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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cific Crest Trail Hiking 2018_03 – 불이 나서 돌아가야 한대!

Pacific Crest Trail Hiking 2018_03 – 불이 나서 돌아가야 한대!

선경 고 2018년 6월 19일

Stagecoach RV Park(122.8km) /Jullian~Warner Springs Resource Center(176.3km)~Idyllwild

히치 하이킹을 하기 위해 도로가에 서자 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지나가던 차가 멈춰서서 마을로 들어가는지 묻는다. 고맙긴 하지만 우리가 갈 RV Park와는 반대 방향이라 그리 설명하니 어차피 집이 근처라 상관없다며 태워준단다. 그렇게 운이 좋게 RV Park 도착.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가게가 닫혀있다. 어떻게 된 일인 거지? 어리둥절해서 가게 앞으로 가 보니 영업시간이 5시 까지란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5:15분. 몇 분 차이로 맛있는 음식도 샤워도 세탁도 다 물 건너 가 버렸다. 주변엔 아무도 없어 고요하고 알 듯 말 듯 희미한 조명의 자판기만 덩그러니 서 있다. 모두가 실망 가득한 맘으로 잠시 멍하니 있다가 어찌할까 의견을 나눈다. 그중 두 사람이 잠시 둘러보러 갔다 오더니 세탁은 어디에서 해야 할지 알 수 없고 수영이랑 화장실, 샤워는 가능한 것 같다고 해서 그냥 여기서 하루 쉬기로 하고 텐트 사이트를 찾아갔다. 관리인은 없지만, 지도에 PCT Hiker를 위한 자리가 표시되어 있고, 그 아래 이용요금을 넣는 돈 통이 있다. 안내 책자에는 프리 와이파이도 있다고 했지만 관리하는 사람이 없으니 비밀번호를 알 수가 있나, 거기에 더해 통신사 전파도 잡히지 않아 날씨조차 알 수 없게 됐다.

일단 텐트 피칭하는 사이 화장실에 갔던 한 하이커가 샤워장에 따뜻한 물이 나온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기대도 안 했는데 따뜻한 물에 샤워라니. 수영장 물이 너무 차가워 수영은 패스했지만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나와서 옷을 갈아입으니 온몸이 개운하고 가볍다. 그 사이 파크 트레일러에 있는 부부가 먹을 걸 좀 가져다준다 했다니 저녁은 그들이 준 스튜와 빵으로 대신하고 다 먹은 그릇을 다른 두 사람이 나서서 설거지를 하러 간다. 고마운 마음에 더해 한국인 정서상 빈 그릇으로 보내긴 미안해서 매쉬 포테이토라도 담아 줄까 했지만 하이커만 먹는 거라며 그냥 두란다.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이런 문화에도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4/4 수요일
오늘은 Jullian에서 제로 데이를 갖기로 한 날이다. Zero day란 하이킹을 하지 않고 하루 쉬면서 체력적인 재충전도 하고, 다음 마을까지 갈 식량을 구입하는 시간을 갖는 날이다. 오늘 하이킹을 안 한다는 생각에 늦잠을 잤는데도 6:45분이다. 다들 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 어떤 아저씨가 차를 끌고 나타났다. 트레일까지 태워다 주겠다신다. 우린 줄리안으로 간다니까 그러면 거기까지 태워다 주겠단다. 가만히 앉아서 히치하이킹을 성공하다니, 말이 안 된다. 다들 서둘러 짐과 텐트를 정리하고 그 차 타고 줄리안으로 이동, 마을에 도착하자 슈퍼는 여기다, 우체국은 여기고 하며 여기저기 안내 해 주시고 트레일 앤젤 집에 내려주신다. 기름값을 받자면 한두 푼이 아니니 넣어 두란다.

직접 찾아와 우리를 태워주신 분

LA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문득, 많은 사람들이 같은 비행기에 앉아 같은 목적지로 가고 있지만, 그 목적은 각기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울컥하는 내 마음과 달리 즐겁고 흥분되는 사람들도 있겠지. 이 비행기 안의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방식이나 목적이 다들 다를 테니 삶에서야말로 그 목적도, 거기서 얻는 것도 제 각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친절을 베푸는 이들의 마음은 기름값 몇 푼으로는 가치를 잴 수 없는 것일 거다.

일찍 마을에 도착한 덕에 같이 다니던 하이커들과 쉐어해서 숙소를 잡은 뒤, 세탁도 하고 우체국에서 소포 박스를 찾아 짐 정리도 하고 트레일 앤젤 하우스에서 점심도 먹고 마켓에 가서 필요한 식량을 구입하기도 하는 등 각자 시간을 보낸 뒤 저녁에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서 피자와 맥주도 한잔하며 수다를 떤 뒤 숙소로 돌아왔다. 트레일 앤젤 하우스에는 많은 하이커들이 무료로 머물고 있었는데 그만큼 시끌벅적함과 아침 일찍 출발하는 하이커들의 부산스러움은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우리는 쉐어를 한 덕분에 샤워와 화장실이 편한 침대방의 편안함을 누릴 수 있었다. 나는 소포로 보낸 상자를 우체국에서 찾아와 배낭의 물건과 함께 전부 꺼내놓고 필요 없을 것 같은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배낭의 무게를 줄여야 걷는 길이 편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날, 숙소에서 제공하는 아침을 먹고 출발 준비를 하는데 어제 태워다줬던 아저씨가 다시 와서 트레일 헤드까지 태워다 준다고 기다리고 있단다. 이런 믿을 수 없는 친절이 계속 일어나도 되는 걸까? 결국 그분 덕분에 길 위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트레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시 돌아온 트레일은 풍경으로 따지자면 계속 사막인데 위험 구간이 많아졌다. 길의 폭이 30cm도 채 안 되는 구간이 잦아졌는데 오늘은 바람도 강해서 무거운 배낭을 메고도 몸이 밀릴 정도다. 산 아래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 그나마 다행이랄까. 반대 방향이었다면 걷는 내내 긴장해야 했을 테니까. 텐트 안에 있는 지금도 바람 소리가 엄청나다. 며칠 전 밤을 보낼 때 밤새 추위에 떨었던 선라이즈 트레일 헤드와 맞먹을 정도의 바람과 한기가 느껴진다. 그래서 아예 에어매트도 준비하고 화장실도 미리 다녀왔다. 추운 날 밤에 화장실을 가야 하면 정말 가기가 싫어진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사태인 만큼 오늘처럼 추운 날에는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

너비 30cm 정도의 길을 계속 걸어간다

함께 다니던 여자 하이커는 같은 나라 청년 두 명이랑 같이 오더니 오늘의 캠프 사이트에는 오지 못했다. 같은 나라 사람 만나 말도 통하고 더군다나 또래이니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 캠프 사이트엔 나를 포함해 중간의 물 포인트에서 만난 총 여섯 명의 하이커가 있다. 각자 저녁을 먹으면서 수다를 떠는데 주 내용은 서로에 대해 물어보고 너 지금 저녁 뭐 먹냐, 노을이 너무 예쁘다, 하늘이 너무 예쁘다. 저거 한국말로 뭐라고 하냐 등의 내용이다. 그리고 해가 지자 어김없이 각자의 텐트로 돌아간다.

물이 있는 곳임을 알리는 표지판

오늘은 왠지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며 걷게 되는 날이었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들을 그리워도 하고 그들과 지냈던 시간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많았다. 지금 당장 어디서 물을 구하고 잠은 어디서 자야 할지가 중요한 일이었지만 한 번 떠오른 생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고 자꾸만 눈앞이 흐려졌다.

4/6 금요일
큰일 날 뻔했다. 출발할 때 길을 잘 못 찾은 것이다. 같은 곳에서 잔 일행들이 먼저 떠나고 내가 제일 늦게 출발했는데 생각하고 있던 방향과 다른 곳으로 가는 걸 보고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일단 따라갔는데 다행히 중간에 PCT 표식을 발견했다. 어떻게 온 거지? 앞서가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길을 못 찾았을 것이다. 이래서 다들 서로 의지하고 다니는구나. 하지만 결국 페이스가 다르다 보니 하루종일 아무도 못 만나는 하이킹을 했다. 뭐, 첫날 부터 밥 먹는 시간도 쉬는 시간도 내 맘대로 하긴 했지만 물 포인트에서조차 아무도 못 만날 줄이야… 길 안내 어플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아찔하기도 하면서 그럴 때마다 PCT를 안내하는 브라운 스틱(갈색으로 되어 있어서 그렇게 부를 뿐이다)이 보여서 다행히 잘 찾아갈 수 있었다. 다만 지도는 괜히 버린 것 같아 후회됐다. 이렇게 한 번도 같은 길을 걷는 하이커를 못 만날 줄이야…

가끔 이렇게 평지를 걷는 일도 있다

그래도 중간의 유명 포인트라는 Eagle Rock은 놓치지 않고 들렀다. PCT에 가기 전부터 들었던 몇몇 유명 포인트 중 한 곳이었는데 사막 한가운데 놓인 바위가 미국의 상징인 독수리 모양이라 방문객이 꽤 있다는 곳이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도 멀리서 보니 한 무리의 학생들이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가는 것이 보였다.

미국의 상징인 독수리를 닮은 바위

길 안내 어플과 브라운 스틱 덕분에 무사히 워너 스프링스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많은 하이커들이 쉬어 가는 곳인 데다 트레일러로 된 장비점에서 처음 시작하는 하이커들의 가방을 체크 해 주는 것으로 유명해서 구경도 할 겸 텐트를 치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워너 스프링스 리소스 센터 내부에 간이 식료품점이 있어서 식량을 구입할 수도 있는데 나는 이미 충분하니 필요 없었고 다행히 하이커 박스에서 소이어 정수기 전용 파우치 1리터짜리 2개를 구했다. 그 전이 쓰던 것은 입구가 찢어져서 물이 새는 까닭에 버렸는데 이곳에서 구한 것은 사용 해 보니 안 새고 잘 된다. 입구가 맞는 게 따로 있는 건가. Saywer는 휴대용 정수기인데 크기도 작고 가벼워서 장거리 트레킹을 하는 하이커들의 90% 이상이 이 회사의 모델을 사용한다. 흐르는 물이 있는 곳에서 물을 받아 정수해서 마실 물이나 요리용 물로 사용하는 거다. 하이커 박스는 마을마다 하이커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커다란 박스를 두고 지금 당장 본인에게 쓸모없어 괜히 무게만 나가는 것 같은 물건을 넣어두면 누군가 그 물건이 필요한 하이커가 들렀다가 발견하고 가져가 요긴하게 쓸 수 있게 만든 시스템이다. 음식, 양말, 심지어는 신발이나 가방도 있으니 잘만 만나면 아무 준비 없이도 트레일을 시작할 수 있다고 농담까지 할 정도다.

워너 스프링스 리소스 센터에 있는 트레일러 장비점. 작아도 하이커에게 필요한 물품은 모두 갖추고 있었다

오늘은 일찍 도착해서 텐트 치고 스트레칭도 하고 밥도 먹고 쉬었으니 내일은 빨리 준비해서 6시에 출발해야겠다. 첫 물 포인트는 5km 뒤라고 했으니까 물은 일단 2~3L 정도로 시작하면 될 것 같고, 자기 전에 매쉬 포테이토 만들어 놓고 내일 가는 길에 아침으로 먹어야겠다. 다음날 물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와 뭘 먹을지 생각하는 것은 저녁마다 하는 일과다.
그나저나 이곳에는 꽤 여러 명의 하이커들이 있는데 어디를 가나 그렇듯 미국 애들(젊은 애들)과 아닌 사람들로 나뉘어서 그룹 지어지고 거기서도 영어권과 아닌 사람들로 나뉜다. 나는 유일한 동양인인 데다 영어도 잘 못 해서 어울리는 무리가 딱히 없다. 하지만 여기 있는 하이커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무사히 사막 구간을 끝내고 3000m 고봉들이 많은 하이 시에라 구간을 지나 무사히 길의 끝이 설지는 그 누구도 모르니 지금의 어울림에 조급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또한 언제 또 이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 그만큼 지금의 이 수다들이 무의미하지도 않다. 오늘은 해가 진 뒤까지도 수다와 웃음이 이어진다.

4/7 토요일
토요일이다. 사실 트레일 위에 있으면 요일을 신경 안 쓰니까 무슨 요일인지 모르게 된다. 하지만 마을에 들어갔을 때 우체국이 닫았거나 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라도 신경을 쓰고 있어야 했는데 너무 무심했다.

이제까지 같이 오던 하이커들과 뿔뿔이 흩어졌다. 그래서 오늘은 출발부터 혼자다. 맙소사, 출발하자마자 엄청난 상황에 들어섰다. 주변에 소 떼가 풀을 뜯고 있는 거다. 그러다 내가 다가가니 모두 행동을 멈추고 나를 바라본다. 나, 여기로 지나가도 되는 걸까? 갑자기 흥분해서 덤벼들면 어쩌지? 왜 저 소들을 가두는 울타리는 없는 거지? 그러고 보니 그 울타리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나인 것 같기도 하지만, 여긴 트레일이잖아! 뱀과 곰을 쫓겠다고 달아둔 종을 가만히 닫아서 소리 안 나게 하고 조심조심 걸어가기 시작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제발 내 앞으로는 그만 가고 옆으로 비켜서 가주겠니? 라고 간절히 빌면서. 그리고 소 떼의 끝을 벗어나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걸음의 속도를 올렸다. 방울뱀도 아니고 아침부터 소 떼와 신경전을 벌이게 될 줄이야. 진이 다 빠진다.

그렇게 혼자 길로 나오니 신기하게도 혼자 온 사람들이 더 잘 보이고 서로 더 얘기도 잘 나누게 된다. 새로운 길이라고 같이 걷던 하이커들에게 너무 의지했나 보다. 길 위에 선 그들은 늘 같았을 텐데 이제서야 내가 주변을 돌아본 거겠지. 잠깐 쉬기가 무섭게 트레일 매직을 만나 그 땡볕 아래에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내년에 이 길을 걷겠다는 계획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부럽고 대단해 보인단다. 자꾸 이것저것 더 먹으라고 권한다. 심지어 일어나려니까 땀 냄새 진동하는 나를 안아 주기까지 한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지 잊고 있었다. 유난히 그 안아보자는 말 한마디가 마음을 감싸 안는다.

하루종일 고민이다. 아침에 출발 전에 한 하이커가 파이어 클로져(Fire closure-화재로 인해 일부 구간이 통제되는 것)에 대해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게 내일 도착하기 될 유명한 레스토랑인 파라다이스 카페 이후 구간이란다. 우회하는 구간이 있다지만 그 트레일의 상태는 분명 PCT와는 다를 것이다. 고민거리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일단 걸어보면서 만나는 하이커들과 의견을 나눠 볼 수밖에.

환영 인사를 담은 트레일 앤젤 하우스 안내판

그사이 유명한 트레일 앤젤 하우스인 마이크 하우스에 도착했다. 시간만 맞는다면 아침/점심/저녁을 다 먹을 수 있고 맥주와 탄산음료도 있으며 텐트를 칠 수 있는 공간도 제공한다. 나는 온종일 걸어 겨우 도착한 탓에 맥주 하나와 콜라 하나를 집어 들고 텐트를 친 뒤 가지고 있는 식량으로 저녁을 먹었다.

피자도 굽고 핫도그도 만들어 주고 치킨도 구워 준다는 마이크 하우스의 화덕

그나저나 배낭도 무거운 데다가 낯선 길이다 보니 자꾸 바닥만 보며 걷느라 목이 다 아프다. 쉴 때가 되어서야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이 얼마나 기회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인지… 이후로는 내가 언제 또 이 길을 걸어보겠냐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 앞과 뒤,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래, 난 두 번 다시 이 길을 걸을 일이 없을 테니까,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즐겨 둬야 해.’라고.

4/8 일요일
덥다. 더위를 잘 타지 않는 나조차도 미치게 덥고 덕분에 배낭은 배로 무겁게 느껴진다. 파이어 클로져고 뭐고 아이딜 와일드 가서 짐 좀 정리해서 다른 데로 보내야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하다. 최대한 뺄 수 있는 건 다 빼고 정말 필요한지 다시 생각 해 봐야겠다. 그러고 다시 파라다이스 카페로 와서 재시작해야지… 등등 지금 이 순간을 넘어서 다른 시간과 공간에 나를 밀어 넣고 있다.

스위치백(지그재그로 산을 넘어가는 방식)을 가다가 저 산을 넘으려나 싶으면 그냥 스위치백으로 돌아서 안심하고 있다가 그 산을 돌고 나면 더 높은 산이 나타나는 것도 이젠 단념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길은 여전히 낭떠러지 외길이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아찔한 일이 벌어지니 조심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오늘 처음으로 물을 4L나 마셨고 처음으로 내가 미쳤다고 여기 와서 이러고 있나 싶기도 하는 생각을 했다. 길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한 발 한 발 가야 이 고통을 끝낼 수 있고, 배낭이 무거운 것도 내 탓, 목적지가 먼 것도 내 선택, 중간에 멈춰서 텐트 안에서 쉴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내 선택에 따른 책임이다. 사막이라 물 상황을 고려해야 하는 게 가장 큰 문제인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오늘은 길게 걷지 않고 21km 정도에 물이 있는 캠프 사이트가 있다고 해서 그곳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내일은 짧게 걸어 유명한 레스토랑에 갈 수 있을 것이다.

4/9 월요일
밤사이 파이어 클로저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계속 갈까, 아이딜 와일드로 가서 스킵 할까 고민하면서 밤을 보냈는데 샌디에고 트레일 앤젤 하우스에서 만난 하이커 부부가 이곳은 오래전 파이어 클로져라 괜찮을 거라고 한다. 마을로는 들어가지 않느냐고 물으니 Paradise Valley Cafe 가서 식사하면서 의논할 거라고 한다. 그 두 부부뿐 아니라 주변의 하이커들 역시 오늘은 점심으로 맛있는 버거를 먹을 생각뿐인가보다.
오늘은 걷는 게 어제 같지 않다. 어제, 그제 무리해서 길게 걸은 것이 원인인지 체력이 올라오지 않아 걷는 게 힘들다. 속도도 안 나고. 한데 그건 심리적일 뿐이었는지 한 시간마다 이동 거리를 확인한 메모를 보니 시간당 3km 정도를 걷고 있다. 예전 같으면 생각지 못할 일인데 어이가 없다. 시간당 3km를 걷는 게 느리다고 느끼다니. 하지만 카페에 거의 도착할 즈음 오른쪽 발목과 무릎 뒤에 통증이 살짝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냥 아이딜 와일드 가서 쉬고 짐 정리 후에 체력도 보충하고 난 다음 다시 돌아와야 할 것 같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유명한 ‘ Paradise Valley Cafe’ 음식점

카페에서 만난 하이커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마치고는 어떻게 마을로 들어갈까 고민하는 사이 한 하이커가 전화로 픽업 해 줄 차량을 수배했다. 우연히도 어제/그제 이틀이나 내 옆에 텐트 쳤던 두 사람과 다른 하이커 총 여섯 명이서 이용했는데 나를 포함 네 명이 뒤의 짐칸에 앉아서 구불구불 도로를 따라 균형을 잡느라 서로 웃고 난리다.

가장 유명한 Route 66 버거를 주문했다

숙소는 이전에 함께 걸었던 하이커를 다시 만나 공유하기로 해서 해결이 됐고 문제는 너무 무겁게 느껴지는 나의 짐이다. 일단 숙소 왔는데 세탁도 맡기면 드라이까지 해서 돌려주고 방도 깨끗한 편이다. 일단 제일 급한 대로 샤워하고 세탁물을 맡기고 그동안 뺄 수 있는 장비는 일단 다 빼보고 같이 있는 하이커의 조언도 받았다.

4/10 화요일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마음이 바뀌는 날인가 보다. 아침에 장비점에서 이것저것 둘러보다 신발 한번 신어봤는데 원래 신던 사이즈가 발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신은 컬럼비아랑 비교해보니 확실히 쿠션이 좋다. 신발을 신고 잠시 걸어보니 사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솟아오른다. 지금 신고 있는 신발이 아직 쓸만한 데다가 발에 이상도 없고, 다음 신발이 중간의 다른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흔들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장비점을 나왔다. 근처의 커피점에서 커피 마시면서 계획을 점검하다가 텐더풋 이라는 하이커가 옆에서 테이핑을 하고 있길래 조금 도와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우회 길이 너무 가팔라서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단다.

그렇게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다시 집중하고 있는데 길가에서 라 스트라다 아저씨가 날 부른다. 다시 만날 줄 알았어요! 같이 앉아 커피를 마시며 그동안 어떻게 된 건지 이야기도 나누고 서로 계획 이야기를 하는데 처음 며칠 동안을 같이 걸었던 탓인지 오래 알고 지낸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그렇게 잠시 수다를 떨다가 저녁을 함께 먹기로 약속하고, 나는 빼낸 짐을 다른 곳으로 보내러 우체국에 갔다. 그리고 다음 마을까지 걸어가며 먹을 식량을 구매하고 다시 트레일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몬타나라는 하이커를 오랜만에 만났다. 파이어 클로져로 갔다가 우회 길로 나왔는데 너무 힘들고 지쳐서 지금 아무것도 결정한 게 없단다. 내가 어제 파라다이스 밸리 카페에서 왔던지라 다시 거기부터 가서 시작하고 싶다니까 되게 경사지고 자기도 겨우 히치 했다면서 굳이 왜 가느냐고 추천하고 싶지 않단다. “알겠다, 너 지쳐 보인다, 쉬어라.” 하고 인사 후 헤어졌다.

‘클리프바’로 불리는 식량. 가볍고 칼로리가 높은 것도 있지만 물이 필요 없는 음식이라 간편하게 먹을 수 있어 많은 하이커들이 이용한다

이후에도 우회 구간을 걸은 하이커들을 만났는데 하나같이 지쳐 보이고 다리에 무리가 와서 다음 계획 없이 마을에서 며칠 쉬겠다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었다. 그래서 나도 내일의 계획을 결정한 뒤, 5일 치의 식량과 내일 하루 마실 물을 정수해서 배낭을 다시 꾸렸다. 어라? 꽤나 가벼워진 것 같은 건 마음 뿐인 걸까? 배낭도 트레일 폐쇄 구간도 결국 그 마음을 비우지 못해서 이틀 동안 고민에 빠져있던 건데 비워야 할 건 배낭뿐만이 아니었나보다. 뭐 도장 찍듯 구간 구간 통과가 목적은 아닌거니까. 트레일이 아니더라도 좋은 풍경이 있으면 들렀다 갈 길이니까. 이렇게 편하게 마음 먹으니 내일이 오히려 기다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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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경 고

여행하는 소믈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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