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의 여름밤은, 집에서 가장 많은 저녁 시간을 보낸 계절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냥 슬퍼하기엔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 아깝습니다. 이러한 집에서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서 우리는 정성스레 저녁을 함께할 술을 고르고는 하죠.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한국의 ‘21년 상반기 와인 수입액은 2.4억 달러(약 2,800억 원)로 작년 동기간 대비 무려 110%나 증가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개인의 와인 소비가 늘어나면, 우리의 눈길이 가는 분야가 또 등장합니다. 바로 술을 담아내는 도구죠. 어설픈 와인잔에 따라 마시자니 기분도, 와인 맛도 좋지 않아 아쉽습니다. 그래서 좋은 잔을 고르자니 어디서부터 골라야 할지 몰라 고민되는 독자들을 위해 오늘 기사를 준비했습니다. 아름답고, 유니크하며 홈술을 위한 기능성까지 충분한 와인잔들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피콜로 와인 글라스
스템이 짧은 이 피콜로 잔은 필자도 집에서 애용하는 잔입니다. 일반 와인잔과는 달리 짧은 스템이 눈에 띄는 특징입니다. 덕분에 실수로 밀어 넘어뜨리는 것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어서, 집에서 편히 마시기에 더욱 적절한 잔이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1910년에부터 유리를 다뤄온 일본 기업, 키무라글라스에서 만든 잔인 만큼, 컵의 곡면이 만들어내는 향의 반향이 뛰어납니다. 실제로 필자는 어느 파인다이닝에서 이 기무라 글라스에 내어준 차가운 능이주를 블라인드로 마시고, 분명히 와인은 아니지만 혼란스러울 정도로 풍부한 향에 놀란 경험을 했었죠. 더욱 놀라웠던 사실은, 그 술을 다른 잔에 마셨을 때는 그 정도의 향을 느낄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런 단편적인 경험으로 이 와인잔이 최고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짧은 높이에서 오는 안정감, 거기에서 비롯되는 세척의 용이함, 여느 잔에 뒤지지 않는 뛰어난 풍미를 만들어 내는 능력은 집에서 와인을 즐기는데 충분히 훌륭한 도구가 되어줄 것입니다.
2. 마카롱 글라스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혹하는 이 잔은 정말 프랑스의 디저트인 마카롱을 닮았습니다. 올록볼록한 볼륨이 시선을 잡아끄는 덕에 마시는 내내 즐거운 잔이지요. 이 글라스를 만드는 셰프앤소믈리에라는 브랜드는 프랑스의 큰 테이블웨어 회사인 아크인터내셔널에서 운영하는 브랜드입니다. 180년이라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만큼 잔의 마감이 굉장히 뛰어나죠.
이 잔이 흥미로운 점은 바로 저 볼록하게 튀어나온 두 개의 곡선에 있습니다. 이 곡선은 와인의 향을 한번 닫았다가 다시 크게 열어주는 역할을 하므로 와인의 향을 살리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더불어 입술에 닿는 림 또한 꽃잎처럼 벌어져 있기에 와인을 마시는 순간 열린 향이 크게 쏟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죠. 뿐만이 아닙니다. 이 글라스는 Krysta Extra Strong crystal glass로 제작되어 기타 표준 크리스탈에 비해 림이 30% 정도 견고하다는 특징을 가집니다. 덕분에 잔과 잔을 부딪쳤을 때 소리가 정말 청아해서, 집에서 즐기는 와인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데에는 좋은 도구임이 틀림없습니다.
3. O 글라스 피노 누아
스템을 줄이다 못해 아예 없애 버린 O 글라스는 이제는 꽤 널리 알려진 잔입니다. 이미 이 잔을 갖고 있는 독자들도 꽤 많으실 테고, 집들이 선물로도 많은 사랑을 받는 잔이지요. O 글라스 시리즈는 2004년 리델에서 처음 만들었습니다. 공식 명칭은 ‘O Wine Tumbler’로, 식기세척기 사용이 가능하고, 보관과 사용이 용이하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죠. 스템이 없어서 손으로 볼을 잡으면 와인의 음용 온도에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 O 글라스에 와인을 따르게 되면 잔의 윗부분을 손으로 잡게 되어 체온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잔은 O 글라스 중에서도 피노 누아 잔입니다. 다른 O 글라스 시리즈와는 달리 역시 림이 꽃잎처럼 벌어져 있는 덕분에 입술이 잔에 닿을 때도 편하고, 코로 들어오는 향미가 더 많아지는 것 같아 선호하는 편이죠.
4. 비전 시리즈
볼이 스템 위로 살짝 흘러내린 듯한, 그래서 사과의 꼭지를 연상케 하는 비전 시리즈는 지허(Zieher)라는 독일 기업의 와인잔입니다. 지허는 3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테이블웨어 기업이지만, 비전 시리즈는 비교적 최근인 2015년 처음 런칭한 컬렉션이죠. 위의 사진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듯이 다른 와인잔들에 비해 눈에 띄게 길쭉한 스템이 그 우아함을 극치로 끌어올립니다.
스템이 길어 집에서 쓰기에 안정감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하실 수도 있지만, 실제로 비전 시리즈는 그 탄성으로도 무척 유명합니다. 볼을 살짝 잡고 기울였을 때 저 기다란 스템이 살짝 휘어지는 모습이나, 넘어져도 살짝 튀어 오르며 깨지지 않는 모습을 담은 테스트 영상도 많이 올라올 정도니까요.
또한 비전 시리즈의 볼 하단에 생기는 링 모양의 공간 덕분에 스월링할 때 공기와의 접촉면을 훨씬 더 극대화 할 수 있다는 점도 눈에 띄는 특징입니다. 섬세한 모양만큼이나 섬세한 맛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장점을 갖게 되는 셈이죠. 향을 잘 살려야 하는 와인이나, 홈술을 하더라도 눈도 입도 즐겁게 기분을 내고 싶은 날 제격인 와인잔입니다.
5. 그라비타스
마지막으로 소개할 와인잔은 잔의 베이스를 아예 없애버린 그라비타스입니다. 잔을 세우는 밑부분인 베이스가 없는 이 충격적인 디자인은 잔 중에서도 가장 창의적인 디자인으로 꼽힙니다. 이 특이한 모양 때문에 가지고만 있어도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죠. 이 잔을 만든 잘토(Zalto)는 무려 14세기 베네치아에서부터 시작된 가족기업인데요. 현재까지 6대에 이어 유리 공예를 지속해 오고 있는 만큼, 그 헤리지티와 퀄리티를 인정받는 브랜드입니다.
‘이리저리 굴러다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오히려 이 와인잔의 가장 큰 장점으로 작용합니다. 스윽 굴리면 손목을 쓰지 않고도 잔이 알아서 스월링을 시켜주는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잔의 측면의 한 부분이 살짝 납작하게 눌려있는 덕분에 테이블에서 잔이 아예 굴러떨어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렇게 조금은 특별한, 그리고 무척 아름다운 잔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 2021년. 그런 우리들의 시간을 조금 더 아름답고 기분 좋게 채우기 위한 이 도구들은 비단 도구가 아닌, 삶의 특별한 장치로서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마시자 매거진 여러분은 어떤 잔이 가장 마음에 드셨나요? 여러분들의 선택에 이 기사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길 바라며, 그리고 우리의 풍성한 홈술을 응원하며 오늘도 Sant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