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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가 내게 와 꽂혔다. 싸늘하다, 폴란드

영하 15도. 비행기가 폴란드에 거의 도착할 무렵, 구름을 헤치고 보이는 폴란드 바르샤바의 전경은 온통 백옥 같다. 동유럽의 동장군을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막상 밖을 나서려니 비행기 밖의 찬 공기가 두려웠다. 살을 에는 추위. 몸에 열이 많은 나도 이 추위에 여행은 무리다 싶었다. 마치 신고식이라 말하듯이, 공항 밖의 칼바람은 매서웠다. 폴란드 여행의 복선이었나. 얼른 뜨거운 보드카로 몸을 진정시키고, 추위에 대응하는 여행 계획을 세우는 게 급선무였다.

비행기 안에서 보는 폴란드의 겨울 전경

오후 2시부터 해가 지기 시작하는 1월. 아침에 바르샤바 공항에 도착했으나, 숙소에 도착해서 이른 저녁을 맞이해야 했다. 흐린 날씨 때문에 하늘이 더 어두워 보였다. 생각보다 춥고 어두워서 계획했던 야외 활동을 대폭 축소해야 했다. 그래도 이왕에 밟은 땅이니 구시가지까지 가보기로 했다. 부실한 외투를 대신하여 추위를 견디고자 폴란드의 보드카인 ‘스피리투스 렉티피코와니’ (Spirytus Rektyfikowany, 보통 스피리터스라고 불림)를 꺼냈다. 외관상 우리 소주인 참이슬과 닮았지만, 알코올 도수를 보면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후 2시가 막 지난 것치고 어두운 폴란드 바르샤바 시내

소주는 우리나라의 대표 술 중의 하나이다. 부끄럽지만, 시중에서 주로 판매되는 소주는 전통 소주가 아니라 주정에 물을 섞어 감미료로 맛을 낸 희석식 소주다. 여기서 희석식 소주의 기본이 되는 주정은 알코올 도수가 95%이다. 지금 소개하는 폴란드의 스피리터스는 우리나라 주정과 같은 95%의 보드카다. 스피리터스 렉티피코와니라는 말 자체가 정류 주정(용액을 증류하여 성분을 분리한 에틸알코올-편집자)이라는 뜻이다. 현재 시판되는 가장 높은 도수의 술이다. 예전에 검색했을 땐 96%였는데, 1% 순해진(?) 듯하다. 예전에는 98%에 달하는 에스토니아산 보드카인 에스토니안 리큐어 모노폴리(Estonian Liquor Monopoly)가 가장 도수가 높은 술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으나, 현재 생산되고 있지는 않다. 스피리터스는 70번 이상 증류를 거친 후에 뽑아낸 술이니, 생각만 해도 아찔한 독주다. 바르샤바에 도착한 후 들뜬 마음에 신기한 이 보드카를 100mL짜리로 샀다. 내가 폴란드에 온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이놈이다.

폴란드 시내에서 구입한 스피리터스 보드카

95%. 과연 마시고 살 수 있을까. 술꾼인 나도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술 앞에서는 작아졌다. 일단 뚜껑을 열고 향을 맡아봤는데, 강력한 창끝이 콧속을 쏘듯 찔러댄다. 입에 차마 갖다 대지 못하던 순간, 호스텔 투숙객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인사했다. 체코에서 왔다는 그 친구에게 스피리터스를 임상 실험하기로 했다. 그는 자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마시더니(아니 ‘입에 대더니’라는 표현이 맞겠다) 혀가 마비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호기심에 나도 입술만 갖다 댔는데, 리트머스 종이가 용액에 젖듯 알코올이 빠른 속도로 몸속에 전도됐다. 이를 본 호스텔 직원이 폴란드 사람들도 여기에 소다수 등을 섞어서 마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몸은 후끈 달아올라 추운 날씨에 저항하기 좋은 상태가 되었다. 이 술은 결국 여행하면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에게 마셔보도록 하는 용도가 되었다. 다들 아무 생각 없이 마셨다가 펄쩍 뛰어나가곤 하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보드카 사건을 정리한 후, 숙소에서 폴란드 구시가지까지 가는 길.

숙소에서 구시가지까지 가는 길은 도보로 약 15분 정도였다. 눈이 덮인 거리지만 야경만은 따뜻했다. 크리스마스가 지났는데도 아직 시내에는 그 여운이 남아 있었다. 2차 대전으로 폴란드 도시의 85%가 파괴되었다고 들었는데,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긴 세월 동안 치밀하게 복원 사업을 진행해서 벽돌에 금이 간 것까지 복원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장갑을 벗고 촬영하는 게 귀찮긴 하지만, 맨손으로 찍고 싶은 광경이 가득했다.
나의 첫 폴란드 여행에 대한 느낌은 냉탕과 온탕을 수시로 번갈아 들어갔다 나왔다. 구시가지는 여느 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켜켜이 서 있는 건물들 안으로 정방형 광장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반듯한 얼음이 깔렸다. 롤러장 같은 조명 아래에는 몇 안 되는 여행객이 스케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넓은 공간 안에 준 프로급의 사람들과 초보자들이 부딪히지 않기 위해 각자의 구역에 선으로 영역을 표시해 두었다. 더워서 재킷을 벗어젖힌 열 많은 청년에게도, 엉덩이에 살얼음을 붙이고 다니는 어린아이에게도 추운 날씨가 더는 장애가 아닌가 보다.

바르샤바 구시가지 중앙광장

중앙광장에 마련되어 있는 야외 스케이트장

중심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호스텔. 전날 구시가지에서 채 1시간도 되지 않아 돌아왔다. 폴란드의 겨울은 우리나라의 겨울보다 맹독했다. 여행자로서의 소명의식이 약해지면서 자꾸만 일정을 간소화했다. 되도록 실내에서 할 수 있는 행위를 찾다가 마트에서 폴란드 맥주를 사 와서 시음하기로 했다. 어떤 기준도 존재하지 않고, 일단 유럽에서 들어 본 브랜드 2개, 그리고 왠지 폴란드에서만 마실 수 있을 것 같은 맥주 2개를 선택한 후 호스텔 부엌으로 향했다. 늦은 오후 시간대라 부엌을 사용하는 친구들이 없었다. 덕분에 내 마음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시음에 돌입했다. 안주로는 피에로기(Pierogi). 폴란드에서 가장 많이 먹는 음식이다.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에서 미카엘 셰프는 폴란드인인 어머니가 고국에서 즐겨 먹는 디저트라고 하며 15분 만에 피에로기를 만들어냈다. 내가 만들 요량은 없어 냉동식품으로 판매되는 피에로기를 사 왔다. 피에로기는 우리나라의 만두와 거의 비슷하다. 대신 피에로기의 반죽이 만두피보다 두꺼워서 밀가루 맛이 많이 나는 점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만두가 아니라 떡을 먹는 기분이랄까. 피에로기 안에는 고기를 비롯한 다양한 속 재료를 넣어 만들 수 있다. 폴란드 사람들은 피에로기에 과일을 잘게 썰어 넣어 디저트로 즐긴다고 한다.

폴란드 국민 음식인 피에로기

마트에서 골라온 폴란드 맥주의 짧은 시음기

Lomza podkapslowe (6.0%)

 

(1) Lomza podkapslowe (6.0%)
스타일: Imperial Pils/Strong Pale Lager
저온 숙성을 거쳤으며, 필터링 되지 않은 폴란드의 대표 맥주이다. 홉 향이 강한 편이지만, 목 넘김은 부드럽다. 또 홉 향에는 없는 단맛이 있는데, 아마도 꿀이 그 역할을 하는 듯하다.

 

 

 

 

 

 

 

Lomza export miodowe (5.7%)

 

(2) Lomza export miodowe (5.7%)

스타일: Polish Honey Beer
구운 보리를 사용하는지, 전체적으로 맛과 향이 구수하다. 그 향이 누군가에게는 거부감을 자아낼 수도 있겠다. 향이 독특하지만, 목 넘김이 부드럽다. 위의 맥주와 마찬가지로 꿀이 들어가 있으나, 이 맥주는 필터링을 거쳐서 금빛을 띤다. 개인적으로 4가지 맥주 중에 가장 끌렸다.

 

 

 

 

 

 

Specjal mocny (6.7%)

 

(3) Specjal mocny (6.7%)
스타일: Imperial Pils/Strong Pale Lager
이 맥주의 소개 문구에서 눈에 띄는 건 ‘강력한 맥주’. 사실 그렇게까지 강력하지는 않았지만, 아무 선입견 없이 마신다면 좀 센 맥주라고 인지할 것이다. 탄산도 많이 올라오며, 색은 맑은 황금색을 띤다. 도수가 좀 센 것 외에는 평범한 필스너 맥주 같았다.

 

 

 

 

 

 

Ksiazece zlote pszeniczne (4.9%)

 

(4) Ksiazece zlote pszeniczne (4.9%)
스타일: German Hefeweizen
뜻밖에 폴란드에서는 독일 스타일의 맥주가 많은데, 이 맥주도 그렇다. 특히 독일식 밀 맥주를 벤치마킹했는데, 대중의 입맛에 초점을 맞춘 듯하다. 이 맥주가 만들어진 역사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 맥주를 비롯한 3가지 종류가 2012년부터 생산되었다.

 

 

 

 

 

 

 

쉰들러 리스트(1993). 내 기억 속에 이 영화는 매우 긴 영화였다. 더군다나 무성영화여서 중학생이던 내게는 참으로 힘든 영화였다. 이후 세계사 공부도 게을리해서 신들러 리스트의 역사적 배경을 안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얼마 전 EBS에서 유대인 학살과 관련된 내용이 나오길래 끈기 있게 시청했는데, 참으로 을씨년스러웠다.
크라쿠프 시내에서 약 1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가니 아직도 피비린내가 나는 듯한 현장에 도착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폴란드어로는 ‘오슈비엥침’이라고 한다.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학살한 시체를 태웠던 소각로와 유대인을 실어 나른 철로, 고문실 등이 이곳에 남아 있다. 마침 눈이 많이 내린 때여서 그런지 마치 내가 그 당시의 당사자로 빙의된 기분이었다. 한국 사람이라면 일제의 만행이 함께 떠올라 감정이입이 쉬울 것이다.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면서 이곳에 강제수용소를 세웠다. 이 수용소는 독재자 히틀러의 명령으로 대량 학살을 위한 시설로 확대되었으며, 살해의 대상은 대부분이 유대인이었지만 폴란드 인도 적지 않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앞. 벌써 싸늘하다.

가이드를 따라 탐방하는 프로그램이 있지만, 난 혼자 정해진 동선에 따라 이동했다. 똑같은 형태의 붉은 건물이 여럿 있는데, 그 앞에는 번호가 매겨져 있다. 물론 건물마다 역할은 제각각이다. 처음에는 혼자 문을 열기조차 두려웠다. 놀이동산 귀신의 집과는 차원이 다른 공포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복도 양옆에 걸려 있는 희생자들의 사진을 보니 분노가 치밀었다. 건물을 돌아볼수록 일제 747부대의 만행이 떠올랐다. 희생자의 머리카락이 모인 공간에 들어갈 때는 분노가 최상에 다다랐다. 더 알아보니, 나치군은 희생자의 머리카락을 모아 카펫을 짰으며, 뼈를 갈아서 골분 비료로 썼다고 한다. 내 유럽여행 중 가장 많은 생각을 했던 곳이 아니었나 싶다.

수용소에 들어온 유대인들의 신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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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호

발로 기억하는 보헤미안, 혀로 즐기는 마포술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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