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의 샴페인’
19세기 전 유럽을 휩쓴 나폴레옹이 1809년 독일 프로이센의 군대를 물리치고 베를리너 바이세 맥주로 축배를 들며 남긴 말이다.
베를리너 바이세는 ‘베를린의 밀 맥주‘라는 뜻으로, 부드러운 신맛과 가벼운 느낌이 무척이나 상쾌한 맥주이다. 쓴맛은 거의 없고 도수도 3도에서 5도 정도로 낮은 데다가 과일 향을 살짝 풍기는 이 맥주의 맛은 분명 샴페인을 연상케 한다. 달콤한 끝 맛과 가벼운 쌉쌀함을 지닌 맥주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게 도대체 맥주가 맞는지, 상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운 맛이겠지만, 화이트 와인의 산미와 깔끔함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마셔도 마셔도 취하지 않는 샴페인을 마시는 기분일 것이다.
과거의 맥주는 무엇이나 막걸리처럼 어느 정도의 신맛이 있었다고 한다. 맥주를 발효하는 과정에서 흘러든 다양한 발효균들이 신맛, 눅눅한 냄새와 같은 다양한 맛의 흔적을 맥주에 남겼기 때문이다. 베를리너 바이세, 고제, 괴즈, 람빅, 플란더스 에일, 세종과 같은 맥주에는 아직도 그런 과거의 맥주가 가졌던 신 맛의 흔적이 남아있다. 오직 한 가지의 효모만으로 깨끗한 공장에서 생산된 맥주의 깔끔한 맛에 매료된 지금 우리에게 이런 맥주의 맛은 사실 좋게 말하면 상상도 하지 못할 새로운 맛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괴상한 맛이다. 그 때문인지 이런 맥주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점차 사라져 가고 있었다. 베를리너 바이세의 고향인 베를린에는 최근까지 단 두 곳의 양조장만이 이 맥주를 만들었으며, 고제 맥주는 20세기 들어 몇 번이고 그 명맥이 끊어지기도 했다.
맥주의 맛과 향은 때로는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탄생한다. 과일의 맛을 내기 위해 많은 과일을 넣어도 정작 맥주에서는 과일 향이 별로 느껴지지 않기도 한다. 반면에 효모가 발효과정에서 만들어 내는 향과 홉의 다양한 아로마가 합쳐져 짙은 복숭아 향이나 레몬, 자몽 향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과일이 전혀 들어있지 않은 맥주에서 마치 쉐리나 포르토 와인과 같은 짙은 건포도의 향이 날 때도 있다. 맥아가 만들어낸 연노랑의 팔레트 위에 효모가 만들어 내는 발효 향과 오렌지 껍질, 향신료, 포도즙과 같은 수많은 부재료의 향이 조화를 이룬다. 덧붙여 약간의 홉이 전해주는 기분 좋은 쌉쌀함과 탄산음료만이 줄 수 있는 상쾌함까지. 좋은 샴페인보다는 훨씬 저렴한 가격에 때로는 웬만한 샴페인 못지않은 풍미를 전해주는 맥주의 맛은 생각보다 와인과 가깝다.
와인과 요리의 마리아주에서 낮은 도수의 맥주로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 필요할 때, 산뜻한 맥주의 신맛으로 식욕을 돋울 때, 레드 와인을 마시기엔 부담스러운 여름날이지만 선뜻 값비싼 화이트 와인이나 샴페인을 마시기는 망설여질 때, 요즘 수제 맥주가 인기라는데 입안 가득 쓴맛만 차오르는 아이피에이나 커피 맛 인지 흙 맛인지 모를 흑맥주가 부담스럽게 다가올 때 – 가장 와인과 가까운 맥주부터 친해져 보자.
이제부터 ‘나의 와인 취향으로 알아보는 맥주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한다. 다양한 맥주를 중심으로 맥주의 맛과 향을 알아보고, 그렇다면 이 맥주와 가장 비슷한 와인은 무엇일까? 를 떠올려보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와인 취향과 가장 가까운 맛의 맥주를 찾아 마셔보자. 와인만, 혹은 맥주만 마시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맥주가 어울리는 날이 있는가 하면 와인이 어울리는 날도 있다. 기분 좋은 탄산의 상쾌함을 안겨주는 포르토 와인이 있다면? 잘 익은 복숭아 향이 나는 맥주가 있다면? 후추 향이 가득한 레드와인을 연상케 하는 맥주는?
코를 찌르는 쉐브르 치즈의 날카로움은 소비뇽 블랑뿐만 아니라 헤페바이젠 맥주와도 어울린다. 맥주와 와인을 함께 즐기면 한 덩어리의 치즈만으로도 전혀 다르지만 미묘하게 어울리는 두 가지 조합을 경험할 수 있다.
앞으로 소개할 다양한 스타일의 맥주는 흔히 접할 수 있는 맥주와 달리 향이 풍부하고 복잡한 맛을 가진 경우가 많다. 전용 맥주잔이 없다면 와인잔에 따라 와인을 즐기듯이 그 맛과 향을 온전히 느껴보자. 가볍게 볶은 맥아에서 나오는 연노랑에서부터 각종 과일과 밀이 만들어내는 핑크색, 오크통에서 배어 나오는 짙은 갈색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맥주의 색깔을 즐기고, 잔을 비울 때까지 남아있는 끈적한 거품부터 샴페인처럼 터지고 사그라지는 거품까지 탄산이 만들어내는 유쾌한 움직임에 빠져들어 본다. 마시기 전에 코로 느껴지는 향과 한 모금 마신 후에 느껴지는 향은 어떻게 다른지. 또 음식을 한입 베어 물고 마시는 맥주는 어떤 느낌인지. 와인을 즐기며 깨어난 감각은 맥주도 좀 더 세심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같은 품종의 포도로 만든 와인이라도 지역과 생산자, 빈티지에 따라 그 맛과 향이 다르듯이 같은 스타일의 맥주라고 하더라도 브랜드나 생산 일자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지기도 한다. 모두 세종 스타일의 맥주이지만 좀 더 과일의 풍미가 느껴지는 세종 듀퐁과 드라이하고 떫은맛이 강한 탱크 7의 맛은 다르다. 서로 다른 맥주를 한 가지 맥주를 기준으로 줄 세우기보다는 다양한 와인을 접해보듯 다양한 맥주를 마셔보고 그 차이를 이해해보자.
수제 맥주 붐이 일어나면서 남들과 다른 새로운 맥주를 만들기 위해 애쓰던 미국의 브루어리들이 가장 먼저 만들어 낸 맥주 중 하나가 바로 세종, 팜하우스 에일이다. 브라세리 듀퐁에서 만드는 벨기에 맥주 ‘세종 듀퐁’은 가수 마이클 잭슨과 이름은 같지만 몸매는 정 반대인 맥주 평론가 마이클 잭슨이 그 맛을 극찬하면서부터 미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 때 생산 중단을 고려했던 이 맥주는 이제는 브라세리 듀퐁의 대표 맥주가 되었다. 벨기에 에노 지역의 농촌에서 겨울철 농한기에 만들어 여름철 농번기에 막걸리처럼 마시던 세종 맥주는 과거 한국의 농촌 풍경처럼 마을마다 있던 양조장에서 저마다의 특색을 가진 효모를 이용하여 빚었다. 알코올 도수는 높지 않지만 여름 내내 상하지 않도록 방부제 역할을 하는 홉을 많이 넣었다. 이렇듯 동네마다 개성이 살아있는 세종 맥주는 다른 맥주와 비교해 자유로운 스타일이다. 새로움을 추구하던 크래프트 브루어리들이 남다름을 표현하기 위해 세종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독일에서는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던 베를리너 바이세와 고제 맥주는 이런 세종의 인기에 힘입어 한여름 갈증을 풀어주는 맥주로 라거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다. 이렇듯 맥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사라져 가는 맥주를 되살려낸다.
아쉽게도 베를리너 바이세와 같은 스타일은 아직 한국에서 접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올해는 가히 ‘사워 비어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국에서도 품질 좋은 사워 비어를 더욱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은은하게 전해지는 신 맛과 숙성한 오크통의 풍미가 전해지는 부산 와일드 웨이브 브루잉의 ‘설레임’ 맥주와 아키투 브루어리의 ‘도깨비 사워 에일’은 세상 어느 곳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사워 비어이다. 사워 비어가 좀 더 많은 사랑을 받는다면 한국에서도 위스키 배럴뿐만 아니라 다양한 와인과 리퀴르를 숙성했던 오크통을 이용한 맥주를 맛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와인 같은 맥주, ‘한국의 샴페인’이라 불릴 만한 맥주는 오늘 우리가 마시는 한 잔의 수제 맥주에서부터 시작될지도 모른다.
1. 세종 듀퐁 (Saison dupont | Brasserie Dupont | 6.5 도 | 벨기에)
세종 듀퐁은 효모의 존재감이 강한 맥주이다. 농익은 복숭아와 약간의 정향, 후추 향이 나며 긴 여운을 남기면서도 단맛은 적어 깔끔하다. 풍부한 과실 향을 지녔으면서도 때로는 생강이나 레몬그라스와 같은 날카로운 향을 풍기는 비오니에 (Viognier)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을 연상케 하는 맛이다.
2. 탱크 7 팜 하우스 에일 (Tank 7 farmhouse ale | Boulevard Brewing Co. | 8.5 도 | 미국)
미국의 블러바드 브루잉은 ‘악마의 맥주’로 유명한 벨기에의 ‘듀벨’ 맥주를 만드는 듀벨 모르트가트 브루어리에서 운영한다. 팜하우스 에일은 농가 맥주, 즉 세종을 미국의 브루어리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은은한 자몽 향이 지나간 자리에는 의외로 날카로운 홉의 씁쓸함과 떫은맛, 흑후추의 향이 오래도록 남는다. 마치 프랑스 론 지방의 꼬뜨 뒤 론(Côtes du Rhône) 와인 같이 잘 균형 잡힌 산미와 드라이한 바디, 강한 개성을 함께 지닌 맥주이다.
3. 크랜베리 퀸스 베를리너 바이세 (Cranberry-Quince Berliner weisse | North Coast Brewing Co. | 4.1 도 | 미국)
퀸스 (Quince)는 유럽에서 자라는 과일이다. 퀸스로 만든 잼은 모과를 넣은 대추 잼과 비슷한 맛으로 스페인 지방의 치즈나 향이 강한 염소젖 치즈와 잘 어울린다. 노스코스트 브루잉의 크랜베리 퀸스 베를리너 바이세는 크랜베리의 약간은 인공적으로 느껴지는 강한 향과 신맛을 퀸스의 은은한 향이 잘 받쳐주는 조화로운 맥주이다. 다소 풍미와 단맛이 강하여 화이트 와인보다는 로제 와인과 비슷한 맛과 색을 보여주는 맥주이다.
4. 칼라바자 블랑카 (Calabaza blanca | Jolly Pumpkin Artisan Ales | 4.8 도 | 미국)
졸리 펌킨은 미국에서 최초로 야생 효모를 이용한 자연 발효 맥주를 만든 브루어리 중 하나이다. 칼라바자 블랑카는 호가든과 같이 밀을 주재료로 하여 오렌지 껍질과 코리앤더를 넣어 만든 맥주이지만, 오크 베럴에서 숙성하며 떫은맛이 있고 매우 깔끔한 끝 맛과 적당한 신맛을 가지고 있다. 오렌지와 자두 같은 과일 향이 풍부하지만, 맛이 단순하고 여운이 길지 않아 피노 그리지오 (Pinot Grigio) 품종의 이탈리아 화이트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부담 없이 즐길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