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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도 다시 한 번 – 제17회 전주국제영화제를 다녀와서

미워도 다시 한 번 – 제17회 전주국제영화제를 다녀와서

신동호 2016년 6월 13일

1997년, 내 관심 테마 중 하나는 ‘인디 (Indie)’였다. 메이저 문화 세력보다는 지하에서 숨 쉬고 있는 마이너 정신. 먼저 귀가 반응했다. 왕왕거리는 사운드가 홍대 지하 클럽에서 시동 걸리면, 청신경이 묘하게 꿈틀댔다. 가요톱텐이나 SBS 인기 가요에서 쏟아낸 음악과는 사뭇 달랐다. 물론 내 귀는 미처 대중음악의 가이드라인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들-인디 뮤지션-만의 문법으로 디자인된 음악에 갈아타고 싶었다. 갸우뚱거리면서 습득하던, 처음 먹어본 음식을 시음하는 심정이었다. 그렇게 몇 번의 학습(?)을 통해 내 팬으로 만든 밴드가 ‘미운 오리’였다. 그 당시 메인보컬의 성량은 지하실 공간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었고, 외모 또한 내 취향 저격이었다. 맞다. 미운 오리는 밴드 ‘자우림’의 전신이다. 공연하는 밴드 수에 못 미친 관객 수. 공연을 마치면 무대에서 내려와 관객 속에 편입되어 다음 뮤지션을 응원하는 시스템. 보이지 않는 공연 질서까지 섭렵하며 홍대 클럽을 드나들었다. 97년의 김윤아. 내 인사도 받아줬다. 오히려 교복 입은 날 먼저 알아봤다. 클럽 재머스. 아직도 홍대 클럽의 터줏대감으로 버티고 있다.

[사진 001] 버스킹 스테이지. 전주국제영화제 기간에 영화의 거리에서는 인디밴드들의 버스킹 공연이 관객들의 시선을 모았다.

[사진 001] 버스킹 스테이지. 전주국제영화제 기간에 영화의 거리에서는 인디밴드들의 버스킹 공연이 관객들의 시선을 모았다.

1998년. 이젠 ‘눈’이다. 눈높이를 ‘인디’에 맞추려고 부산으로 향했다. 제3회 부산국제영화제. 영화제 관람도 처음이지만, 부산도 처녀 여행이었다. 모든 게 낯설었다. 당도한 부산역의 공기는 향부터 달랐다. 이국적인, 마치 일본 해안도시 어딘가에 내가 서 있는 모양새였다. 아해들이 맛깔나게 사투리 대화를 하는 장면은 브라운관 속 같았고, 부산지하철 폭이 서울보다 좁아서 마주 보는 시야가 부담스러웠다. 암튼 영화제 시스템조차 모르고 왔던 터라 황당한 사건도 여럿 있었지만, 그저 ‘새롭고 신선함’이란 카테고리에 모두 던져 넣었다. 영화 매표소 앞, 김밥천국 메뉴판을 보고 있는 줄 알았다. 대학교 수강신청처럼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골라 볼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받았다. 장르의 스펙트럼도 넓고 평소에 접할 수 없는 제3세계 영화도 즐비했다. 영화관 밖도 흥미로웠다. 자갈치 시장 국밥집에서 만난 배우들, 셔틀버스 창문 밖에 보이는 부산의 풍광들. 신세계의 연속이자, 배움의 향연이었다. 이렇게 내 영화제의 서막은 열렸다.

[사진 002]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 로비에 자리한 티켓부스.

[사진 002]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 로비에 자리한 티켓부스.

영화제를 ‘연인’으로 비유해보자. 국내 영화제는 많아졌지만, 내가 주로 만나러 가는 영화제는 5개.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여성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환경영화제』. 모두 다른 연애 성향을 띤다. 부산영화제는 ‘첫사랑’, 전주영화제는 ‘밀당 연애’, 여성영화제는 ‘천생연분’, 부천영화제는 ‘원 나이트 스탠드’, 환경영화제는 ‘착한 사랑’. 부산영화제는 앞서 설명했으니 전주영화제부터 가보자. 전주영화제에서 고른 영화들은 첫인상과 다르게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신 다른 요소-음식과 술, 사람들-가 돌린 마음을 충족시켰다. 여전히 나와 밀당 중이다. 반대로 여성영화제 영화는 대부분 만족하고 나온다. 심각한 테제를 흥미롭게 풍자한 영화, 페미니즘을 순한 언어로 풀어낸 영화, 뭇 남성들도 쉽게 소화 가능한 영화, 이 영화제는 말하지 않아도 내 취향을 기가 막히게 건드린다. 부천영화제는 한여름에 열리는 만큼 뙤약볕과 장마가 함께 한다. 이런 외부 요인과 더불어, 상영하는 영화의 성격도 괴팍하다. 호러, 스릴러 등 선혈이 난자하는 영화들이 라인업에 포진되어 있는데, 호기심이 간다. 길티 플레져의 극을 만난다. 낯선 여성과의 첫날밤을 스크린에서 경험한다. 짜릿하면서도 불편하다. 마지막으로 환경영화제. 마냥 착하다. 물론 환경보호를 주제로 세상에 경종을 울리는 영화도 존재하지만, 결론은 선한 사회를 이끄는 영상물이다. 내게 환경영화제는 플라토닉하다. (각 영화제마다 평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오니 오해하지 마세요.)

[사진 003] 영화 상영 후 가진 관객과의 대화. 영화를 연출한 루카스 발렌타 리너(왼쪽에서 두 번째) 감독님.

[사진 003] 영화 <우아한 나체들> 상영 후 가진 관객과의 대화. 영화를 연출한 루카스 발렌타 리너(왼쪽에서 두 번째) 감독님.

전주영화제. 유일하게 아직 진행형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내게 마음을 잘 열어주지 않는다. 과연 올해는 어떤 감정을 내게 던져줄 것인가. 왜 아직 진행형일까. 내가 판단했을 때, 전주국제영화제의 영화는 타 영화제보다 예술적이고 작품성에 초점을 맞춰 영화를 수입해 상영한다. 그래서 종종 읽기 어려운 감독의 언어와 맞닥뜨린다. 내 깜냥은 이차방정식인데, 전달하는 건 적분이니 영화의 흐름에 동승할 수가 없다. ‘미워도 다시 한 번’. 올해도 노심초사하여 2개의 영화를 간택했다. 결과는 1승 1패. 또 다른 영화는 아침 일찍 현매(현장예매)에 도전했지만 매진, 3전 1승 1패. 선방했다. 아니 만족했다. 날 받아주는 감정의 불이 켜졌다.

[사진 004] 영화제 뉴스레터, 시간표 가이드책, 그리고 티켓.

[사진 004] 영화제 뉴스레터, 시간표 가이드책, 그리고 티켓.

전주영화제의 에피소드에는 대부분 술이 엮여 있다. 지금은 상영관이 대부분 전주 시내 영화의 거리에 몰려 있지만, 2008년만 해도 상영관이 전주 시내 곳곳에 흩어졌었다. 미드나잇 인 시네마 Midnight In Cinema. 말 그대로 밤새워서 영화를 보는 프로그램. 영화 3편을 자정 무렵부터 동틀 때까지 이어서 보는 미션(?)에 도전하려고 지인들과 상영관에 들어섰다. 상영관은 전북대학교 대강당이었는데, 좌석부터 좀 불편했다. 영화는 피로 위를 짓눌렀다. 영화의 집중도는 추락하고, 시선은 자연스레 주위 사람들의 상태점검에 들어갔다. 나가자는 무언의 사인을 감지했다. 첫 번째 영화가 끝났다. 조명이 켜지자마자, 학교 앞 주점으로 향했다. 피로는 상영관에 놔둔 채 동틀 때까지 주류 커뮤니케이션이 진행되었다. 영화가 마칠 때 즈음해서 술자리도 마무리됐다. 그 당시 전북대학교 근처, 유일하게 존재했던 찜질방에 몸을 널었다. 정말 웃겼던 건, 같은 영화를 본다는 지인들을 적잖게 만날 수 있었다. 물론 술에 취한 채.

[사진 005] 2008년 영화제 기간 현수막.

[사진 005] 2008년 영화제 기간 현수막.

[사진 006] 전주 영화의 거리 앞.

[사진 006] 전주 영화의 거리 앞.

이제 맛과 멋으로 채워보자. 전주영화제의 강점은 전주의 맛과 멋스러운 전주한옥마을 및 남부시장이다. 이들과의 연대로 영화제가 더 풍성하다. 영화도 식후경인지라, 주위의 맛이 쟁쟁해야 한다. 숙취 해결을 담당하는 건 전주 콩나물국밥이다. 수많은 언론에서 다룬 아이템이라 결정장애가 따라온다. 다행스럽게도 일행 중에 전주 현지인이 있어서 그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랐다. 전주 시내가 아닌 전주 북부 아파트 단지에 있는 국밥집. 아침부터 전주 주민들로 인산인해다. 덜 차려진 복장과 발이 편한 신발로 느슨하게 나온 사람들. 특이했던 건, 오픈키친이었다. 사람들은 ‘ㄴ’자 바에 삼삼오오 앉는다. 그 안에서 주인장 부부는 국밥을 끓여내고 오징어, 대파 등을 보란 듯이 다진다. 매움의 강도를 조절하는 옵션이 가능하다. 국물이 맑고 담백하니 입안이 깨끗하게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누구나 아는 곳이 아니라, 나만의 곳이 생겨서 더 아삭했다.

[사진 007] 전주 북부 지역에 위치한 콩나물국밥집.

[사진 007] 전주 북부 지역에 위치한 콩나물국밥집.

[사진 008] 전주 남부시장. 야시장이 호황이다.

[사진 008] 전주 남부시장. 야시장이 호황이다.

예가체프 코케 허니 원두를 좋아한다. 이 원두를 취급하는 카페는 드물다. 제대로 신 커피가 땅길 때 생각나는 원두다. 약 배전으로 로스팅해서 손 흘림으로 내린 코케 허니 커피를 만나는 것 자체가 내게는 행운이다. 전주 시내에서 발견했다. 누군가의 추천으로 찾아간 카페였는데, 메뉴 속에 떡 하니 코케 허니란 활자가 박혀있다. 카페를 추천받았던 것이지 이 원두가 있을 줄은 몰랐다. 내린 커피가 내게 인사한다. 우연한 만남이라 설렘이 배가 된다. 한옥을 개조한 카페의 멋이 진하다. 커피 뇌섹남인 주인장의 철학과 인상도 향긋했다. 누룽지 빵은 이 카페의 시그너처 사이드 메뉴인데, 개인적으로 맥주 안주에 탁월했다. 며칠 동안 영화의 거리 주변을 수도 없이 돌아다녔지만, 이 카페는 발견할 수 없었다. 진정한 아지트인 셈이다. 실수한 것 같다. 인스타그램에 사진 올린 것이..

[사진 009] 전주 시내에 위치한 카페. 한옥이 고풍스럽다.

[사진 009] 전주 시내에 위치한 카페. 한옥이 고풍스럽다.

1,000 조각 퍼즐. 선물 받은 지 5년은 족히. 클림트의 ‘키스’란 작품이었다. 퍼즐이란 게 그렇다. 멀리서 보면 한 여인이 그려진 그림처럼 보이지만, 눈앞에서는 서로 다른 1,000개의 조각이 촘촘하게 연대한 결정체다. 나 자신에 과업을 줬다. 퍼즐을 엎었다. 이제야 각자의 뒤엉킨 퍼즐들의 면모가 보인다. 어떤 조각은 여인의 한 조각이기도 하지만, 배경의 한 일원인 조각도 존재한다. 보통 중요도가 높은 조각들 위주로 맞춰가지만, 난 반대로 배경부터 찾아갔다. 쉽지 않았지만, 내가 정한 룰을 뒤집긴 싫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집과 아집이 날 괴롭혔고, 결국 룰을 변경하여 보이는 대로 퍼즐을 채웠다. 사실 1,000개의 조각에서 주연과 조연, 엑스트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1,000개가 꼭 맞아야 완성이고, 하나라도 어긋나면 실패다. 영화제 속에도 1,000개의 조각이 맞물려있다. 조직위원장도, 프로그래머도, 자원활동가도 존재한다. 이들의 역할을 다르지만 없으면 어그러지는 게 현실이다. 영화제를 둘러보면서 자원활동가들의 모습을 담았다. 나도 2008년도에 자원활동가를 시작으로 영화제와 연을 닿았다. 물론 더 큰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들의 고충과 역할은 아직도 인지하고 있다.

영화제는 영화만 보는 게 아니다. 영화제 내면에 들어가서 나도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의 기분을 만끽할 때 비로소 축제다. 그래서 아직도 난 애정 하나보다. 관계가 밀당이라 할지라도.

[사진 010] 관객들의 편의를 제공하는 자원활동가.

[사진 010] 관객들의 편의를 제공하는 자원활동가.

[사진 011] 전국국제영화제를 즐기는 외국관람객들.

[사진 011] 전국국제영화제를 즐기는 외국관람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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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호

발로 기억하는 보헤미안, 혀로 즐기는 마포술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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