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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겨울을 견뎌낼 수 있는 마법의 맥주

지독한 겨울을 견뎌낼 수 있는 마법의 맥주

염태진 2023년 1월 17일

이런 표현이 맥주에 어울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겨울철에 두 손을 움켜쥐고 호호 불면서 홀짝거리며 마시는 맥주. 하지만 이 맥주 스타일을 말하자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바스 브루어리의 발리 와인 포스터]

이런 포스터가 있습니다. 한 남자가 겨울철의 눈 쌓인 도로를 걷고 있습니다. 신발은 쌓인 눈에 반쯤 잠겨 있고, 어깨는 잔뜩 움츠려 있습니다. 지팡이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추워서 겨드랑이에 걸치고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로 걷고 있습니다. 날씨가 추워도 너무 추워 보입니다. 그리고 포스터 아래에는 “BEST WINTER DRINK!”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남자가 추위를 헤치면서 어딘가로 가는 길에 생각하고 있는 음료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 포스터는 지독한 추운 겨울을 견뎌낼 수 있는 맥주, 발리 와인의 광고 포스터입니다.

발리 와인은 몰트의 풍미가 풍부하고 과일 에스테르가 있는 영국의 고도수 맥주입니다. 알코올 도수가 무려 8~12도 정도에 달합니다. 잔당이 많아서 음용성이 있는 편은 아니지만 겨울철에 홀짝거리며 마시기에 좋습니다. 특히 날씨가 음산한 날이면 더욱 좋은데 조금만 마셔도 몸이 후끈 달아오르기 때문입니다. 겨울에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맥주라는 뜻에서 ‘윈터 워머(Winter Warmer)’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을 녹여 주는 발리 와인 한잔]

이름은 와인이지만 와인과 공통점은 둘 다 두 자릿수 알코올 도수를 가졌다는 점 빼고는 없습니다. 맥주계에서 ‘우리도 이런 술을 만들 수 있어’라는 대항의 의미로 와인을 가져다 쓴 것뿐입니다. 이 와인이라는 명칭 때문에 영국에서는 발리 와인(Barley Wine)이라고 쓰지만, 미국에서는 발리와인(Barleywine)이라고 붙여서 씁니다. 미국의 주류담배세금무역국(Alcohol and Tobacco Tax and Trade)에서 소비자가 와인으로 오인할 것을 염려하여 와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발리 와인을 윈터 워머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같이 도수가 높은 맥주를 부르는 별명은 다양합니다. 우선 고도수 맥주와 저도수 맥주를 각각 빅 비어(Big Beer)와 스몰 비어(Small Beer)라고 부릅니다. 예전에는 고도수 맥주를 위스키처럼 현금 대용으로도 사용하였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 노동자들이 급여를 맥주로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스톡 에일(Stock Ale)입니다.

빅 비어는 적은 양을 마셔도 큰 만족감을 줄 정도로 강력합니다. 용의 젖을 마신다면 이런 느낌일까요? 빅 비어를 드래곤스 밀크(Dragon’s Milk)라고도 합니다. 예전에는 맥주를 담은 통에 맥주의 도수에 따라 X자를 표시해 두었습니다. X가 많을수록 고도수 맥주인데, 빅 비어는 파이브 엑스(XXXXX)입니다. 그 밖의 스트롱 에일(Strong Ale), 올드 에일(Old Ale), 스테일 에일(Stale Ale) 등이 모두 비슷하게 통용되는 이름들입니다.

[영국의 바스 발리 와인의 광고]

발리 와인은 18세기 영국의 귀족 가문에서 겨울철에 양조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영국의 전통적인 양조 방식은 파티 가일(Parti-gyle)이라 부르는 부분 발효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은 한번 쓴 티백이 아까워 여러 번 우려 마시듯 맥즙을 여러 번 나누어서 맥주를 만들어 내는 방식을 말합니다. 파티 가일에 의해 첫 번째 나오는 맥즙에는 당분이 충분하여 효모가 알코올을 많이 생산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맥즙에서는 보통의 맥주가 나오고 세 번째 맥즙에서는 도수가 2~3도에 불과한 저도수 맥주가 나옵니다.

저도수 맥주는 마일드 비어라고도 하며 상하기 전에 빨리 소비하는 편이고, 첫 번째 맥즙으로 만든 고도수 맥주는 보통 나무 캐스크에 보관하여 좀 더 숙성하여 마십니다. 발리 와인은 이렇게 발효와 숙성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고도수 맥주입니다. 참고로 현대에는 파티가일 방식을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양조하는 맥주를 상업적인 맥주로 끌어 올린 양조장은 영국의 바스(Bass) 브루어리입니다. 1872년에 설립된 바스는 1903년에 자신의 양조장에서 가장 도수가 높은 맥주에 No.1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Bass No.1 Barley Wine’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된 이 맥주가 현대 발리 와인의 시초입니다. 조슈아 M. 번슈타인이 쓴 <맥주의 모든 것>에 의하면, 바스는 의학 저널에 발리 와인을 처음 소개하면서 ‘이 맥주는 수유하는 엄마뿐만 아니라 소화불량, 불면증, 빈혈, 허약 체질 등 온갖 질환에도 적합하다’고 광고했다고 합니다. 당분이 높고 풍미가 풍부한 맥주는 약으로 인식되었던 시절입니다.

그 밖의 영국에 전통을 둔 발리 와인은 처음으로 금색의 발리 와인을 선보인 테넌츠(Tennent’s)의 Gold Label과 풀러스(Fuller’s)의 Golden Pride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발리 와인은 서서히 명맥이 끊겨 현재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바스의 발리 와인도 1995년에 생산이 중단되었습니다.

[(좌) 아메리칸 발리 와인의 시초, 앵커 올드 포그혼 / (우) 아메리칸 발리 와인의 대중화에 기여한, 시에라 네바다 빅풋]

사라질 뻔한 스타일에 인공호흡기를 달아 준 것은 역시나 미국의 크래프트 브루어리였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앵커 브루어리는 IPA나 포터 등 영국 스타일의 맥주를 처음으로 미국식 크래프트 버전으로 재탄생시킨 양조장으로 유명합니다. 앵커는 영국식 발리 와인에 미국의 신세계 품종 홉을 듬뿍 사용하여 미국식 발리 와인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1975년에 공개된 ‘앵커 올드 포그혼(Anchor Old Foghorn Barley Wine Style Ale)’이며 아메리칸 발리 와인의 시초입니다.

이어 시에라 네바다 브루어리는 1983년에 ‘빅풋(Sierra Nevada Bigfoot Barleywine Style Ale)’을 선보이며 발리 와인의 대중화에 기여합니다. 미국의 발리와인은 영국의 발리 와인에 비해 홉의 풍미가 두드러집니다. 그렇다고 더블 IPA처럼 홉이 극단으로 치닫지 않습니다. 강한 몰트 풍미와 두드러진 홉 풍미, 쓴맛의 밸런스가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크래머리 브루어리의 배럴 숙성 발리 와인]

현대에 와서 발리 와인은 새롭게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배럴 숙성 발리 와인입니다. 국내에서 발리 와인을 마시기는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영국식 발리 와인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고, 미국식 발리 와인도 수입이 제한적입니다. 하지만 국내 크래프트 브루어리에서 다양하게 해석하여 내놓은 발리 와인이 있어 다행입니다. 2021년 크래머리 브루어리는 셰리 배럴, 럼 배럴, 버번위스키 배럴, 레드 와인 배럴에 각각 숙성시킨 4종의 배럴 숙성 발리 와인을 선보인 바가 있습니다. 건과일의 프루티와 토스트의 고소함, 몰트의 단맛이라는 기본적인 발리 와인의 풍미 외에도 각각의 배럴이 부린 숙성의 마법을 느낄 수 있는 맥주입니다.

[발리 와인과 블루 치즈는 환상의 짝궁]

그럼 발리 와인에 어울리는 푸드는 무엇이 있을까요? 알코올 도수와 강도가 센 발리 와인에는 강도가 세거나 영양가가 있는 음식과의 조합을 추천합니다. 치즈라면 푸른곰팡이 치즈가 제격입니다. 맥주와 치즈가 서로의 강한 풍미를 제어하며, 맥주의 단맛과 치즈의 짠맛이 균형을 이루어 줍니다. 영국의 대표적인 블루 치즈 스틸턴은 음식의 하모니뿐만 아니라 지역적인 하모니까지 부여합니다.

[맥주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앨래스카 발리 와인 축제에 참가했을 때의 모습]

마지막으로 발리 와인에 관한 유명한 맥주 축제에 대해 소개해 볼까 합니다. 그레이트 알래스카 비어 앤드 발리 와인 페스티벌(Great Alaska Beer & Barley Wine Festival)입니다. 이 축제는 앨래스카 지역의 유명 양조장이 생산하는 발리 와인에 초점을 맞춘 맥주 페스티벌입니다. 앨래스카의 추위가 가장 극성인 매년 1월에 열립니다.

비어 헌터라는 별명을 가진 ‘맥주의 황제’ 마이클 잭슨은 알래스카 발리 와인 축제에 초대받은 이야기를 그의 블로그에 남겼습니다. 그는 일곱 마리의 허스키가 끄는 썰매를 타고 미친 듯이 달리고, 몇 마일 동안 가문비나무 숲을 가로질러 도착하여 마신 발리 와인에 대한 감회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추위가 절정인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맥주 축제라니, 발리 와인은 지독한 겨울을 견뎌낼 수 있는 마법이 맞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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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태진

맥주인문학서 저자. 맥주로 내장도 채우고 뇌도 채우며 '날마다 좋은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 iharu@kakao.com / 인스타 iharu04 / 브런치 https://brunch.co.kr/@ih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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