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이지. 그녀와 나는 연락을 자주 하는 사이가 아니다. 둘의 관계에는 A(친한 남자 사람 동생)가 존재하는데, A와는 그녀도 나도 친하다. 단 하나의 사전 지식을 소환시킨 후 통화를 시작했다. 그녀는 A와의 현재 상황을 서론 없이 본론만으로 담백하게 토해내곤, 그의 근황을 물었다. 순식간에 이 둘이 연인 사이고, A의 소재까지 들었다. 스콜처럼 쏟아지는 사연을 수비할 틈도 없이 난 그녀가 원하는 정보를 던져줘야 하는 상황까지 왔다. 왜 A는 런던에 간다는 걸 그녀에게 숨겼을까. 지금 중요한 건 내 이해보다 그녀의 이해였다. 그녀는 내가 런던에 사는 줄 알았단다. 뭐 가끔 벌어지는 해프닝인데, 아직도 아일랜드와 영국을 서울과 부산 간격으로 생각하는 이가 많다. 이 사실을 성급하게 그녀의 말 사이로 밀어 넣었더니 그녀의 입은 꿀 먹은 듯 닫혔다. 게다가 난 여행 중이라는 말까지 연이어 던지니, 오히려 미안해졌다. 다시 그녀에게 제안했다. 내 여행의 종반에 런던을 욱여넣고 더블린에 복귀하겠다고. 꼭 그럴 필요까지 없다는 그녀지만, 드디어 나에게 찾아온 여행의 변수라는 긍정의 힘이 유발, 강행했다. 철저히 사전 계획에 움직이는 내 여행에 불어든 신선함. 체코에서 런던행 비행기 티켓을 검색해보니, 프라하가 아닌 브르노 지역에서 출발하는 비행기 노선이 비교 타당한 조건으로 간택되었다. 즉흥적으로 끊은 티켓치고는 가성비도 훌륭했다. 그렇게 난 브르노에 와 있다.
혼자 끼니를 떼우러 들어가는 식당에서는 온전히 자주적으로 움직이지만, 무리 지어 방문할 경우, 나는 일선에서 물러선다. 착석한 후, 내 손에서 스쳐 지나간 메뉴판은 타인에게 양도한다. 이윽고 누군가의 주도권에 선택된 음식이 나오면, 이때부터 자기 주도적인 탐색이 시작된다. 이 레스토랑의 분위기부터 요리의 신상까지. 맑은 하늘 아래의 도시 브르노. 하루 동안의 여행이지만 허투루 보낼 수 없다. 근처에 보이는 카페에 앉아 도시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몰랐는데, 체코의 제2 도시라고 한다. 체코 남서부에 있는 호젓한 시골이라 생각했던 건 나의 오산이었다. 지정학적으로도 좋은 위치인 게, 주변 관광도시와 인접해 있다. 자동차로 프라하는 2시간, 오스트리아 빈은 1시간 30분, 헝가리 부다페스트는 3시간이면 충분하다. 런던행 비행기도 생각보다 많았다. 자꾸 이 도시에 빠져들고 있다.
브로노는 ‘언덕의 도시’라는 뜻의 캘트어 브린(Brynn)이 그 뿌리다. 캘트어란 말에 친근감이 올라온다. 아일랜드에서 지냈던 나였기에. 왜 언덕의 도시인지 아는 방법은 돌아보면 된다. 도시 전체를 레일 따라 움직이는 빨간색 트램, 말이 직접 끌고 다니는 마차, 내 선택은 충분한 시간과 여유가 보장된 걷기였다. 생각지도 않은 도시의 여행이다 보니, 큰 계획 없이 의식이 지도하는대로 걷고 싶었다. 하루 여행이라 이런 허술함이 오히려 여행의 팁을 준 게 아닐까 싶다. 시작점은 트램의 노선이 어지럽게 그어진 큰 대로 한복판이다. 서울로 치면 서울역 앞 광장 같은 곳에서 메인 도로라고 말하는 마사리코바 거리(Masarykova St.)의 초입부로 들어갔다. 그 길의 양옆은 각종 프랜차이즈 매장과 백화점, 여행객과 주민들이 섞여서 메인 도로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언덕의 도시답게 마사리코바 거리의 경사가 제법 있다. 특별한 호기심 없이 걷다가 여느 도시와 같은 광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시장 광장의 노점상들은 아침 일찍 문을 열어 갖가지 신선한 과일들과 채소, 손수 장만한 커피와 간식, 아이스크림 등으로 속을 채운 원뿔형의 체코의 전통 빵 ‘뜨르들로’, 겹겹이 크림을 바르고 꿀과 호두를 곁들인 카스텔라 케이크 ‘메도브닉’ 등을 준비하고 있다. 광장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은 더 먼 과거의 지하와, 더 가까운 현재의 박물관으로 연결된다. 광장의 지하에 있는 고대의 미로는 끝을 알 수 없는 길로 이어져 있어 허둥지둥 지나치게 된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열리는 시장은 브르노 뒤쪽 광장에 있다. 겨울시즌에는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대체된다.
시장 광장을 시작하여 구시가지로 가는 길은 자유 광장으로 이어진다. 광장에서 광장으로 이어지는 골목에 접어드는 곳에서는 매주 일요일 옛 시청사 옥상 첨탑에서 울려 퍼지는 환영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그 아쉬움을 다른 장면에서 만회하였다. 자유 광장에서는 브로노 와인 축제가 한창이었다. 포도 향이 광장 전체를 뒤덮고 있는데, 노다지를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체코는 맥주의 나라로만 알고 있었지, 여기서 와인을 보리란 상상은 하지도 않았다. 각종 부스에서 시음하면서, 덜 바쁜 곳의 사장님들께 이 이야기를 하니, 오히려 놀라면서 체코 이 지역이 예전부터 유명한 와인 생산지였다며 그 이유를 설명해주셨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가격이다. 약 1.5리터 되는 페트병에 든 와인이 우리 돈으로 만원 언저리였다. 혼자 돌아보는 거라 한 잔씩 시음하고 사서 마시긴 했는데, 같이 마실 동료가 없어서 너무 아쉬웠다. 무대 한쪽에서는 취기가 오른 방문객들의 흥을 채워줄 공연도 한창이었다.
와인도 술이라고 은근 취한다. 언제 브르노에 다시 와서 마셔보겠냐며, 종류별로 마시고 나니 화장실도 급하고, 정신도 차려야 했다. 왜냐하면, 난 저녁에 비행기를 타고 런던으로 날아가야 하기에. 트램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유명한 세인트 벤츠 스라스 대성당이 나온다. 3개의 뾰족한 첨탑의 높이가 100m나 된다는 이 성당은 멀리서도 눈에 잘 띈다. 네오고딕 양식이라는데 너무 높아 카메라의 뷰바인더를 넘어선다. 성당 안에는 이곳을 방문한 마더 테레사 수녀의 사진도 보인다. 성당 안의 기운을 받고자 텅 빈 좌석 한 곳에 내 육신을 내려놓았다. 몸속으로 천천히 들어오는 온기가 날 흔드는 이곳의 영혼인지, 저절로 숙연하게 몸이 움직인다. 고개를 숙이고 눈이 감기며 신성한 의식이 시작되는 건 절대 아니다. 성당의 기운이 아닌 와인의 취기다. 얼른 일어나서 공항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브르노에서의 한나절, 주전 선수 없이 치르는 A매치처럼 허둥지둥하다가 떠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곱씹어보면, 우연 같은 일들이 짧은 시간 안에 벌어졌다. 여행은 항상 아쉬움을 남기지만, 아쉬움을 제외하면 보람과 성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