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와인의 혁명 3 – 오브리옹의 등장
가히 와인의 최대 혁명이라 할 수 있는 와인 병의 발전과 코르크의 재발견은 체계적인 와인 감별법 또한 발전시켰다.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당시 와인 애호가라 불렸던 이들은 이제 먼 지역에서 만들어진 다채로운 와인들을 변질되지 않은 신선한 상태로 맛볼 수 있게 되었고, 이를 체계적으로 구분하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돌이켜보면 와인 병의 등장 이전에 와인이란 ‘지역 단위 급’으로 판매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보르도나, 남서부 혹은 루아르, 부르고뉴 같은 큰 지역으로만 와인이 구분되었지, 마을 단위로는 유통되지 않았다. 심지어 같은 지방이라도 생산자가 다르면 와인 맛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즉 와인이란 그냥 또 다른 술의 종류 하나로 인식되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지역마다, 마을마다 혹은 생산자마다의 개성이 몰수되던 시대에 와인을 통째로 구매해서 소비자들에게 유통시키던 일종의 네고시앙들은 포도 품종은 물론이요, 생산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와인을 섞어서 자기 입맛대로 만드는 것이 관행이었다. 실제로 당시 영국 시장에서 판매되는 대부분의 와인들은 네고시앙이 만들어낸 블렌딩(품종 및 지역까지 섞어버린) 와인이었다. 말만 와인이었지 그 안에 어떤 포도가 혹은 첨가물이 들어갔는지 소비자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이와 같은 혼란한 시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름이 있으니, 바로 아르노 드 퐁탁(Arnaud de Pontac)이다. 그는 바로 현시대 최고의 와이너리라 일컬어지는 샤또 오브리옹을 최초로 세계적인 와이너리로 끌어 올린 장본인이다. 우선 오브리옹의 역사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자. 오브리옹은 장 드 퐁탁(Jean de Pontac)이라는 인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무려 101살까지 장수하면서 세 번 결혼을 했는데, 1525년 결혼한 첫 번째 아내 잔느 드 벨롱(Jeanne de Bellon)이 ‘오브리옹’이라 불리는 자갈 토양의 언덕을 결혼 지참금으로 가져온 것이 와이너리의 시초다. 오브리옹의 주인이 된 장은 계속해서 땅을 늘려가면서 포도를 심고, 포도밭 한가운데 와인 제조를 주도하는 건물을 지었는데, 바로 이것이 ‘샤또’라는 단어의 기원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장의 후예였던 아르노 드 퐁탁이 등장한다. 본래 퐁탁 가문은 보르도 최고 법원을 이끄는 귀족이었고, 17세기 중반 무렵 오브리옹이 소유한 포도밭의 면적은 무려 380,000평방미터에 달했다고 한다. 가문의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은 아르노는 자신이 직접 만든 와인이 다른 것들과 차별화되기를 원했다. 그는 좋은 포도만 골라서 와인을 빚거나, 한 번 사용한 통을 재활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와인의 질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었다. 그리고 와인에 레이블을 달고 포도 품종과 생산지를 분명히 밝히기 시작했다.
특히, 그의 영특함이 더 빛났던 분야는 바로 마케팅이었다. 그는 주 무대인 그라브의 포도밭에서 생산된 와인에는 ‘오브리옹’이라는 이름을, 그 외 지방에서 생산된 와인에는 ‘퐁탁’을 써서 차별화된 레이블을 만들었고, 이들로 고급 제품에 민감한 런던의 와인 시장을 공략했다. 이때 아르노는 자신이 오브리옹을 만든 노력에 대한 가치를 높게 매겨 와인을 비싸게 팔았고 수량을 한정했다. 이런 고급화 전략은 단숨에 런던 시장을 매료시켰고 그에게 엄청난 명예와 성공을 부여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와인 한 병 값으로 다른 고급 레드 와인 세 병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아르노의 이 기발한 아이디어는 당시 영국의 정세와도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17세기 말 영국에서는 청교도적인 공화제가 막을 내리고 군주제가 도입되면서 사회적인 분위기가 자유로웠고, 덕분에 술의 소비도 증가했다. 거기다 영국 사교계에서 오랫동안 인기를 끌었던 가볍고 밝은 클라레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자연스럽게 향과 맛이 풍부한 와인들을 찾던 과도기에 오브리옹이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다. 당시 런더너들은 프랑스식 발음인 ‘Haut-Brion’을 영어식으로 ‘호브라이언 Ho-Bryan’이라 부르며 그 품질을 극찬했다. 심지어 그는 1666년 런던에 ‘퐁탁스 헤드’라는 레스토랑을 오픈해서 그의 와인과 음식을 팔았다고 한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후 미국 3대 대통령이자 열렬한 와인 애호가였던 토머스 제퍼슨은 오브리옹이 얼마나 맛있는지 글을 쓰고, 오브리옹에서 버지니아로 선적된 와인 여섯 상자를 한꺼번에 구입하기도 했다.
이 시대에 와인과 관련해서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긴 사람은 영국인이었던 사무엘 피프스(Samuel Pepys)였다. 그는 영국 해군 행정관이자 상원 의원이었는데, 정치인으로서 이름을 알리기보다, 그가 남긴 일기 때문에 사후에 유명해졌다. 그는 1660년에서 1669년까지 약 10년 동안 일기를 썼다고 한다. 단순한 일기가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것은 이전의 일기들이 지극히 공적이었던 것과 비교해, 사무엘의 일기는 매우 사적인 여성 관계나 타인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무엘은 당시에 주로 사용된 속기 문자와 외국어를 결합한 암호로 일기를 썼다. 그의 사후 장장 3년에 걸친 해독 결과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은밀한 사생활을 포함한 그의 생활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19세기에는 (무려) 작품으로 출판되기까지 했다. 남의 사생활이 궁금했다기보다 그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더 큰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그는 엄청난 와인 애호가였다고 한다. 보르도의 클라레부터 스페인, 독일 와인부터 시작해 다채로운 술이 일기에 등장하는데, 물론 오브리옹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그는 “로열 오크 태번에서 ‘호브라이언’이라는 프랑스 와인을 마셨는데, 지금껏 마셔 본 와인 중 가장 독특한 맛이었다”고 기록했다.
지금까지 와인의 혁명이라는 주제로 와인병, 코르크, 코르크 스크루, 와인의 감별법의 등장까지 살펴봤는데, 아직 끝이 아니다. 바로 와인 잔의 발전도 와인의 혁명에 속한다. 사실 와인 잔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만들어졌지만 매우 소수만이 소유할 수 있는 럭셔리 아이템이었고, 중세-근대에도 마찬가지로 사치품에 속했다. 이때는 대개 컵이나, 은, 토기, 나무, 가죽에 와인을 담아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17세기부터 기록에 유리잔의 등장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는 유리병의 발전처럼 기술의 발달로 인해 유리잔의 가격이 싸졌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베네치아의 무라노 섬이 있었지만, 무라노의 유리 공예가들의 유리잔은 희소성 때문에 가격이 비싸서 유럽의 상류층 사이에서 거래가 되었다. 이후 영국에서 대중화된 유리잔은 대중에게 널리 보급이 되었지만, 지금처럼 손잡이가 있고 향을 모으기 위해 둥그런 스타일은 매우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1670년 루이 14세가 건설한 부상병 간호 시설인 앵발리드(Les Invalides)에서의 와인 쓰임새도 매우 흥미롭다. 루이 14세는 매년 앵발리드에서 치료 목적으로 사용하는 와인 55,000리터에 세금을 면제해 줬다고 한다. 부상병들에게 지급되는 와인의 양은 꾸준히 증가했고, 1705년에 세금 면제 혜택을 받는 와인이 무려 800,000리터에 달했다고 한다. 이처럼 근대 초기의 의학자들은 와인을 영양소를 공급받는 식품이자 기초 의약품으로 간주했다. 심지어 계층에 따라 마셔야 하는 와인의 종류를 구분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근대 초기의 와인은 일상적으로 즐기는 일반 대중에서 분리된, 심미적인 면을 강조하는 전문가 집단이 나타나면서 대조를 이루기 시작했다. 소위 이 전문가 집단은 와인 세계에서 더욱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바로 전문적 와인 평론가의 등장이 예이다. 길었던 와인의 혁명에서 이제 와인의 근대화로 나아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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