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던 맥주는 버드와이저였습니다. 2001년 이후 버드와이저는 형제 맥주인 버드라이트에 왕좌를 내주긴 했지만, 아직도 미국인들이 자부심을 느끼는 맥주입니다. 미국 시장에서 버드와이저니 버드라이트니 하는 집안싸움은 크게 흥미가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분야에서 싸움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바로 버드와이저라는 이름을 두고 두 나라의 맥주 양조장이 첨예하게 싸운 상표권 백년전쟁입니다. 중세의 백년전쟁은 프랑스와 영국의 싸움이었다면, 이번의 백년전쟁은 미국과 체코의 싸움입니다. 미국에 ‘맥주들의 왕’이라고 불린 버드와이저가 있다면, 체코에는 ‘왕들의 맥주’라는 별명을 가진 버드와이저가 있습니다. 두 버드와이저는 상표권을 두고 전 세계에서 싸움을 벌였고, 아직도 그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중 먼저 양조를 시작한 체코의 버드와이저부터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버드와이저는 원래 체코의 지역 맥주,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
체코는 대단히 맥주를 사랑하는 나라입니다. 맥주의 전체 소비량은 인구가 많은 중국이나 미국이 1, 2위를 다투지만, 1인당 맥주 소비량으로 따지자면 단연코 1등은 독일도 영국도 아닌 체코입니다. 체코의 맥주 소비량은 필스너를 가장 먼저 만든 도시 필젠과 수도 프라하의 덕도 있겠지만, 중세의 양조 전통이 계승된 도시 체스케 부데요비체(Ceské Budějovice)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 지역은 체코어로 부르는 이름보다 독일어로 부르는 이름이 더 유명한데, 독일어로 부드바이스(Budweis)라는 곳입니다.
중세 맥주의 도시 체스케 부데요비체(독일어 부드바이스)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체스케 부데요비체는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남쪽으로 150km 정도 떨어져 있고 남부 보헤미아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입니다. 앞에 체스케라고 붙인 이유는 체코 모라비아 지역에 또 다른 부데요비체가 있어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체스케 부데요비체는 역대 보헤미아 국왕 중에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수립했다는 오타카르 2세에 의해 1265년에 건설된 도시입니다. 오타카르는 보헤미아 남부에 강력한 왕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서 직접 도시를 선정하고 설계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왕실의 맥주를 양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체스케 부데요비체의 양조 권한은 카렐 4세에 의해 더욱 강화됩니다. 카렐 4세는 오타카르와 함께 체코에서 가장 유능한 국왕으로 칭송받는 인물입니다. 카렐 4세는 체스케 부데요비체를 방문하여 맥주를 마셔보고는 이 도시와 맥주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카렐은 이 도시의 맥주를 보호하기 위해 1351년에 마일 라이트(mile rights)라는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마일 라이트란 도시의 6마일 이내에서만 맥주 양조를 허용한다는 보호 권한입니다. 카렐은 체스케 부데요비체에서 생산된 맥주를 다른 도시에서 생산된 맥주와 차별화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생산된 맥주만을 ‘부데요비체에서 생산된 맥주’라고 했는데 이것이 독일어로 ‘부드바이저(Budweiser)’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맥주 법령의 강제성은 약해져 갔습니다. 점점 시민들은 마일 라이트를 어기며 개인 양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시도 개인 양조까지 막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시민들과 적당히 타협합니다. 1495년 체스케 부데요비체 시의회는 단 하나의 대중 양조장을 짓고 이를 시민들이 감독하게 했습니다. 또한 대중 양조장에서는 밀맥주를 만들고, 개인 양조장에서는 흑맥주를 만들도록 하여 대중 양조와 개인 양조를 모두 허용하는 현명한 조치를 합니다.
1795년 체스케 부데요비체에는 또 하나의 커다란 대중 양조장이 생겼습니다. 체스케 부데요비체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가까운 지역으로 체코어를 하는 체코인과 독일어를 하는 체코인이 같이 살던 곳입니다. 독일어 체코인은 소수였지만 양조장과 지역 기관의 소유권을 포함하여 정치적으로 커다란 권력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부드바이저 뷔르거브로이(Budweiser Bürgerbräu)라는 양조장을 세우고 1802년부터 맥주를 생산하여 부드바이저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또한 1875년에 부드바이저를 미국으로 수출하는데 미국에서는 그들의 언어에 따라 버드와이저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1876년 아돌퍼스 부시가 유럽을 여행하는 중에 체코에서 맥주를 마시고, 그 지역의 양조 프로세스에 따라 버드와이저를 생산하는 계기가 된 맥주입니다.
한편, 1895년 체코어를 하는 체코인들은 여러 개의 양조장을 통합해 ‘Czech Joint Stock Brewery’라는 하나의 공영 양조장을 세웁니다. 이 양조장이 현재 AB InBev와 상표권 싸움을 벌이고 있는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Budějovický Budvar)입니다.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소속이었다가,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잠시 독일인이 점령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공산화와 냉전의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살아남아 체코의 국영 기업으로 남아 있습니다.
[버드와이저 상표를 먼저 등록한 앤호이저-부시]
미국의 버드와이저는 앤호이저-부시 양조장이 만든 맥주입니다. 앤호이저-부시 양조장은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아돌퍼스 부시가 장인인 에버하르트 앤호이저와 함께 만든 양조장입니다. 부시는 1839년에 독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와인과 맥주 양조장에 양조 부품을 공급해 주는 도매업자였습니다. 부시는 18세가 되었을 때 그의 형제들과 함께 독일에서 세인트루이스로 이주했습니다. 부시는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기보다는 자신의 길을 걷기로 하고, 아버지처럼 맥주 양조장에 양조 부품을 공급하는 도매업자의 직원으로 일했습니다.
19세기 세인트루이스는 미국에서 독일계 이민자들이 가장 많이 거주했던 정착촌으로 그들의 전통처럼 커다란 맥주 시장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남북전쟁 당시 6개월간 연합군으로 잠시 복무한 적도 있었던 부시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산으로 세인트루이스의 36개의 양조장에 부품을 공급하는 도매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이때 사업적으로 만났던 고객 중 하나가 바바리안 양조장을 소유하고 있던 앤호이저입니다. 앤호이저가 소유한 바바리안 양조장은 1852년에 독일계 미국인 양조업자인 조지 슈나이더가 세인트루이스 남부에 설립한 양조장입니다. 슈나이더 양조장은 근처의 번화가로 확장하였지만, 재정적인 문제로 주인이 여러 번 바뀌다가 파산 직전에 비누 제조업으로 큰돈을 벌었던 앤호이저에게 넘어갑니다. 부시는 앤호이저 가문과 인연을 맺었고 그의 딸인 릴리와 결혼하게 되면서 바바리안 양조장을 장인과 함께 공동으로 경영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앤호이저-부시 양조장입니다.
한편, 앤호이저-부시의 버드와이저는 1876년 부시와 그의 친구이자 주류 수입업자였던 칼 콘래드가 유럽 여행 중 체코의 부드바이스(체스케 부데요비체)에서 마신 부드바이저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맥주입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부시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유럽의 필스너 양조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부드바이스 지역의 양조 공정을 모방해 맥주를 개발합니다. 부시는 맥주를 만들고 콘래드는 포장과 판매를 담당했습니다. 1878년 콘래드는 버드와이저의 상표를 등록했고, 이것은 버드와이저 상표권 백년 전쟁의 씨앗이 됩니다. 1882년 콘래드가 떠나고 부시가 버드와이저에 대한 모든 권리를 사들입니다. 버드와이저가 인기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상표권 분쟁도 없었겠지만, 버드와이저는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맥주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밀러도 한때 버드와이저라는 상표를 붙여 맥주를 출시했을 정도입니다. 1900년대 초반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가 뒤늦게 미국의 버드와이저의 상표권을 알게 되면서 상표권 백년 전쟁은 시작됩니다.
[버드와이저 상표권 백년 전쟁]
버드와이저 상표권 전쟁의 두 축은 미국의 앤호이저-부시 양조장과 체코의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 양조장입니다. 상표권을 바라보는 두 나라의 서로 다른 관점은 이렇습니다. 미국은 체코의 부드바이저 즉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가 설립되기(1895년) 이전에 버드와이저의 상표 등록(1878년)을 했기 때문에 시간 순서상 버드와이저의 상표권이 앤호이저-부시에 있다는 주장입니다. 반면 체코는 버드와이저는 부드바이스에서 생산된 맥주만을 말하며, 맥주 이름에 지명을 사용한 만큼 원산지 보호 원칙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상표권 논쟁은 체코가 미국으로 부드바이저를 수출하려고 했던 20세기 초반에 일어납니다. 1911년 쌍방은 각자의 지역에서만 버드와이저를 판매하는 걸로 동의했습니다. 즉 앤호이저-부시는 북미 지역에서만 자사의 버드와이저 상표를 사용하고,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는 유럽 지역에서만 판매할 수 있다는 합의입니다. 그러면서 두 양조장은 각각 ‘original’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했습니다. 이후 두 나라는 상표권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미국의 대공황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미국은 알코올의 무덤(1920년부터 1933년까지 금주법의 시대)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편, 체코는 전쟁이 끝나고 독일화에 반대하는 운동이 벌어지면서 부드바이스라는 이름 대신 체스케 부데요비체라는 체코 지역명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다 1939년 두 버드와이저는 다시 한번 상호 배타적인 권한으로 상대방의 지역을 침범하지 않고 맥주를 판매하자는 합의에 이릅니다. 이 합의가 있고 난 뒤 일주일 만에 체코는 독일의 침범을 당했고, 5년 동안 주권을 상실했습니다. 소련이 독일을 물리치고 2차 세계 대전을 끝냈을 때, 체코는 소련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공산주의 체제에서 양조장은 국영 기업이 되었습니다.
1989년 체코에서 벨벳 혁명이 일어나 공산당 정권이 무너지자,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는 맥주를 세계로 수출하는 데 집중하기로 합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잠잠했던 앤호이저-부시와의 상표권 분쟁이 다시 살아납니다. 이 상표권 소송은 전 세계에 걸쳐 100여 건이 진행 중입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2000년대 초반 유럽과 북미 지역에서의 판결입니다. 결과적으로 체코의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는 유럽에서 버드와이저에 대한 상표권을 가지고, 앤호이저-부시는 북미에서 버드와이저 상표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는 미국에 체흐바(Czechvar)라는 이름으로 버드와이저를 판매하고, 앤호이저-부시는 유럽에 버드(Bud)라는 이름으로 버드와이저를 판매합니다. 그 밖의 지역에서는 그 나라의 현지 법에 따라 상표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가령 영국에서는 어느 양조장도 버드와이저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판결하여, 두 회사 모두 버드와이저를 판매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2006년 독일 월드컵 당시 앤호이저-부시는 이 월드컵의 후원사였으나, 버드와이저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버드’라는 이름을 사용하려고 했으나, 독일 법원은 비트브루거(bitburger)의 약칭인 비트와도 헷갈리므로 이마저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출시한 맥주 이름은 ‘앤하이저 부시 버드(Anheuser Busch Bud)’였습니다.
버드와이저 상표권 전쟁은 현재도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2013년 기록에 의하면, 전 세계 124건의 소송 중에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가 89건에서 승리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느 쪽에 손을 들어 주고 싶은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