 큼지막한 솔방울이 눈에 들어온다. 손에 들고 있으니 꼭 커다란 핫도그를 들고 있는 모양새다.

얼굴보다 긴 솔방울을 들고 있으니 마치 핫도그 같다

오늘은 산행을 조금만 하고 여유를 가지며 ‘우회’라는 상황에 닥쳐서 복잡했던 마음을 다잡을 계획으로 산 중턱에 있는 캠프 사이트를 마음에 두고 하루를 시작했다. 한데 겨우 그 장소에 도착하자 바람이 어찌나 부는지 텐트가 자꾸 바람에 날아가서 한참을 씨름하다 배낭으로 이너 텐트를 눌러서야 겨우 완성했다. 안에 들어앉아 숨을 돌리는데 그곳에 있던 PCTA 사람들이 작업하느라 쳐 두었던 텐트를 정리하고 내려간단다. 물어보니 강풍주의보란다. 맙소사. 이미 시간은 꽤 지나서 조금 뒤면 해가 질 텐데. 하지만 이 사람들, 나더러 내려가라는 소리는 못 하겠단다. 알아서 하라고만 한다. 강풍주의보라서 자기들은 안전하게 하산한다면서 나한테는 마음대로 하라니.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홀로 이곳에서 밤새 바람과 싸우던가 서둘러 내려가는 것, 두 가지 선택사항이 있었고 이곳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다른 이들이 피하는 상황을 굳이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세상 더없이 빠르게 텐트를 정리해서 가방에 대충 쑤셔 넣고 내리막길을 달리기하듯 내려왔다. 혼자서 야간 산행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평소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두시간 가까이 산을 달려 내려와 아래쪽에 자리 잡은 다른 텐트들 한 쪽에 텐트를 치고 물을 받아 텐트 안에 들어앉아서야 마음이 놓인다. 바람은 여전히 거세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안심도 되고. 하지만 다리와 발은 여기저기 쑤시고 기운도 빠져서 결국 간단한 행동식으로 저녁을 때우고 잠들었다.

하루종일 ‘오늘은 여기 가서 일찍 텐트치고 이거랑 저거랑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하루종일 신나 있었는데 날씨 덕에 무산되어 마음이 지치기도 했다. 자연의 무서움을 다시 한번 확인한 날이었다.

4/13 금
San Jacinto 산 정상의 헛에서 함께 머물렀던 하이커들은 아침 일찍 떠났는지 흔적이 없고 샌디에고 트레일엔젤 하우스에서 만났다가 잠시 헤어졌던 부부 하이커,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여자 하이커만 남았다. 그런데 걷는 모습이 이상해 물으니 산을 다 내려와 발목을 다쳐서 친구가 데리러 오기로 했단다. 누군가 돌봐줄 수 있다니 다행이다. 푹 쉬면서 치료 잘하라고 인사를 한 뒤 도로를 따라 걷는데 이내 모래밭 구간에 진입한다. 아스팔트 포장길이 충격흡수가 안 되어 다리에 무리를 준다면 모랫길은 걷는 힘을 너무 많이 흡수해 체력 소모가 심하다. 하이커들이 싫어하는 이유다. 그런데 주변에 PCT 표지가 없다. 설마 저렇게 많은 교통량이 있는 도로를 건너라고 할 것 같지는 않아서 다리 교각 밑을 지나가는데 웬걸, 하이커 부부가 쉬고 있는데, 트레일 매직이다! 스낵과 시원한 음료도 있길래 콜라랑 사과 한 개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그렇게 기운을 얻어 한참을 걷다 보니 주변에 길 안내 어플이 들렀다 갈 포인트로 추천하는 곳이 있다. 페이스 흐트러질 까 싶어 그냥 갈까 하다가 마침 그쪽에서 모습이 보인 하이커 아줌마를 발견, 가까이 가보니 윈드팜 이라는 풍력발전 관리하는 곳에서 그늘 만들어두고 물도 가져다 두어 하이커들이 쉴 공간을 마련해 두었다. 배낭을 내려놓고 쉬면서 점심으로 부리또랑 물 500ml를 하나 다 먹었다. 시원하긴 한데 바람이 많이 불어 땀이 식으니 금방 추워진다.

오늘은 두번이나 트레일 매직을 만났다. 시원한 콜라와 그늘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다

오늘은 사이드 포인트가 많은데 Whitewater Preserve도 그중 한 곳이다. 주변 풍광이 멋지고 잔디밭에서 무료로 캠핑할 수 있으며 깨끗한 화장실에 물도 받을 수 있고 야외 웅덩이 풀장도 있다. 피크닉 테이블도 있어서 식사하기 편하다. 하이커 부부는 텐트를 치고 하이킹할 때 입은 옷을 그대로 입고 풀장으로 향한다. 세탁 겸 수영복이라나. 나더러 같이 쉬자고 하지만 아무래도 여기서 멈추기는 너무 이르다 싶어서 저녁 할 물만 더 준비해서 출발한다.

오래된 나무에 박힌 오래된 안내판

언덕 하나를 넘어가다 보니 길가에 나무들 사이로 아늑한 공간이 있다. 거기에 텐트를 치기로 하고 배낭을 내렸다. 어제, 그제 이틀 사이 바람에 너무 시달렸더니 오늘만큼은 바람 없는 조용한 밤을 보내고 싶었는데 마침 딱 맞는 공간을 발견한 거다. 시간이 이르긴 하지만 어제 갖고 싶었던 여유를 오늘에서야 겨우 갖게 됐다. 텐트 치고 한숨 돌리고 아껴뒀던 신라면에 즉석 육개장을 따로 만들어 저녁으로 해 먹으니 아~ 이 얼큰함에 속부터 기운이 나는 것 같다. 해가 지기 전에 앉아서 저녁 먹고 일기도 쓰고 앞으로의 일정도 점검 해 보고 새 소리도 들으니 힐링이 따로 없다.

나한테는 이런 여유가 필요했다. 물론 무섭기는 하다. 코요테가 나온다는 소리도 있고 마운틴 라이온은 언제 어떻게 활동하는지도 모르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하지만 늘 누군가의 주변에 텐트를 칠 수는 없는 노릇, 이제 비로소 제대로 혼자가 된 거다. 바람 소리 하나 없는 밤이지만 무서움보다는 진짜 트레일을 시작한 느낌이라 편안함이 더 크다. 다만 밤새 안녕하기를 바랄 뿐.

4/14 토
밤새 아픈 다리 때문에 뒤척이다 언제 잠들었는지 새 소리에 깼다. 유난히 아침 새 소리가 크다 싶었는데 텐트 앞쪽의 나무에 새 둥지가 두 개나 있다! 이곳이 마음이 든 건 나뿐이 아니었나보다. 둥지 안을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그러면 어미 새가 스트레스 받아서 새끼들이나 알에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니 멀찌감치서 사진만 한 장만 남기고 텐트를 정리해 출발한다.

오늘도 10시가 가까워지자 여지없이 더워지고 잠깐 쉬는 동안의 바람이 꿀맛 같다. 오늘 걷는 구간에는 또 다른 화재 폐쇄구간이 있다. 길을 갈 수는 있으나 트레일에서 벗어나서 텐트 치는 것은 안된다고 되어있다. ‘가다 지치면 치는거지,뭐’라고 생각했는데 걷다보니 그 이유를 알게됐다. 나무들이 불에 타서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상황에 트레일 주변만 정리 해 두었다. 그 이후에 쓰러진 나무들도 있어서 마치 정글짐처럼 배낭을 멘 채 나무를 타고 넘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길가의 돌이며 나무며 모두다 검게 그을린 곳도 있다. 걷다가 나무가 쓰러진들, 자다가 텐트를 나무가 덮친들 어쩔수가 없는 구간인 거다. 그래서 오늘은 텐트를 트레일이 비포장도로와 만나는 곳 옆의 큰 나무 아래에 쳤다.

흐르는 물을 받아 정수해서 식수로 사용한다

마지막 물 공급지에서 다음 물 공급지까지 30km가 넘어 6L의 물을 지고 언덕을 넘느라 허리가 다 아프다. 여기 친구들은 스낵이나 크래커로 끼니를 해결하기도 하는데 나는 저녁은 꼭 한식으로 하고 있어 늘 저녁용 물이 더 필요하니 그 무게가 만만치 않다. 그래도 어제 하루 일찍 쉰 덕에 몸과 마음에 여유가 좀 도는 것 같다.

오늘 걸은 화재 구간은 길이 엉망이 되어서 찾기 모호한 부분도 있고, 나무들이 길 위에 그대로 쓰러져 있어서 타고넘어 가야 하기도 했다. 길도 많이 유실돼서 위험하기도 했다. 이래서 폐쇄하는구나 이해가 간달까. 꽤 큰 CS가 몇군데 있었는데 불에 탄 그대로라 음침하기까지 했다. 오전에 걸었던 진흙탕 길과는 또 다른 의미로 걷기가 힘든 길이었다.

넘어진 나무를 타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 잦았던 화재 구간

4/15 일요일
여전히 밤은 춥고 그런 날 아침에 일어나서 챙기는 건 너무 고되다. 고도가 높아서인지 지난 밤에도 너무 추워서 제대로 못 잤다. 아침에 지나가다 만난 하이커랑 인사하며 물어보니 그녀도 밤에 추워서 잘 못 잤단다. 사막인데 왜 이렇게 추운 거냐며 화를 내봐도 고도가 높은 이상 어쩔 수 없다. 걸음을 빨리해서 고도를 내리는 수밖에.

하루 중 대부분을 눈 잔뜩 덮인 산을 가운데 두고 뱅글뱅글 돌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시야에서 그 산이 사라졌다. 저 산의 눈은 언제쯤 녹는 걸까?? 우리가 저 길을 가지 않아 다행인 건 만약 지금 저 눈길을 지나야 했다면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절 장비를 다 준비해야 했을 테니 지금보다 더 힘들었겠지.

이상하게 오늘은 발걸음이 무거운 날이었다. 길은 좋았는데 어찌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던지. 그래도 그동안 걸은 것들이 몸에 배었는지 시간당 3.2~3.3km씩 걷고 있다. 오늘은 최대한 갈 수 있는 곳까지 가서 자고 내일 일찍 마을에 들어가야지, 싶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35km나 걸었다. 길이 좋으니까 장거리가 되는구나. 그러고 보니 어제도 분명 오르막길이 많은 날이었는데 30km는 걸었었다. 스위치백이 많으니까 짐만 안 무거우면 하루 10~11시간 걸어서 30km 이상이 가능한 것 같다. 잘 기억해 뒀다가 앞으로 이동 일정 짤 때 참고 해야겠다.
같이 걷던 하이커가 자기는 이미 마을에 도착했다며 숙소 좋다고 그쪽으로 오란다. 그런데 전화를 했더니 만실이라 자리가 없다고 한다. 어떤 하이커들은 숙소를 예약하고 마을로 들어가기도 하지만 나는 아직은 내 하이킹 컨디션을 모르니 어떻게 숙소 예약을 하겠나. 어쩔 수 없이 내일 일찍 마을로 들어가 알아볼 수밖에. 산에서나 마을에서나 잘 곳 걱정이 늘 크다.

그리고 결국 오늘 신고 있던 양말 네개가 다 뒤꿈치에 구멍이 났다. 어제까지 그래도 한 켤레는 그럭저럭 견딜 만 해서 양말 안쪽에 발뒤꿈치만 테이핑을 하고 걸었는데 오늘은 모래가 많은 지역이라 그런지 자꾸 먼지가 발에 들어차서 결국 발가락 상태가 예민해졌다. 군데군데 껍질이 벗겨지고 물집이 잡힐 것 같다. 하긴, 오늘까지 422.4km를 걸었으니 구멍이 날 만도 하다.

그나저나 일기예보 확인했을 때 강풍은 내일부터였는데 하늘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마치 칼부림인 것처럼 엄청나다. 다행히 길옆 나무 바로 아래에 텐트를 쳤고 아직까지 하늘의 강풍 소리는 들리지만 바람은 세게 불지 않는다. 주변 나무들이 잘 막아주고 있는 듯하다. 제발 밤새 조용히 잘 수 있게 해 주세요.

4/16 월요일
어제 많이 온 게 도움이 돼서 도로에 도착하니 8시 30분쯤이다. 이른 시간이고 평일이라 세워 줄 차가 있을지 모르겠다. 몇 번의 히치 시도 만에 기아차를 모는 토마스라는 청년이 나를 지나쳤다가 저만큼 가서 차를 세워준다.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Big bear lake로 가는데 가능한지를 물었다. 아니면 다른 차를 기다리겠다고. 자신이 갈 목적지를 보여주는데 마을과 마을 사이라 조금 애매한 위치다. 거기서 히치가 잘 될지 안 될지 몰라서 그럼 다른 차를 기다리겠다니까 가는 데까지 데려다주겠단다.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마을에 도착했다. 그런데 막상 와서 길을 헷갈려서 위치를 못 찾는다. 자꾸 돌고 돌아 헤매길래 근처인 것 같으니 사거리 가게 주차장에 내려주면 내가 걸어서 찾아가겠다며 차에서 내렸다.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몇 번을 얘기 했는지… 원래 가야 하는 길 보다 훨씬 더 왔는데도 끝까지 나를 목적지에 내려주려고 빙빙 돌기까지… 그래서 가방을 내려놓고 스틱을 집어 들면서 조금이라도 사례 하고 싶다니까 됐단다. 아니, 시간 너무 썼고 원래 가야 할 거리보다도 멀리 오지 않았느냐고 해도 괜찮단다. 그래서 결국 인사만 하고 가버렸다.

배낭을 잘 고쳐 메고 혹시 몰라 어제 통화했던 빅베어 호스텔에 다시 전화 해 봤더니 혼성 도미토리 룸은 자리가 있단다. 예약되는지 물으니 예약 시스템은 없고 퍼스트 컴 퍼스트 인.이라며 빨리 오란다. 호스텔은 깨끗하고 샤워 타월도 주고, 샤워 용품에 드라이기도 있으며 주방도 사용 가능했다. 하이커 친구에게 연락하니 밥 먹으러 나갔는데 쇼핑하고 돌아올 거란다. 그동안 샤워하고 몸살 기운이 살짝 있어 따뜻하게 입고 그동안 입고 있던 옷을 세탁했다. 세탁과 건조도 무료라니… 가난한 장거리 하이커에게 너무 천국 같은 곳이다. 세탁할 동안 입고 있을 옷도 빌려준다. 며칠만에 하는 샤워라 구정물이 줄줄 흐른다. 우리를 하이커 트래쉬라고 부르는 이유 중 하나다. 더럽고 냄새난다고.

오늘은 두번이나 트레일 매직을 만났다. 시원한 콜라와 그늘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다

같은 방에 묵고 있는 하이커 아저씨가 자기의 재공급 박스를 보고 있다. 나도 세탁이 다 끝난 뒤 옷을 정리하고 짐을 찾으러 갔다. 두 개의 박스 중 하나는 다른 도시로 보내고 다른 하나는 숙소로 가지고 돌아왔다. 미국 우체국은 Priority mail로 보낼 경우 오픈하지 않은 우편물을 무료로 1회 재발송 해 준다. 소포 보관 기간이 최대 30일이니 나처럼 현지에서 날짜에 맞춰 우편물을 보내줄 사람이 없는 경우 이 방법으로 장비와 식량들을 관리해서 받는다. 오늘 받은 박스에는 한국에서 신던 신발이 들어있다. PCT 시작부터 신었던 신발은 가볍고 매쉬도 좋아 발에 무리 없이 잘 신고 있었지만 걷는 거리가 늘어날수록 발목과 무릎에 전달되는 충격 흡수 능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 쿠션이 좋은 신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시기가 잘 맞았다. 다만 매일 걷다시피 하니 발이며 다리가 늘 부어있어서 사이즈가 잘 맞을지 걱정이다. 숙소 돌아와서 박스 안 짐 정리를 하고 신발을 신어봤는데 역시, 예상대로 딱 맞는다. 여유가 없다. 이게 산에서 통할까? 일단 한쪽만 신고 돌아다녀 봤는데 같은 방 에릭이 보고 웃는다. 인솔 바꿔서 신어보니 걸을 만은 한데 일단 오늘내일 마을에서 신고 다녀봐야겠다.

빅베어는 이웃한 두 마을이 있는데 Big bear city와 Big bear lake다. 빅 베어 레이크가 조금 더 큰 마을인데 아까 히치 한 차 타고 오면서 보니 옆 마을 빅 베어 시티의 호수는 물이 완전히 말라서 온통 흙이라 그냥 원래 맨땅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이 마을로 오니 호수에 물이 좀 남아있다. 옆 마을은 자연 호수이고 이 마을의 호수는 인공이라고 했는데 자연의 힘만큼 인간의 힘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4/17 화
양말이 필요해서 아웃도어 샵에 갔는데 종합매장 같은 곳이라 우리 같은 장거리 하이커들에게 필요한 용품이 별로 없다. 일단 둘러보고 Kmart와 Vons에 가서 재공급할 식량과 양말을 둘러봤지만 역시나 양말은 좋은 제품을 찾을 수가 없다. 결국 식량 구매 후 아웃도어 샵에서 괜찮아 보이는 양말 두 켤레를 골라 숙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마을 뒤편을 보니 스키장이 어마어마하다. 이 동네 원래 스키랑 스노보드, 낚시로 유명한 레져 관광도시구나. 어쩐지 큰길 따라 왜 이렇게 숙소와 스키/보드 삽들이 많나 했다.

마을 뒤편에 자리 잡은 스키장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얼굴이 익은 하이커들을 꽤 만나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 보면 하이커들은 참 잘 걸어 다니는 것 같다. 나야 신발 테스트도 할 겸 동네 구경도 할 겸 원래 여행 가면 큰길 말고도 골목골목 잘 걸어 돌아다니는 성격이라고 하지만 다른 하이커들은 산에서 그렇게 걷고도 마트며 우체국을 잘도 걸어 다닌다. 숙소 와서 점심 먹으면서 새로 산 양말을 신고 신발 끈을 이렇게 저렇게 메어보고, 움직여본다. 내 발은 발등이 살짝 높은 편이라 신발 끈을 맬 때 그 부분 구멍을 하나 건너뛰고 메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마을 구경하다 들어간 와인샵에서 발견한 재밌는 소품

오후에는 내일 트레일로 돌아가는 픽업 얘기를 나누고, 어제저녁에 왔다는 하이커들이랑 거실에서 얘기도 좀 하고, 방에와서 짐 정리 좀 하고, 샤워한 다음 저녁을 먹으며 다른 하이커들과 수다를 떤다. 이런 것들이 4~5일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오면 하는 주 일과들이다. 도착하자마자 샤워하고 세탁, 이후 다음 마을까지 걸을 거리에 맞춰 식량 구매, 짐 정리 그리고 다른 하이커들과 수다떨기.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할 일 없이 빈둥대는 것 같지만 15~22kg의 배낭을 메고 하루종일 산을 걷는 일은 생각보다 에너지가 많이 소비된다. 그렇기에 몸도 충분히 쉬어주고 산에서는 먹지 못하는 음식들로 에너지도 채워주는 시간인 거다. 수다는 정보 교환도 하게 해주어 꽤 요긴하다.

어제, 오늘 페이스북을 통해 한국인 하이커 한분의 사고 소식을 전해 듣고 우울해졌다. 건강하게 가족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다!

 

Tags:
선경 고

여행하는 소믈리에

  • 1

You Might also Like

Leave a Comment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