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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탄생 (20부)

20. 와인의 산업화 4 – 샤또와 샴페인

1855 그랑 크뤼 클라세가 창조된 이 시기에 와인 업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한 대표적인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와이너리 이름 앞에 ‘샤또(Chateau/成) 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한 것. 물론 시작은 보르도다. 예를 들어 18세기에 단순히 마고, 오브리옹이라고 불렸던 와인의 이름이 19세기로 접어들어 샤또 마고, 샤또 오브리옹으로 바뀌게 된다. 참고로 1789년 석판 인쇄술의 발명으로 말미암아 와인 레이블의 역사 또한 산업화에 접어들었고, ‘샤또’의 등장이 이와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은 듯하다. 왜냐면 레이블에 일일이 샤또의 모습을 손으로 그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샤또를 붙이기에 무리가 없는 진정한 샤또, 마고 / 사진 제공: 배두환

여하튼 보르도의 유명 와이너리에는 대개 성이 있었기 때문에, 샤또라는 단어를 붙여서 안 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유행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1800년대 후반부터였다. 지난번에도 소개했던 영국의 와인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였던 사이러스 레딩(Cyrus Redding)은 당시 조사한 내용을 1850년 책으로 출간했는데, 그에 따르면 1800년대 초 보르도 1등급 와인들 중 샤또가 붙은 와인은 마고 뿐이라고 했다. 이후 1855 그랑 크뤼 클라세가 만들어졌을 때 샤또가 붙은 와인은 다섯 개뿐이었으며, 1870년 영국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오브리옹, 라피트, 라투르, 마고에만 샤또가 쓰였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는 그랑 크뤼 클라세의 모든 와이너리 앞에 샤또라는 단어가 붙었다.

이 정도 규모라면 샤또를 붙이기에 무리가 없지 않을까 / 사진 제공: 배두환

사실 샤또가 붙은 수많은 와이너리들의 경우 실제로 그 ‘성’이 작은 건물에 불과한 경우가 더 많지만, 이 같은 유행은 성을 둘러싼 포도밭에서 생산된 와인을 그렇지 않은 일반 와인과 구별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샤또라는 명칭을 붙이게 되면 그 와인이 마치 역사가 오래된 귀족 가문이 만든 와인인 듯한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에 생산자들은 이 단어를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의 ‘귀족’에 대한 집착은 당시 소테른 지역의 스위트 와인을 생산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인 보트리스트 시네레아가 ‘Noble Rot(귀족적인 곰팡이)’이라는 별칭으로 불린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곰팡이지만 귀족이라는 칭호가 붙은 보트리티스 시네레아 / 사진 제공: 배두환

여기서 사실을 들여다보면, 18세기부터 보르도의 포도밭을 차지한 이들은 명망 높은 귀족이 아닌, 대부분 신흥 귀족이었다. 물론 대혁명 이후 나폴레옹으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혹은 그 이전부터 귀족이었던 전통적인 가문도 있었으나, 그 외에는 귀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게다가 귀족이든 평민이든 대부분의 샤또는 포도밭과 와이너리를 상업적인 수단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1836년 샤또 마고의 주인이 된 라 마리스마 후작(Marquis de las Marismas)은 파리의 은행가였다. 오브리옹 또한 1836년 새로이 바뀐 주인은 파리의 은행가였다. 은행가들은 19세기 중반 메독의 유명 와이너리를 사들일 때 이윤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 샤또는 세계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단어다. / 사진 제공: 배두환

샤또 수식어는 보르도를 넘어 루아르 등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이윽고 유럽 전역에서 유행했다. 저 멀리 호주, 1879년 빅토리아의 타빌크(Tahblik) 와이너리의 이름도 샤또 타빌크로 바뀔 정도였다. 이후 샤또는 전 세계로 퍼져 어느 국가든 이 단어를 찾아보는 게 어렵지 않게 됐다. 와이너리 주인이 바뀌고 재배하는 품종이 달라져도 포도밭 한가운데 서 있는 건축물인 샤또는 변함이 없었다. 수백 년을 한결같이 자리를 꿋꿋하게 지킨 샤또는 전통의 상징이자, 변함없는 품질을 약속하는 징표이기도 했다.

19세기 가장 큰 성공을 거머쥔 샴페인 / 사진 제공: 배두환

19세기 들어 생산과 소비의 증가를 보인 특별한 와인은 샴페인이다. 1800년에는 한 해 생산량이 30만 병이던 샴페인이 1850년에는 2,000만 병, 1883년에는 3,600만 병으로 급격하게 늘어난 것을 보면 샴페인의 성장세가 이 당시 얼마나 무서웠는지 추측할 수 있다. 수출량도 급격히 늘어났다. 17세기 이후 샴페인의 최대 시장은 영국이었지만, 후에 미국으로 바뀌었다. 예를 들어 유명 샴페인 하우스인 G.H.Mumm에서 1877년 동안 대서양을 건너 미대륙에 수출된 샴페인은 42만 병이었지만, 25년 뒤에는 거의 4배인 150만 병을 기록했다고 한다.

샴페인 메이킹의 꽃, 지하 셀러에서의 2차 병 발효 / 사진 제공: 배두환

샴페인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메이킹에서도 큰 변화를 겪었다. 샴페인 메이킹의 꽃은 두 가지인데, 하나가 블렌딩이며 나머지가 2차 병 발효 숙성이다. 특히 2차 병 발효 숙성이야말로 샴페인이 샴페인다워지기 위한 필수 과정으로, 과거에는 병 발효를 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첫 번째, 발효 과정에서 생기는 이산화탄소의 압력 때문에 병이 터지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샴페인의 기압은 6기압으로 트럭의 타이어와 맞먹는다. 지금처럼 두껍고 펀트가 깊이 파인 샴페인 병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병이 터지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두꺼운 병과 코르크의 발명은 샴페인 산업을 급성장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다. / 사진 제공: 배두환

두 번째 문제는 병 발효가 끝난 시점에서 병 내부에 생긴 효모 찌꺼기를 어떻게 처리하는가였다. 19세기 초반에는 병 발효가 끝난 와인을 가볍게 필터링해서 다시 병입을 했는데, 당연히 이 과정에서 손실되는 기포가 너무 많았다. 그러다 19세기 초반, 지금의 뵈브 클리코라고 알려져 있는, 젊은 미망인 니콜 바르브 클리코 퐁사르댕(Nicole-barbe Clicqout-Ponsardin)이 운영하던 샴페인 하우스에서 리들링(Riddling) 기법(불어로는 르뮈아쥬 Remuage)을 최초로 개발하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리들링이란 2차 병 발효를 하는 기간 동안 샴페인 병을 회전시키면서 이스트 찌꺼기를 병 목 근처로 모으는 것을 말한다. 이를 위해 개발된 A자형 나무틀을 퓌프트르(Pupitre)라고 부른다. 병목으로 모인 찌꺼기는 단단하게 굳었고, 마개를 여는 순간 압력으로 인해 밖으로 튀어나오기 때문에 와인 자체를 걸러 내는 방법보다 손실되는 기포의 양이 매우 적었다.

퓌피트르에서 숙성 중인 샴페인들 / 사진 제공: 배두환

뵈브 클리코는 이를 한동안 비밀에 부쳤다고 한다. 하지만 1820년대부터 다른 샴페인 하우스에서도 같은 기술을 사용하면서 리들링 기법은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이렇게 리들링 기법이 개발되고, 유리병의 강도가 점차 개선되면서 샴페인 산업은 고속 성장한다. 1820년 이전에는 뵈브 클리코, 하이드직, 모엣 샹동, 페리에 주에, 루이 로드레, 때땡저까지 6곳에 불과했던 샴페인 하우스가 1820년대에는 조셉 페리에, 멈, 볼랭저가 추가되었고, 이후 30년 동안에는 수많은 샴페인 하우스가 생기면서 산업이라는 표현을 붙이기에 손색이 없게 되었다.

샴페인 하우스 1세대인 때땡저 / 사진 제공: 배두환

재미있는 사실은 샹파뉴 지방의 와인 역사는 수 세기에 걸쳐 발전되어 왔지만, 기포가 있는 샴페인의 역사는 매우 짧다는 점이다. 현재 시점으로 생각해도 불과 300년이 채 되지 않았다. 때문에 19세기에 급격한 성장을 이룬 유명 샴페인 하우스들은 그들의 브랜드 이미지에 ‘전통’이라는 색을 덧씌우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리고 기회는 이상한 곳에서 찾아왔다. 바로 ‘동 페리뇽(Dom Perignon)’이다. 19세기 샴페인 업계는 1668년부터 1715년까지 에페르네 인근 오비예 수도원에서 수도사로 지냈던 동 페리뇽의 이야기를 퍼뜨려 샴페인의 역사를 창조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동 페리뇽은 수도원의 와인 생산에 깊게 관여하면서 특히 가지치기와 와인 블렌딩 분야에 공헌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코르크 마개와 강화 유리병을 도입해 샴페인 메이킹을 발전시켰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다만 이를 증명할 증거가 없고,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샴페인을 발명한 인물이 아닌 것만큼은 확실하다.

동 페리뇽 / 사진 출처: wikimedia

샴페인의 ‘2차 병 발효’는 기온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인간이 개입해서 일부러 발명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1821년 오비예 수도원의 수도사로 있던 동 그로사르(Dom Grossard)는 페리뇽을 샴페인의 발명가로 추대했다. 페리뇽의 업적을 과대평가한 그의 기록은 페리뇽뿐만 아니라 오빌레르 수도원의 위상을 높이는 데 이바지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로사르가 원하던 상황이었을 것이다. 19세기 후반이 되자 기록은 사실로 굳어졌고, 페리뇽은 샴페인의 아버지로 이름을 떨치게 됐다. 이야기는 점차 윤색이 됐고, 심지어 페리뇽이 장님이었고 후각과 미각이 발달해서 그의 블렌딩 솜씨를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고 미화되기도 했다.

샴페인은 화려한 레이블과 포스터로 눈에 띄는 마케팅을 꾸준히 지속하고 있다. / 사진 제공: 배두환

기회를 잡은 샴페인 업계는 페리뇽의 이야기를 퍼뜨리는 데 민첩한 움직임을 보였다. 페리뇽의 신화와 같은 이야기에서 역사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페리뇽이 샴페인을 처음 맛보았을 때 “별을 마시는 기분이다”라고 감탄했다고 하는 대목은 샴페인이 결혼식, 세례식, 취임식 등 신성한 자리에 쓰이는 것과 연관을 짓기 매우 훌륭한 예시였다. 이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1937년 모엣 샹동은 동 페리뇽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프리미엄 샴페인을 선보였고, 100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샴페인 브랜드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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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쟁이부부

선후배 사이였던 와인 매거진 기자 출신 남자, 소믈리에 출신 여자. 살아오며 경험한 와인의 절반을 함께 마셨고, 앞으로 만나게될 와인들은 항상 같이 마시게 될 동반자 관계. 평소엔 식당 주인, 때론 여행작가, 이따금 와인 강사, 이곳에선 와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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