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부리새가 나오는 기네스 광고 본 적 있어?”
“없는데”
운전하면서 아내에게 물었더니 아내는 나의 뜬금없는 소리에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옛날에는 기네스를 마시면 건강에 좋다고 광고했데. 그래서 임산부도 기네스를 즐겨 마셨다던데”
“그래? 설마!!”
이것이 제 아내의 반응입니다. 설마 임산부가 술을 마셨겠어! 라면서 흘깃 쳐다봅니다.
2018년 기네스는 매우 특별한 맥주를 선보였습니다. 기존의 흑맥주 패키지와는 전혀 다른 흰옷을 입은 기네스 캔을 출시한 것입니다. 이것은 기네스의 여러 동물 광고를 디자인한 존 길로이(John Gilroy, 1898-1985)의 탄생 120주년을 기념하여 출시한 ‘기네스 길로이 에디션’입니다.
기네스와 기네스 광고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기네스 역사는 광고의 역사 위에서 흘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네스는 1759년 당시 34세였던 아서 기네스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기네스의 아버지는 더블린에서 가까운 킬데어 카운티의 부유한 집안의 집사였는데, 그가 만든 흑맥주는 맛이 뛰어나 주위에서 일부러 찾아와 마셨다고 합니다.
기네스는 이러한 집안 전통의 양조 기술과 아버지가 물려준 100파운드를 가지고 더블린 근처의 레익슬립에 처음으로 자신의 에일 양조장을 세웠습니다. 기네스는 1759년이 되어 양조장을 더블린으로 옮기는데 이것이 기네스 양조장의 시작입니다. 더블린의 젖줄 리피 강이 흐르는 성 제임스 게이트가 있는 곳에 설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사용 중단된 작은 양조장을 9천 년간 임차 계약을 맺고 매년 45파운드를 지급하는 계약은 역사상 가장 독특한 계약으로 기네스의 매우 유명한 일화입니다.
기네스는 1794년이 되어서야 첫 광고를 게재했습니다. 이 시기는 창립자 기네스와 그의 아들 기네스 2세가 공동으로 경영하며 기네스의 성장을 주도했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 기네스는 에일 생산을 중단하고 포터 생산에 집중하여 맥주 판매량을 두 배로 늘리는 등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1794년의 첫 공식 광고는 영국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첫 광고는 ‘젠틀맨스 매거진(Gentleman’s Magazine)’이라는 잡지에 게재되었는데, 광고의 타이틀이 ‘건강, 평화 그리고 번영’이었습니다. 기네스는 첫 광고부터 맥주와 건강을 연결한 것입니다.
기네스의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하프를 브랜드 로고로 채택한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기네스의 전략적인 광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1862년의 일입니다. 이때는 기네스 2세의 아들인 벤자민 기네스가 사업을 물려받은 시기입니다.
벤자민은 기네스 맥주를 오스트레일리아와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의 세계로 수출하면서 매출을 무려 30배나 늘려 놓았습니다. 벤자민은 아일랜드의 국민성을 건드려 기네스를 보는 시선을 긍정적으로 끌어냈습니다. 그는 성 패트릭 교회를 복구하는데 막대한 비용을 지불했고, 아일랜드의 전통 악기인 하프를 기네스의 문장으로 도입했습니다. 성 패트릭은 아일랜드 기독교의 상징이며, 하프는 아일랜드 국민들이 자부심과 애착을 갖는 물건입니다. 기네스를 마시는 것이 곧 애국심의 표현이라고 아일랜드 국민의 심정적인 변화를 끌어낸 것입니다.
이렇게 늘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던 기네스에게도 시련은 있었습니다. 첫 번째 시련은 1914년에 발발한 1차 세계대전입니다. 이때 기네스 직원의 20%가 자원해서 입대했다고 합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17년에는 매출이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두 번째 시련은 영국 의회가 맥주에 대한 세금을 올리고, 맥주의 그래비티를 낮추는 법을 제정한 것입니다. 맥주의 그래비티란 맥주의 밀도로 곧 맥주의 알코올 도수와 연결됩니다. 알코올 도수가 낮은 기네스의 맥주는 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영국은 술집의 영업을 11시까지로 제한하는 법을 제정하기도 했습니다. 세 번째 시련은 1919년 미국이 금주법을 제정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기네스는 미국 시장을 통째로 잃게 되었습니다.
기네스가 위기를 극복한 방법은 광고였습니다. 사실 기네스는 첫 광고 이후 한동안 광고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기네스는 최초의 마케팅 전략가인 벤 뉴볼드의 설득을 받아들여 지금까지 회자하는 독특한 광고를 만들었습니다. 1929년은 ‘검은 화요일’로 불리는 뉴욕 증권 시장의 몰락이 시작된 해입니다. 이때 다시 한번 기네스의 매출도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게 되었는데 이 위기를 극복한 것도 광고였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즈음에 기네스의 훌륭한 광고 아이디어를 냈던 뉴볼드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죽음은 굉장한 손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죽기 1년 전 또 다른 인재를 기용하여 그를 보좌했는데, 그가 바로 휴 비버입니다.
비버는 우리에게 기네스북을 만든 인물로 유명합니다. 여담이지만, 비버는 친구와 함께 사냥하다가 영국에서 사냥감이 되는 새 중에서 어느 새가 가장 빠른지에 대한 논쟁이 붙었습니다. 이에 대한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없어 각종 이야깃거리나 통계를 묶어 책을 출간했는데 그것이 기네스북의 시초입니다. 비버는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나면 기네스의 긴 슬럼프는 끝날 것이며 비즈니스는 금방 확장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그는 공장을 확장했고 무엇보다 기존의 광고를 더더욱 강화했습니다.
기네스의 광고를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 또 있습니다. ‘존 길로이’입니다. 투칸이라는 큰부리새가 그려진 기네스 광고, 모두 한 번쯤 봤을 지 모를 이 광고가 길로이의 작품입니다. 1928년부터 1960년대까지 동물을 주제로 한 컬러풀한 광고는 대부분 길로이의 손끝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기네스 광고의 차원을 한 단계 위로 바꾸어 놓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3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총 100편 이상의 광고와 50여 개의 포스터를 만들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우연히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동물원에서 묘기를 부리는 바다사자를 보고 참신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저 녀석의 코끝에 기네스 잔을 올려놓으면 균형을 잡는 모습이 재미있겠는 걸’, 그리고 이러한 컨셉을 기네스 광고로 만들었습니다.
기네스는 역사적으로 아주 유명한 맥주 슬로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익살스럽고 컬러풀한 길로이의 작품을 곁들였습니다. 1929년 2월 ‘당신에게 좋은 기네스(GUINNESS is good for you)’를 영국 언론에 처음으로 게재한 이후로, 1930년 ‘GUINNESS for strength’, 1935년 ‘My Goodness, My GUINNESS’, 1954년 ‘Lovely day for a GUINNESS’ 등이 있습니다.
여기에 길로이가 디자인한 동물 광고는 수없이 많습니다. 맥주가 담긴 잔을 꿀꺽 삼킨 타조, 맥주를 훔치는 곰, 주머니에 맥주가 담겨 있는 캥거루, 입 속에 맥주병을 가득 담고 있는 펠리컨. 악어, 펭귄, 거북이, 사자 등 모두 그의 작품입니다.
2009년 9월 24일은 아서의 날이었습니다. 이 해는 기네스 양조장이 탄생한 지 250년이 되는 해이며, 9월 24일은 창립자 아서 기네스(Arthur Guinness, 1725.9.24~1803.1.23)가 태어난 날입니다. 이후 매년 9월 24일을 아서의 날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위의 포스터는 아서의 날을 기념하여 제작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