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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탄생 (10부)

10. 와인의 혁명 2 – 샴페인과 포트 와인의 등장

유리병과 코르크의 등장은 17세기, 그동안 경험할 수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두 와인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바로 샴페인과 빈티지 포트 와인이다.

이전에 언급한 바 있지만, 지금은 샴페인으로 유명한 샹파뉴 지역은 이미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 대제가 군림하던 7세기부터 유명했던 와인 산지였다. 7세기 들어 유명한 수도원들이 에페르네를 비롯한 샹파뉴 지역에 등장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포도밭이 광범위하게 생겨났다. 8세기 즈음에는 포도밭이 워낙 많아서 지역별로 구분이 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샹파뉴 와인의 위상이 한껏 높아진 것은 816년 랭스에서 샤를마뉴 대제의 아들인 루트비히(Ludwig)의 대관식이 거행되면서부터다. 이 자리에 참석한 귀족들이 지역의 와인을 마시고는 극찬을 했던 것. 이후 중심 도시인 랭스가 프랑크 국왕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지방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샹파뉴 와인은 기품을 상징하게 됐다.

기품을 상징하는 샴페인 / 사진 제공: 배두환

근대에 들어서 샹파뉴는 피노 누아로 만든, 약간 분홍색을 띠는 (스틸) 와인을 만드는 지방으로 유명했다. 여기서 생산된 피노 누아 와인은 루이 14세의 식탁에 오를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샹파뉴 지방이 기포가 있는 와인인 스파클링 와인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우선 스파클링 와인을 어떻게 만드는지부터 살펴보자.

나름 복잡한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샴페인 / 사진 제공: 배두환

스파클링 와인은 사이다처럼 기포가 있는 와인을 뜻한다. 자, 그럼 스파클링 와인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원리는 정말 간단하다. 수확한 포도를 와인으로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효모다. 그게 야생 효모든 시중에서 파는 인공 효모든 상관없이, 그 효모가 포도를 압착해서 얻어지는 주스(must)를 만나게 되면 그 안의 당분을 먹어 치우면서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를 생성하게 된다. 만약 이렇게 발효가 되고 있는 통을 완벽하게 밀봉을 해서 이산화탄소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면? 그러면 와인에 자연적으로 이산화탄소가 녹아들게 된다. 참고로 이산화탄소의 기본적인 화학적 성질이 물에 녹아 약한 산성을 띠는 탄산을 생성하는 것이다.

와인도 대부분이 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스파클링 와인이란 결국 와인에 이산화탄소가 녹아든 와인을 말한다. 이 원리에서 벗어나서 탄생하는 스파클링 와인은 없다. 우리나라에서 인기 있는 모스까또 다스티도, 샴페인도, 그 외 다른 어떤 종류의 스파클링 와인도 방법은 다르지만, 저 원리를 모두 이용해서 만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스파클링 와인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만든 곳이 바로 프랑스다. 조금 더 파고 들어가면, 바로 여기서 ‘동 페리뇽(Dom Perignon)’이라는 유명한 수도사 이름이 등장한다. 이전 이야기에서 몇 번 이야기했지만, 교회와 수도원은 와인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2차 병 발효를 거쳐서 탄생되는 샴페인. 2차 병 발효 때는 보통 왕관 마개로 병을 밀봉한다. / 사진 제공: 배두환

먼 과거, 그리스도교의 제례 의식에서 특별 대우를 받은 와인은 고대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채택함에 따라, 이후부터 순풍에 돛을 단 듯 거침없이 퍼져 나갔다. 그리스도교를 믿는 곳이면 어디나 교회나 수도원이 생겼고, 이들은 마실 와인을 만들기 위해 포도를 재배했다. 중요한 포인트는 이들이 단순 소작농처럼 양에 치중한 싸구려 와인을 만들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포도 재배에 여러 과학적인 방법을 도입했다. 구체적으로 땅을 다지는 방법, 가지치기하는 방법, 접붙이기하는 방법에 대해서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결국 수도사들은 서로 다른 땅에서 나온 와인들이 같은 품종이라도 해가 지나면 다른 향과 맛을 지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와인 메이킹에 있어서 레드 와인은 계란 흰자로, 화이트 와인은 부레풀로 정제하는 방법도 터득했다. 동 페리뇽이 활약했던 17세기에도 와인 산업에 있어서 수도원의 비중은 여전히 컸다.

동 페리뇽 / 사진 출처: wikimedia

동 페리뇽(1638~1715)은 샹파뉴 지역의 작은 마을인 오빌레르(Hautvillers)의 베네딕틴 수도원의 수사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수도원에서 와인을 만들고 관리하는 셀러 마스터였고, 여러 혁신적인 와인 메이킹 기술을 개발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샹파뉴 와인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여러 포도 품종을 블렌딩하는 방법이라든지, 적포도에서 맑은 즙만 짤 수 있도록 유도하는 압착기의 개발, 나무 대신 유연성 있는 코르크를 와인 마개로 쓰는 영리함, 압력에 강한 두꺼운 유리병을 쓴 것 등등.

당시에도 가을에 포도를 수확해 겨울이 오기 전에 와인을 병에 담았는데, 그 와인은 당분과 효모가 남아 있는, 즉 아직 발효가 끝나지 않은 와인들이었다. 때문에 병 안에서 겨우내 잠들어 있던 효모들이 봄이 돼서 따뜻해지면 다시 활동하면서 와인에 남은 당분을 먹어 치우고 어김없이 이산화탄소를 만들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두꺼운 병을 만들 기술이 없어서, 병 안에 꽉 찬 이산화탄소의 압력 때문에, 도리 없이 병이 깨지기 일쑤였다.

퓌피트르라는 A자형 거치대에서 2차 병 발효를 시키는 샴페인 / 사진 제공: 배두환

이와 같은 현상을 물론 동 페리뇽도 관찰하고 있었는데, 당시 그도 병이 왜 깨지는지, 와인에 기포가 왜 생기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또한 생성되는 기포를 막을 방법도 없었다. 그리고 무발포성 와인에 길들여져 있던 사람들은 기포가 생기는 것이 와인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 기포가 있는 와인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은 이를 만들어 낸 프랑스인이 아니라, 주요 고객이었던 영국인이었다. 프랑스에서 추방당하면서 런던으로 거처를 옮긴 생테브르몽(Saint-Evremond) 후작이 여기서 등장한다.

생테브르몽 후작 / 사진 출처: wikimedia by Godfrey Kneller

본래 수필가이자 문학 비평가였던 그는 노르망디에서 태어난 순수 프랑스인이었으나,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발언으로 말미암아 런던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영국으로 가는 과정에서 챙긴 샹파뉴 와인이 2차 발효를 일으켰고, 런던에 도착해서 그 와인을 오픈했을 때 녹아들었던 기포들이 그와 런더너들을 매료시켰던 것. 당시 2차 발효 과정에서 생기는 압력을 견디는 유리병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생테브르몽이 런던까지 무사히 와인을 들고 갔던 것 자체가 굉장한 행운이긴 하다. 발포성 와인은 희소성 덕분에 높은 가격에 거래가 되었고, 차차 영국과 프랑스에서 그 희소성 때문에 부유함의 상징이자 사치품으로 자리 잡게 됐다.

모엣 샹동 와이너리의 동 페리뇽 동상 / 사진 출처: wikimedia

현재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샴페인 브랜드인 모엣 샹동(Moet & Chandon)에서는 동 페리뇽의 이름으로 만든 최고급 샴페인을 생산하고 있다. 여기에도 꽤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1821년 동 페리뇽과 같은 오빌레르 수도원의 수도사로 있었던 그로사르(Grosard)는 페리뇽을 샴페인의 발명가로 추대했다. 페리뇽의 업적을 과대평가한 그의 기록은 페리뇽 뿐만 아니라 오빌레르 수도원의 위상을 높이는 데 이바지했다. 19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그로사르의 기록은 사실로 굳어졌고 페리뇽은 샴페인의 아버지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이야기는 점점 더 윤색되면서 페리뇽은 앞을 볼 수 없었지만 후각과 미각이 워낙 뛰어나서 그의 와인 블렌딩 솜씨를 어느 누구도 따라 할 수 없었다는 정도까지 미화됐다.

하지만 샴페인 업계는 진실이 어떻든 간에 이 이야기를 널리 퍼뜨리는 데 기민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 이야기가 샴페인은 증류주와 달리 오랜 역사가 있다는 이미지를 굳히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페리뇽이 샴페인을 처음 맛본 순간 ‘별을 마시는 기분이다’라고 감탄했다는 일화에서 착안해, 결혼식이나 세례식 등의 신성한 자리에 쓰이는 샴페인이니 수도사와 관계를 강조해도 나쁠 게 없었던 것이다.

포트 와인의 고향, 포르투 항 / 사진 제공: 배두환

포트 와인도 샴페인과 마찬가지로 와인 메이킹의 특이점과 시장 호응 덕분에 성공을 거두었지만, 정치 상황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샴페인과 다르다. 예나 지금이나 영국은 유럽의 아주 중요한 와인 소비국이었고, 영국은 주로 가깝고 유명한 프랑스 와인을 수입해서 마셨는데, 프랑스와 사이가 틀어지면서 수입이 어려워지자, 와인 상인들은 프랑스 와인의 대체품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세계에서 가장 귀하고 좋은 와인으로 평가받는 빈티지 포트. 다우(Dow’s)의 2011 빈티지 포트는 100대 와인 1위에 꼽히기도 했다. / 사진 제공: 배두환

이때 영국이 발견한 대체 와인이 바로 포르투갈 와인이었다. 영국인들의 입맛에 도우루 밸리에서 만들어지는 진한 와인들이 제격이었던 것. 처음에는 지금처럼 달콤한 포티파이드 와인은 아니었으나, 배로 긴 시간을 운송해야 했기 때문에 통째로 선적된 와인은 쉽게 변하기 마련이었고, 생산자들은 와인이 조금 더 오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 알코올을 부었던 것이 포트 와인의 시초다. 최초에 부었던 알코올은 전체의 약 3% 정도였는데, 발효 도중에 첨가하는 알코올 때문에 달콤한 맛이 더해졌고, 이런 달달한 특징이 영국의 소비자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점점 더 발효를 조금 더 일찍 중단시키는 한편, 알코올도 더 많이 첨가해서 지금과 같은 강력한 스타일의 포트 와인이 탄생했다.

숙성의 미학, 포트 와인 / 사진 제공: 배두환

그리고 포트 와인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빈티지 포트의 탄생은 바로 와인 병과 코르크의 발명 덕분이다. 빈티지 포트는 포도를 수확한 후 2년 안에 병입하고 셀러 안에서 오랜 시간 동안 병 숙성을 거치는 최고급 포트 와인이다. 빈티지 포트는 가장 비싸고 가치 있는 포트라 할 수 있고 뛰어난 해에 최상의 포도밭의 포도로만 만들어진다. 빈티지 포트는 영할 때도 즐길 수는 있지만, 병에서 수십 년간 숙성된 후에 진정한 모습을 보여준다. 심지어 100년 이상도 숙성이 가능하기 때문에 영국에서는 아이들의 성인식 때 선물할 빈티지 포트를 미리 사놓는 경우도 많다. 빈티지 포트는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오랫동안 병에서 숙성되기 때문에 마시기 전에 디캔팅을 해야 한다. 그리고 빈티지 포트는 다른 포트와 달리, 오픈하면 다른 와인과 같이 최대한 빨리 마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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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쟁이부부

선후배 사이였던 와인 매거진 기자 출신 남자, 소믈리에 출신 여자. 살아오며 경험한 와인의 절반을 함께 마셨고, 앞으로 만나게될 와인들은 항상 같이 마시게 될 동반자 관계. 평소엔 식당 주인, 때론 여행작가, 이따금 와인 강사, 이곳에선 와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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