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한 번이라도 가본 적이 있다면, ‘제주에는 별의별 박물관이 다 있네’라고 느껴본 적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술에 관한 박물관도 있을까요? 혹은 맥주에 관한 박물관은요? 최근에 제주도 여행을 하면서 우연히 한국 술에 관한 작은 전시관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여행을 하면 제일 먼저 숙소를 잡고, 숙소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기 위해 지도를 꼼꼼히 살펴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번 제주 여행에서는 서귀포 신시가지에 숙소를 잡았고, 지도를 살펴보던 중 국세청 주류면허지원센터라는 곳을 발견했습니다. 게다가 이 센터 내부에 한국 술 전시관이 있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국세청 주류면허지원센터는 한국에서 출시 혹은 수입되는 술을 분석 감정해 알코올 도수나 성분 등 술의 규격을 검사하고, 수입 술의 위조 여부를 분석하는 등 국세청의 주세 업무를 기술적, 행정적으로 지원하는 곳입니다. 원래 센터는 1909년에 양조시험소로 창설되었고, 2015년도에 서귀포로 이전하였습니다.
센터 내 1층 현관에는 로비의 공간을 조금 할애한 주류전시관이 있습니다. 이곳은 사람이 거의 찾지 않는 작은 전시관입니다. 제가 갔을 때도 전시관의 불이 꺼져 있을 정도로 평소에는 사람이 거의 찾지 않는 곳입니다. 안내자에게 전시관을 보러 왔다고 하니 상당히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어디서 오셨어요?’라고 묻습니다. 그러면서 주섬주섬 벽면의 스위치를 올려주었습니다. 전시관의 불이 환하게 켜졌을 때 살짝 설렜습니다. 묵언수행을 끝낸 갖가지 술병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면서 저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습니다.
이 전시관에는 전통주뿐만 아니라 소주, 맥주, 위스키, 와인 등 우리나라 술의 역사와 주세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인 맥주를 찾아 천천히 이동했습니다. 출입문에서 가장 먼 구석에 한국 근현대에 있었던 맥주병과 맥주캔이 옹기종기 모여있습니다. 어디서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오래된 맥주들을 보고 있자니 맥주 향수에 젖었습니다. 오비 수퍼 드라이와 크라운 수퍼 드라이를 보자니 이현세와 노주현의 맥주 광고가 생각났고, 하이트 천연암반수를 보자니 맥주병에 붙어 있던 맥주 온도계가 떠올랐습니다. 오비 아이스와 오비 넥스는 톱스타를 낸 광고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기억되는 맥주였고, 인터넷 자료로만 봤던 이젠벡 맥주도 보였습니다. 박물관에서 본 맥주만 가지고 한국 맥주의 현대사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70년대: 이젠 맥주 삼국시대, 이젠벡 맥주
전시관에서 가장 눈에 띈 맥주는 이젠백 맥주입니다. 지금은 오비맥주, 하이트진로, 롯데칠성음료의 대기업 맥주와 수많은 수제 맥주가 공존하는 시대입니다만,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오비맥주와 하이트맥주의 양강 체제가 유지되어 왔습니다. 한국 맥주 역사상 세 번째 맥주를 가진 것은 딱 세 번뿐이고 그리 길지 않은 시간입니다. 가장 최근에는 2014년 롯데주류가 클라우드를 생산하면서 지금의 대기업 맥주 삼국시대를 만들었고, 조금 거슬러 올라가 1992년에 진로쿠어스가 카스 맥주를 내면서 1999년 오비맥주에 흡수되기까지 8년 동안 맥주 삼국시대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맥주의 역사 속에 첫 맥주 삼국지를 만든 것이 바로 이젠벡입니다.
이젠벡은 많은 분이 생소하게 느낄 겁니다. 사실 저도 제 나이보다 많은 맥주에 대해서 소문으로만 듣고 알고 있습니다. 이젠벡은 1972년에 설립된 한독맥주의 맥주 브랜드입니다. 한독맥주는 섬유업체인 삼기물산이 당시 서독의 이젠벡 사의 지분 49%를 투자받아 설립한 맥주 회사입니다. 양강의 맥주 업체의 견제가 심한 시기였기 때문에 생산하는 맥주의 전량을 국내에 판매하는 것이 아닌 외국에 수출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국내 맥주 제조 면허를 취득했다고 합니다. 실제 인도네시아와 홍콩을 상대로 계약을 체결하고 수출도 했습니다. 하지만 공장가(47원)보다 낮은 수출가(42원)로 출혈수출을 감수하면서까지 운영하다가 부도 위기에 몰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빈 병 회수까지 힘들어 적자 폭은 더 커졌다고 합니다. 이젠벡은 이러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수출이 아닌 국내 출시로 전환하여 극복해 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이젠벡이 국내 시판을 할 경우 인가를 취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이젠벡이 그동안 수출용으로 세금을 면제받았으니 국내 시판을 불허하겠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젠벡이 면제했던 세금을 모두 완납하자 국내 시판을 허용했습니다.
이젠벡은 필스, 알트, 복 등 총 5종의 맥주를 출시했습니다. 역대 대기업 맥주 중에 가장 파격적인 라인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의 양조 시설도 연간 4백만 이상의 상자를 생산할 수 있는 규모였다고 하는데, 7백만 상자를 생산할 수 있었던 동양맥주(오비맥주)에 비해서도 결코 뒤지는 규모가 아닙니다. 1975년 이젠벡 맥주는 국내 시판 후 3개월간 15%의 점유율을 보이며, 품귀현상이 일어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맥주 양강인 동양맥주와 조선맥주(하이트진로)의 견제가 심했습니다. 두 회사는 공판 체계를 최대한 활용하여 판매 경로를 방어하였고 화학주라는 소문을 퍼트려 공동의 적을 1년 반 만에 도산시킵니다. 물론 그보다는 내부적인 문제 즉 불법 융자와 사기 계약서 때문에 스스로 망가진 것도 사실입니다. 한독맥주는 은행 융자를 받기 위해 회사의 간부들과 짜고 회사의 주권을 위조해 그것을 담보로 전북은행 서울지점 등 7개의 금융기관에서 대출받았습니다. 또 모기업인 삼기물산은 120개의 공사기관의 인장을 만들어 홍콩 영사 확인의 수출계약서를 위조했고, 이를 통해 한국외환은행에서 무담보로 융자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큰 금융 스캔들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대출 사기 사건으로 한독맥주뿐만 아니라 관련된 은행장들도 무더기로 물러났습니다. 결국 한독맥주는 1976년에 부도를 냅니다. 한독맥주는 조선맥주에 매각되었고 한국의 첫 번째 맥주 삼국지는 겨우 6년 만에 막을 내립니다.
80년대: 드라이 맥주 광고 전쟁
수퍼 드라이라는 똑같은 이름의 오비 맥주와 크라운 맥주를 보니 80년대가 생각납니다. 80년대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맥주가 드라이 맥주이기 때문입니다. 드라이 맥주는 아사히가 1987년에 아사히 수퍼 드라이를 발매하고 공존의 히트를 하면서 크게 유행했습니다. 드라이 맥주라고 하니 필스너나 헬레스처럼 하나의 맥주 스타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맥주 스타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드라이 맥주에 관해서라면 이전 기사 <논란 많은 일본 맥주 얼마나 알고 마시나요?> 편을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아사히는 이 드라이 맥주 하나로 매각의 수렁에서 건져집니다. 뒤처져 있던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세기가 바뀐 후에는 기린과 점유율 크로스에 성공합니다. 이렇다 보니 다른 맥주 업체도 너나 할 것 없이 드라이 맥주를 생산하기에 이릅니다. 기린은 ‘기린 드라이’를, 삿포로는 ‘삿포로 드라이’를, 산토리는 ‘산토리 드라이’를 앞다투어 발매합니다. 이 모든 것이 1988년 한 해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하지만 드라이 맥주 분야에서 아사히와 경쟁이 힘들다고 느낀 회사들은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것은 맥아의 비율을 낮춘 발포주나 제3의 맥주의 유행을 이끌었습니다.
일본 맥주의 영향을 전적으로 받고 있던 한국에서도 80년대 후반 드라이 맥주가 출시됩니다. 오비맥주는 1989년 7월에 ‘오비 수퍼 드라이’라는 이름으로, 곧이어 조선맥주는 1989년 8월에 ‘크라운 수퍼 드라이’라는 이름으로 드라이 맥주를 출시합니다. 이와 동시에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맥주 광고 전쟁이 벌어집니다. 두 회사의 광고는 이전에 봐왔던 광고와는 사뭇 다릅니다. 두 회사는 서로 다른 분위기로 광고를 송출합니다.
먼저 오비맥주는 유명 만화가 이현세의 야성미를 내세운 광고를 냅니다. 이전 오비맥주의 광고는 회식에서 마시기 좋은 맥주, 친구들과 마시기 좋은 맥주를 강조한 면이 있습니다. 반면 이번에는 맥주의 강렬함과 청량함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대표적인 광고 문구가 ‘강한 첫맛, 깨끗한 끝맛’이니까요. 광고는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라는 노래가 깔리면서 시작합니다. 이현세가 컨버터블 자동차를 타고 보리밭 사이를 달립니다. 야성미 넘치는 큰 개도 함께 타고 있습니다. 차에서 내려 맥주를 맥주잔에 따르고 그대로 시원하게 마십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오비가 좋습니다. 오비 수퍼 드라이’. 다른 버전에서는 이현세가 색소폰을 부는 친구 정성조 씨를 찾아갑니다. 친구는 보리밭 사이에서 색소폰을 불고 있습니다. 연주가 끝난 친구와 함께 맥주를 마십니다. 기존의 광고에서 이미 여러 차례 다루었던 ‘친구와 함께 마시는 맥주’라는 주제와도 일맥상통합니다. 또 다른 버전에서는 역시 컨버터블 자동차를 타고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찬 중동의 광야를 거칠게 달립니다. 차를 잠깐 멈추고 지도를 살펴보더니 태양 빛이 강렬한 사막 한가운데에서 맥주를 마십니다. 맥주는 갈증 해소를 위한 음료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모두 남자의 야성미를 강조하고, 남자에게 호감을 주는 맥주라고 어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드라이 맥주라는 사실을 줄곧 주지시킵니다. ‘새로운 맛의 맥주, 오비 수퍼 드라이. 오비가 완성한 고발효 드라이 공법, 이것이 본격 드라이’라면서 드라이를 반복적으로 언급합니다.
이에 반해 크라운 맥주는 당대의 미남 탤런트 노주현을 앞세워 야성보다는 미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점잖은 신사의 이미지가 있는 노주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중후한 목소리로 맥주를 말합니다. ‘드라이는 크라운, 크라운 수퍼 드라이가 좋습니다’라고요. 한편 내레이션은 여자의 목소리입니다. ‘분명하고 깔끔한 그가 좋다. 크라운 수퍼 드라이. 그와 나누는 깨끗한 맥주 한잔, 크라운 수퍼 드라이’라고 말합니다. 광고 모델과 맥주 모두가 여자에게 호감을 준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이 드라이 광고 전쟁의 승패는 어땠을까요? 아무리 광고에서 치열하게 다투어도 그동안 쌓아 놓은 오비맥주의 아성을 조선맥주는 넘지 못했습니다. 그 성은 90년대 중반 엉뚱한 사건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90년대: 낙동강 페놀 사건으로 유탄을 맞은 오비맥주의 분전
전시관에서는 90년대 잠깐 판매되었던 오비맥주의 신제품 오비 아이스(OB ICE)와 넥스도 볼 수 있습니다. 오비 아이스와 넥스는 하이트 맥주에 1등을 뺏긴 오비맥주의 반격이었습니다. 5~60년대까지의 맥주 점유율은 기록을 거의 찾을 수가 없는데, 50년대까지만 해도 조선맥주의 점유율이 더 높았다고 합니다. 70년대가 되면 한국의 맥주는 줄곧 오비맥주가 조선맥주를 앞서고 있는 형국이었습니다. 대략 오비맥주와 조선맥주의 비율이 7:3 정도였습니다. 맥주를 모르는 어린이도 어른들의 맥주 심부름에 오비맥주를 사 가야 했고, 어디서 오비 맥주보다 크라운 맥주가 더 좋다고 말하는 것이 힘든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관계가 역전된 것은 엉뚱하게도 맥주가 아닌 다른 사건에 의해서였습니다. 바로 두산전자가 낙동강에 페놀을 유출한 사건입니다.
일명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은 1991년 3월에 경상북도 구미시의 낙동강에 두산전자가 30톤의 페놀 원액을 방류하여 상수원을 오염시킨 사건을 말합니다. 영화 <삼진전자 영어토익반>이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두산그룹을 창업 이후 최대의 위기에 빠뜨렸던 이 사건에 국회도 진상조사위원회를 열었습니다. 각 시민 단체는 수돗물 오염 대책 위원회를 결성했으며, 국민들은 두산 제품을 불매하기 시작했습니다. 두산전자는 조업 정지를 당했으나 페놀 사고가 단순 과실로 고의성이 없었다는 이유로 조업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 4월 또다시 페놀을 유출하는 2차 사고가 발생하여 국민들의 분노가 최고조에 다다랐습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두산그룹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환경부 장관과 차관이 경질되었습니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두산전자가 일으킨 사건이 같은 그룹의 계열사였던 오비맥주로 불똥을 튀겼습니다. 오비맥주로서는 억울한 일이겠지만, 페놀로 더럽혀진 물이 묘하게 맥주를 만드는 물과 연관되어 보여 오비맥주의 불매로 이어진 것입니다. 오비맥주의 불매로 반사이익을 얻은 것은 당연히 조선맥주였습니다. 조선맥주는 그 시기 열처리를 하지 않고 마이크로필터로 효모를 걸러낸 맥주인 하이트 맥주를 출시하였는데, 페놀 사건이 터지자 재빠르게 ‘지하 150미터 천연암반수로 만든 맥주’라고 공격적으로 광고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하이트 맥주병에는 맥주를 가장 맛있게 마실 수 있는 온도를 표시하는 온도계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 온도계의 색깔이 파란색으로 변하면 더 시원하고 깨끗한 맥주를 마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선맥주는 결국 하이트 맥주의 인기에 힘입어 96년도에는 업계 1위를 탈환합니다. 그리고 사명도 조선맥주에서 하이트맥주로 변경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이트맥주가 승승장구할 때, 오비맥주가 돌파구를 찾기 위해 내세운 맥주가 있었으니 바로 오비 아이스입니다. 오비 아이스는 당시 북미에서 유행하던 맥주 숙성 기술인 아이스 공법을 적용한 맥주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였고, 당시 월드 스타였던 강수연을 배우로 기용하여 초대형 광고까지 제작하였습니다. 3분짜리의 이 광고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길이에, 해외 로케이션이라는 스케일은 맥주 광고 역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일이었습니다. 알프스를 배경으로 아이스 공법을 찾기 위해 스파이가 된 강수연이 유유히 스키를 타고 내려오는 장면은 차가운 맥주와 오버랩되어 몸이 오싹할 정도의 시원함을 선사합니다.
하지만 엄청난 비용을 투자하고도 오비 아이스는 맥주 팬들에게 외면당했습니다. 이미 추락한 맥주 회사의 이미지는 회복하기 힘들었고, 맥주 또한 아이스 공법만 강조했을 뿐 기존 맥주와 차이점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비는 오비 아이스의 실패를 빠르게 인식하고 또 한 번 새로운 맥주를 출시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기존의 맥주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고 이름만 다른 맥주였습니다. 90년대 X세대를 겨냥한 맥주 NeX의 출시입니다. 이름에서부터 New와 X가 연상됩니다. 오비 맥주의 기존 이미지가 회식 자리에 어울리는 맥주, 어른들이 좋아하는 맥주라는 조금은 옛 느낌이 있었는데, NeX는 젊은 세대를 새로운 맥주 층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전략을 쓴 것입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당대 젊음의 상징 정우성까지 광고 모델로 사용하면서 젊은 세대에게 어필했지만, 그 밖에는 내세울 만한 게 별로 없었습니다. 기존과 같이 맥주의 목 넘김, 깨끗함, 갈증 해소를 강조한 광고 또한 식상했습니다.
후일담이지만, 오비맥주가 다시 1위를 탈환한 것은 2012년입니다. 오비 아이스와 넥스 두 신제품 맥주의 실패를 맛본 오비맥주는 IMF를 겪으면서 벨기에 맥주회사 인터브루에 매각되었고, 1999년에는 국내 맥주 3위 기업인 카스를 품어 점유율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었습니다.
전시관은 모두 둘러보는 데 1시간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규모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술, 한국의 맥주만을 이렇게 따로 모아 놓으니 그런대로 유익한 전시였습니다. 관심이 생겨 찾아보니 전북 완주에 대한민국 술 테마 박물관이 있다고 합니다. 서귀포의 전시관은 현재는 사람의 발길이 거의 끊긴 것으로 보이지만, 제주를 찾는 관광객이 한 번쯤 들러봐도 좋을 박물관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