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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탄생 (21부)

21. 와인의 산업화 5 –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의 부흥

와인의 신대륙 상륙 두 번째 이야기에서 언급했지만, 미국에서 최초로 와인의 대량 생산에 성공한 주인공은 스위스 출신의 이주민, 뒤푸르(Dufour)였다. 켄터키에서 포도나무 10,000그루를 심었던 그는 한 차례 쓴맛을 봤고, 인디애나로 자리를 옮겨 800갤런의 와인을 생산하면서 상업용 미국 와인의 시작을 알렸다. 참고로 이 와이너리는 미국 최초의 와이너리라는 간판을 걸고 인디애나에서 성업 중이다. 그렇다면 현재 미국 와인 생산량의 90%를 책임지는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미국 와인에서 질과 양 모두를 책임지고 있는 캘리포니아 / 사진 제공: 배두환

캘리포니아 이야기를 하기 전에 알아야 할 사실은 초기 미대륙에서 와인 생산의 수많은 도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고배를 마신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점이다. 바로 유럽종인 비티스 비니페라 종으로 와인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매섭고 혹독한 떼루아와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병충해 때문에 시들시들 병들어가던 비티스 비니페라는, 초기에 반짝 성공을 거두었다 하더라도 그 성공이 지속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실패에서 교훈을 얻고 토착 품종으로 와인을 만든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단 한 번의 실패가 의지를 꺾어버린 것도 중요한 이유겠지만, 당시 유럽에서 모종의 이유로 미대륙에 상륙한 이들은 생산자이든 소비자이든 간에 본국에 문화적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얘기해서 그들에게 유럽종으로 만들지 않은 와인을 마신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엄청난 와인 애호가로 잘 알려졌던 토마스 제퍼슨 /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와인 애호가로 널리 알려진 토마스 제퍼슨이 토착 품종으로 와인을 만들어 보라는 권고를 했을 때 한 양조업자는 미대륙에 그런 와인은 필요 없다며, 토착 품종으로 와인을 만든 것이 알려지면 이전까지 그 와인을 극찬하던 사람들도 바로 태도를 바꿀 게 뻔하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이 한마디 말로도 당시 와인 소비 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존 애들럼 / 사진 출처: wikimedia

토착 품종으로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이는 존 애들럼(John Adlum)이다. 펜실베니아의 요크 출신이었던 그는 1814년 가족들과 함께 콜럼비아 주로 이주를 했는데, 그때 구입한 땅에서 1819년부터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유럽종으로 실험을 했지만, 병충해에 번번히 무너지자, 새롭게 재배한 품종이 바로 알렉산더(Alexander)였다. 애들럼은 알렉산더로 만든 와인을 토마스 제퍼슨에게 보냈고, 제퍼슨은 그의 와인을 부르고뉴의 샹베르땡에 비견하면서 칭찬을 했다고 한다. 애들럼은 또 다른 토착 품종인 카토바(Catawba)로도 와인을 만들었고, ‘토카이’라는 이름을 붙여 제퍼슨에게 보냈지만 그 와인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 못했다.

미션 포도 / 사진 출처: wikimedia

한편, 미서부의 와인 산업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유럽에서 물 건너온 이민자들이 비티스 비니페라로 와인을 만들기 위해 절치부심했던 동부와 달리, 서부는 스페인 출신의 선교사들이 ‘미션(Mission)’이라고 알려진 비티스 비니페라의 변종으로 와인을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사실 미션은 스페인이 원산지인 비티스 비니페라지만, 이 당시 선교사들에 의해 재배된 것은 오리지널 버전이라 하기 어렵다. 미션은 16세기 전부터 지금의 멕시코 시티 근방에서 재배되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토착화 되었기 때문에 변종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 여하튼 지금의 캘리포니아 지역에 미션이 소개된 것은 18세기 후반 프란시스칸 선교사들에 의해서였고, 재배를 한 최초의 인물은 캘리포니아 와인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쥬니페로 세라(Junipero Serra)로 알려져 있다.

쥬니페로 세라 / 사진 출처: wikimedia

그렇게 초기 캘리포니아 와인 생산은 선교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종교의식에 쓰고 남은 와인은 인근 시장에서 판매되거나 남미로 수출되었다고 한다. 당시 선교원 전체의 와인 생산량은 알 수 없지만, LA 인근의 산 가브리엘 선교원의 경우 19세기 초 한 해 약 35,000갤런의 와인을 생산했다고 전해진다. 적지 않은 양이다. 이렇게 LA를 중심으로 성장하던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은 1833년 선교원 소유의 포도밭을 민영화하겠다는 멕시코 정부의 발표로 사양길을 걷게 되었고 19세기 중반 자취를 감추었다. 참고로 LA는 1848년 미국-멕시코 전쟁 이전에는 멕시코 영토였다. 하지만 선교원의 포도밭이 황무지로 변해가던 시기부터 와인을 상업용으로 생산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이어졌었기 때문에 와인 산업은 무너지지 않고 명맥을 유지했다.

장 루이 비녜 / 사진 출처: www.jstor.org

미서부에서 최초의 상업용 양조장을 설립한 사람은 장 루이 비녜(Jean-Louis Vigne)다. 비녜 가문은 보르도에서 대대로 오크통을 만드는 장인이었다. 당시 많은 이들이 그랬듯 집에서 마실 와인을 위해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와인과 함께 커 온 그는 포도 재배와 와인 메이킹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장 루이 비녜는 재정적 그리고 정치적 문제로 1826년 11월 가족들을 데리고 보르도 항을 떠나는 코멧(Comet) 호에 승선했다. 긴 항해 끝에 1827년 7월 하와이에서 새로운 터전을 꾸렸다. 그는 작은 땅을 구매해서 사탕수수, 포도나무를 재배하고 몇 가지 가축을 기르는가 하면, 1826년에는 럼 공장의 매니저로 취직을 했다. 하지만 하와이의 카후마누 여왕이 럼 판매를 금지하면서 공장이 폐쇄되었고 사탕수수밭도 파괴된다. 이 일을 계기로 장 루이 비녜 가족은 재이주를 결심하게 되고 1831년 마침내 LA에 도착했다.

엘 알리소 포도밭의 모습 / 사진 출처: www.peachridgeglass.com

LA에서 약 104에이커에 달하는 땅을 구매한 그는 곧바로 포도밭을 조성했고 엘 알리소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그가 포도밭을 조성할 시기에는 미션으로 만든 선교회 와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는 미션 와인의 품질에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또한 미션을 주로 재배하기는 했지만, 직접 보르도에서 카베르네 프랑과 소비뇽 블랑을 수입, 재배해서 실험을 진행하기도 했다. 1840년에는 LA 와인을 캘리포니아의 다른 지역으로 수출하는 쾌거를 이루었고, 2년 후에는 산타 바바라와 몬터레이로 정기적인 납품을 시작했다. 1849년 엘 알리소는 캘리포니아 전체에서 가장 비싼 포도밭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장 루이 비녜는 40,000그루의 포도나무를 관리하면서 매년 150,000병의 와인을 만들었다. 1855년 그는 엘 알리소를 그의 조카인 피에르 생스뱅(Pierre Sainsevin)과 장 루이 생스뱅에서 40,000달러에 매각했는데, 그 당시 캘리포니아의 부동산 거래로는 최고액이었다고 한다.

생스뱅 형제의 와인 레이블 / 사진 출처: www.peachridgeglass.com

LA에는 비녜의 뒤를 이어 여러 와인 생산자들이 등장했고, 1850년경 도시를 중심으로 와인 산업 지대가 형성이 됐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LA의 인구가 겨우 2,000명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즉, 이곳에 조성된 와인 산업은 LA의 와인 소비자들이 타깃이라기보다 다른 지역으로의 수출이 목적이었다. 여기서 새로운 이름이 등장한다. 바로 독일 출신의 뮤지션이 설립한 콜러와 프롤링(Kohler & Frohling)이다. 비녜의 조카들이 설립한 생스뱅은 스파클링 와인 산업에 손을 대면서 몰락했지만, 콜러와 프롤링은 새로운 품종을 본격적으로 도입해서 와인을 만들고, 1860년부터 미동부 뉴욕과 보스턴에 대리점을 두는 등 성공 가도를 달렸다. 참고로 콜러와 프롤링은 금주법으로 말미암아 사라진 비운의 회사다.

골드러시 / 사진 출처: wikimedia

캘리포니아 와인 붐은 북으로 이어졌고 1850년에는 나파 밸리와 소노마까지 포도 재배가 확산됐다. 이 기세에 힘을 더한 것이 있는데, 바로 골드러시다. 골드러시는 당시 캘리포니아의 콜로마 지역의 셔텨스 제재소(Sutter’s Mill)에서 제임스 W. 마셜이 1848년 1월 24일 금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일파만파로 퍼지면서 미국 내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무려 30만 명이 유입된 사건이다. 여담이지만 골드러시로 인해 현 미 달러로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금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다만 이로 인한 부의 축적은 극소수에게 돌아갔고, 많은 이들은 왔을 때와 다를 바 없는 상태로 돌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골드러시의 영향은 상당한 결과를 낳았다. 허름한 개척지에 불과했던 샌프란시스코는 대도시로 성장했다. 또한 법체계와 정부가 창설되어 1850년 미국의 31번째 주로 지정되었다.

1846년 경의 샌 프란시스코의 모습 / 사진 출처: wikimedia

골드러시에 덕분에 산타 바바라의 경우, 1855년 3만 개이던 포도밭이 1856년에는 15만 개, 1857년에는 50만 개로 늘어났다. 짐작할 수 있겠지만, 새로운 포도밭의 주인들은 대부분 와인 생산 경험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와인 산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위원회를 결성했고, 이들로 하여금 영세업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한편, 와인 품질을 향상시키는 방법을 연구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 위원회의 일원 중 한 명이 바로 캘리포니아 와인의 대부라 일컬어지는 아고스톤 하라즈시(Agoston Haraszthy)다.

아고스톤 하라즈시 / 사진 출처: wikimedia

헝가리 태생의 하라즈시는 기회의 땅인 미국으로 일찌감치 이주해서 위스콘신에서 살다가 골드러시 때문에 캘리포니아로 온 인물이다. 캘리포니아에서도 여러 곳을 전전하다 최종적으로는 소노마에 정착해서 와이너리를 설립했는데 바로 부에나 비스타(Buena Vista)다. 하라즈시는 이 와이너리로 일시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와이너리를 확장하는데 너무 많은 돈을 끌어들였고, 엎친 데 겹친 격으로 필록세라가 창궐하면서 와이너리를 떠나게 된다. 이후 그는 니카과라에서 럼을 미국으로 수출할 계획으로 사탕수수 사업을 벌였는데, 어느 날 실종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물에 쓸려 갔다는 이야기와 악어에게 먹혔다는 등 여러 설이 있지만, 결국 밝혀진 것은 없었고 시신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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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쟁이부부

선후배 사이였던 와인 매거진 기자 출신 남자, 소믈리에 출신 여자. 살아오며 경험한 와인의 절반을 함께 마셨고, 앞으로 만나게될 와인들은 항상 같이 마시게 될 동반자 관계. 평소엔 식당 주인, 때론 여행작가, 이따금 와인 강사, 이곳에선 와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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