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중순을 막 넘기자 집 앞에 개나리가 피었다. 개나리의 통상적인 개화 시기는 4월이라고 하니, 예년보다 이르게 개화한 모양이다. 산림청에서는 식목일을 3월로 앞당기는 계획을 검토 중이다. 지구 온난화로 4월이면 이미 싹이 트고 잎이 피는데, 그 전에 나무를 심어야 잘 자란다는 것이 식목일 날짜 변경을 주장하는 이들의 목소리다.
1946년 이래 쭉 4월 5일이었던 식목일도 바꾸려는 마당에 와인 산업에 영향이 없을 리 없다. 해가 갈수록 날이 덥고 건조해지는 것은 물론, 시도 때도 없는 우박과 산불, 홍수가 포도밭을 위협하는 실정이다. 코로나라는 복병이 와인 생산과 판매에 타격을 입힌 지난해와 올해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기후 변화와 전염병은 오늘날 와인 생산의 지형도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 유럽의 와인 강국들은 10년, 20년 후에도 깐깐한 규정과 전통을 고집할 수 있을까?
기후 변화 앞에 깐깐함 내려놓은 프랑스
포도 재배와 와인 생산에 가장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변화는 역시 온난화다. 매해 태양은 점점 강하게 내리쬐고, 가뭄도 심해진다. 이처럼 기온이 높고 물이 부족해 포도의 당도가 높아지면 와인의 알코올 도수가 올라가는 데다, 와인의 캐릭터는 섬세하고 개성적인 것에서 볼드하고 천편일률적인 방향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다. 당면한 위협 앞에 AOC 등급 와인에 적용하는 프랑스의 깐깐한 규정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프랑스 지역과 품질에 대한 국립연구소(이하 INAO: Institut National de l’Origine et de la Qualité)는 각 지역의 등급 와인에 사용할 수 있는 포도 품종을 정해두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보르도에서는 카베르네 소비뇽, 카베르네 프랑, 메를로, 쁘띠 베르도, 카르메네르 그리고 말벡만을 레드 와인에 사용할 수 있었고, 보르도 화이트에는 세미용, 소비뇽 블랑, 뮈스카델만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지난 2019년 여름, INAO는 새로운 일곱 가지 품종을 목록에 더해보기로 결정했다. 보르도보다 더운 지역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온, 그러면서도 보르도 와인의 개성을 크게 해치지 않고 메인 품종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포도들로 일종의 실험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올 초 이 중 6개 품종이 최종적으로 낙점되었다. 보르도의 생산자들은 이 새로운 품종들을 밭의 5%까지 심을 수 있고, 블렌딩 비율은 10% 이하로 유지해야 한다.
레드 품종으로는 카베르네 소비뇽과 그르나슈의 교배종인 마르슬랑(Marslan), 포르투갈의 토착 품종인 투리가 나시오날(Touriga Nacional), 프랑스 남부에서 간신히 그 명맥을 이어오던 카스테(Castets), 카베르네 소비뇽과 타나의 교배종인 아리나르노아(Arinarnoa)가 선택받았다. 보르도 화이트의 새 식구로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지에서 재배되는 알바리뇨(Alvarinho), 샤르도네와 바로끄의 교배종인 릴리오릴라(Liliorila)가 이름을 올렸다. 2019년 리스트에는 포함되었던 쁘띠 망상(Petit Manseng)은 본래 이 품종으로 꾸준히 와인을 만들어온 피레네-아틀란틱 지역의 와인 생산을 보호하기 위해 제외되었다는 소식이다.
포도 품질의 유지를 위해 매우 제한적으로만 허용되던 관개(물 대기)의 범위도 넓어졌다. 프랑스에서는 2017년 9월 발표된 법령에 따라, 6월 15일부터 8월 15일까지만 가능했던 관개가 5월 1일부터 가능해졌고 땅에 파이프를 묻어 물을 대는 지하 관개도 허용되었다. 위에서 물을 뿌리면 포도나무 잎이 젖어 각종 곰팡이에 취약해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다만 수확량 증대를 위한 무분별한 물 대기를 방지하는 차원에서 관개 시설을 이용하는 포도밭의 수확량을 그렇지 않은 포도밭에 비해 낮게 제한한다.
서늘한 곳 찾아 이동하는 포도밭
포도밭의 위치는 덜 더운 곳으로 점점 이동 중이다. 매해 기온이 높아짐에 따라 북반구에서는 예전보다 북쪽에, 남반구에서는 더 남쪽에 포도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 같은 이유로 포도밭의 방향도 달라지고 있다. 일조량을 조정을 위해 북반구에서는 직접적으로 햇볕이 내리쬐는 남쪽 경사면 대신 북쪽 경사면에 포도밭을 조성하고, 남반구에서는 그 반대 방향을 택하는 추세다.
기존의 포도밭보다 높은 고도에 포도를 심는 생산자들도 하나둘 등장하고 있다. 고도가 높아진다고 최고 기온이 크게 떨어지지는 않지만, 강렬한 햇볕에 노출되는 시간이 짧아지고 밤에는 공기가 적절한 정도로 식기 때문. 특히 스페인, 아르헨티나 등지에서 해발 900~1500m 높이에 포도밭을 일구는 생산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주목받는 영국의 스파클링 와인세상 모든 와인 메이커들이 온난화로 고통받는 것은 아니다. 따뜻해진 기후 덕분에 오히려 포도와 와인의 품질이 개선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벨기에나 덴마크, 노르웨이 등 와인과는 인연이 없다고 여겨지던 유럽 북부의 국가들은 비교적 서늘한 기후에 잘 버티는 품종들로 와인을 만들고 있고, 샹파뉴와 비슷한 토양을 가졌으나 낮은 기온으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던 영국의 몇몇 지역은 샴페인과 동일한 방식으로 만든 품질 높은 스파클링 와인을 내놓으며 이목을 끌고 있다. 테탱저 등 유명 샴페인 하우스가 영국의 와이너리에 투자하는가 하면, 니팀버 이스테이트(Nyetimber Estate)를 이끄는 셰리 스프릭스는 인터내셔널 와인 챌린지에서 ‘올해의 스파클링 와인 메이커’로 뽑히기도 했다. 샹파뉴 외 지역의 스파클링 와인 메이커가 이 트로피를 거머쥔 첫 사례였다.
잊혀가던 품종이 다시금 그 가치를 증명하는 사례도 있다. 알프스 지역에서 주로 재배되었으나 80년대 이후 다른 품종으로 대체되며 멸종 위기에 놓였던 몰라르(Mollard) 품종은 늦게 싹이 터서 봄 서리의 피해를 덜 입는다는 점, 높은 기온에서 찌르는 듯한 산도가 완화되고 당도가 높아지는 특성 덕분에 변덕스러운 기후에도 안정적인 퀄리티의 와인을 탄생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손 소독제로 전락한 프랑스, 이탈리아 와인
이렇듯 최근 몇 년간 세계의 와이너리들, 와인 관련 기관들은 기후 변화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나름의 대책을 강구해왔다. 앞서 소개한 것 외에도 수확 시기를 앞당기거나 포도송이가 햇볕에 직접 노출되지 않도록 잎을 솎아내지 않는 등의 노력이 이루어지는 중이고, 갑자기 쏟아지는 우박에 해를 입은 일부 와이너리에서는 우박을 비로 바꿀 수 있는 기술을 도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난 2020년 와인 산업은 큰 타격을 입었으니, 모두 예상하듯 코로나의 영향이다.
독일 국제 와인 전시회 ‘프로바인’과 가이젠하임 대학교가 매년 발행하는 ‘프로바인 비즈니스 리포트’ 2020년 보고서에 따르면, 와인 산업에 가장 큰 위협이 무엇인지 묻는 설문에서 응답자의 78%가 Covid-19를 꼽았으며, 전체의 60%, 특히 소규모 와이너리들은 매출 감소 등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레스토랑, 바 등이 문을 닫고 관광객이 끊기면서 안정적인 판로가 막혀버렸기 때문. 소규모 대면 판매나 온라인 판매 등은 상승했지만 줄어든 매출을 상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온라인 판매를 강화하고 리스크 분산을 위해 판로를 다양화하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설비 투자나 연구는 어쩔 수 없이 위축되었다. 지난해 와인 비즈니스 전체의 80%에서 비용을 감축했고, 투자도 연기했다. 이에 따라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설비 투자나 새로운 시도 역시 당분간은 미뤄질 전망이다.
작년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팔리지 않은 와인을 증류해 손 소독제로 만들어 판매하는 진풍경도 펼쳐졌다. 매출이 줄고 남은 와인을 보관할 자리마저 부족해지자 궁여지책으로 이 같은 결정을 한 것. 프랑스의 생산자들은 프랑스 정부가 제공하는 ‘위기 증류’ 보상 제도에 따라 1리터당 1달러에 못 미치는 가격에 와인을 증류소에 보냈고, 이탈리아에서도 도합 7천만 병 정도의 와인이 손 소독제 재료로 쓰였다는 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