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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즈의 아버지, 아르망 데벨더(Armand Debelder)

괴즈의 아버지, 아르망 데벨더(Armand Debelder)

염태진 2023년 3월 6일

람빅 좋아하나요? 어쩌다 람빅 헤드에 머리를 처박고 코를 킁킁거리고 있으면 지나가는 아내는 그 향이 그렇게 좋냐며 한마디 합니다. 고수나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기분 좋게 만끽할 수 있는 고약한 향이 있는 것처럼, 람빅에는 람빅만의 향긋한 고린내가 있습니다. 그 향은 땀에 전 속옷 냄새 같기도 하고, 어릴 적 고향에서 맡았던 마구간의 여물 냄새 같기도 하며, 물에 젖은 가죽 냄새 같기도 합니다. 영어로는 이 향을 ‘Funky’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표현하기가 어려운 향입니다.

직접 맡기 전에는 그 향을 추측하기도 힘들고, 직접 맡아도 사람마다 느끼는 향의 감각은 다릅니다. 그런데 저는 이 향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맥주를 따르고 오랫동안 마시지 않고 향만 맡을 때도 많습니다. 람빅은 자연 발효로 만들어지는데, 자연 상태의 야생 효모와 박테리아가 향을 만들어 냅니다. 아마 고대의 맥주와 가장 가까운 맥주가 있다면 그것이 람빅일 것이고, 가장 먼저 사라질 맥주가 있다면 그것도 람빅일 것입니다.

람빅은 현대에 와서 찬사를 받고 있지만 한때는 인기를 잃어 자취를 감출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아마 캉티용(Cantillon) 브루어리의 장 판 루아(Jean Van Roy)나 본(Boon) 브루어리의 프랑크 본(Frank Boon), 드리 폰타이넌(3 Fonteinen)의 아르망 데벨더(Armand Debelder) 같은 인물이 없었으면 말입니다. 이들은 사라져가는 람빅의 전통을 지키며 그 유산을 후대에 물려주었습니다. 이중 아르망 데벨더는 ‘괴즈의 아버지’라 불리며 람빅의 조합인 HORAL을 설립하고 이끌었으며, 람빅과 괴즈(람빅의 일종으로, 어린 람빅과 숙성된 람빅을 섞어서 만든 맥주)를 현대적인 맥주로 끌어올린 입지적인 인물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2022년에 사망하였습니다.

[2022년 3월 6일 인스타그램에 알린 아르망 데벨더의 부고 소식]

미국 크래프트 맥주의 권익과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단체는 브루어 협회(BA, Brewer Association)입니다. ITA(International Trappist Association)는 수도원 전통에 따라 맥주를 만들고 트라피스트 맥주의 상표권 보호를 위해 설립되었습니다(사실은 맥주뿐만 아니라 와인, 치즈 등 여러 가지 상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CAMRA(Campaign for Real Ale)는 영국의 에일과 펍 등 영국 맥주의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람빅에도 이런 단체가 있을까요? 그 대답은 바로 HORAL입니다.

HORAL(Hoge Raad voor Ambachtelijke Lambikbieren, 영어로 번역하면, The High Council for Artisanal Lambic Brewers)은 벨기에 람빅 맥주의 전통적인 양조법과 그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HORAL은 람빅을 홍보하기도 하고, 람빅의 전통적인 양조법을 보존하기 위해 애쓰며, 람빅 맥주의 부정적인 행위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도 합니다. HORAL은 1997년 벨기에 제느(Zenne) 강 주변의 6개 람빅 양조장과 괴즈 블렌더가 공식적으로 설립하였습니다. 이를 처음으로 제안하고 함께 이끈 인물이 바로 드리 폰타이넌의 아르망 데벨더입니다.

[Armand Debelder]

아르망 데벨더는 1951년 10월 26일, 제느 강이 흐르는 벨기에 할레 지방에서 가족 농장을 경영하는 아버지 가스통과 어머니 레이몬드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가족 농장으로 가족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없었던 아버지는 드리 폰타이넌이라는 작은 레스토랑 겸 술집을 차렸는데, 아르망은 이 술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술집의 단골 손님과 지하 저장소에 있는 람빅 통 사이에서 놀며 성장했습니다. 가끔 아버지가 람빅을 블렌딩할 때 따라주는 맥주 한 모금을 마셨다고 하네요.

십 대가 되었을 때 아르망은 펍과 주방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장점을 살려 안더레히트(Anderlecht)에 있는 호텔 요리학교로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주방보다는 항상 블렌더에 있었습니다. 결국 블렌더가 되기로 결심하고 배럴이 있고 맥주를 블렌딩할 수 있는 지하 저장고에서 맥주를 병에 넣는 일을 하며 지냈습니다. 지하실에서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찍 일어나 지하실에 가면 춥고 축축했고, 때때로 병입 기계의 병이 폭발했기 때문에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실제 맥주병 폭발 사건이 2009년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1980년대에 아르망은 드리 폰타이넌 펍의 대부분의 블렌딩 작업을 하면서 보냈습니다. 당시 레스토랑 자체가 정말 잘 되고 있어서 아버지는 레스토랑만 운영할까라고도 생각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람빅과 괴즈의 소비는 와인에 밀려 점점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아르망이 태어날 때 즈음에 마을에는 14개의 블렌더가 있었지만, 이 시기에는 드리 폰타이넌 하나만 홀로 고군분투하며 괴즈의 명맥만 유지하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아르망의 신념을 굽히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드리 폰타이넌을 아르망을 포함한 두 아들에게 물려주었고, 아르망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괴즈 블렌더가 되었습니다. 이때 아르망이 맥아즙을 구입한 양조장이 본 브루어리입니다. 이때부터 프랑크 본과 친분을 쌓았고 훗날 공동으로 HORAL을 설립하는 협력자가 되었습니다.

1997년 아르망은 본과 함께 람빅과 괴즈의 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비영리 단체 HORAL을 설립했습니다. 아르망은 HORAL의 초기부터 2015년까지 회장직을 유지하면서 람빅의 전통을 보존하면서 람빅의 현대화에 앞장섰습니다. HORAL의 초기에는 드리 폰타이넌과 본 브루어리 이외에 데 캄(De Cam), 데 트록(De Troch), 린데만스(Lindemans), 티머만스(Timmermans)가 함께 했습니다. 현재는 브루어와 블렌더의 수가 13개로 늘었습니다(다만, 람빅 맥주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캉티용은 이때 HORAL에 가입하지 않았고, 현재도 가입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르망은 2018년에 HORAL을 떠났습니다. 현대에 와서 일부 브루어나 블렌더가 생산하는 맥주가 생산 방법이 전통적이지 않고 인공 감미료를 첨가한 가당 맥주를 생산하는 것이 HORAL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더 이상 HORAL이 람빅의 유산을 보호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 문제는 칸티용이 HORAL에 닥칠 미래를 내다본 것일지도 모릅니다.

[1998년, 드리 폰타이넌은 람빅을 직접 생산하기 위해 브루어리를 만들었습니다.]

2009년은 아르망에게 최악의 한해였습니다. 2009년 5월 16일 아르망이 드리 폰타이넌으로 일하러 갔을 때 깜짝 놀랄만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창고에서 압도적인 열기가 느껴졌고 병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입니다. 컨디셔닝 룸의 온도조절기가 고장이 나 방이 뜨거워졌고, 병에 가해지는 압력이 높아지면서 맥주병이 폭발한 것입니다. 13,000개의 맥주병이 폭발했고, 67,000개의 병이 망가졌다고 합니다. 하룻밤 사이에 8만 병의 괴즈를 잃은 사건입니다.

드리 폰타이넌은 파산 위기에 처했습니다. 결국 드리 폰타이넌은 자사 브루어리를 매각했습니다(1998년에 람빅을 직접 생산하기 위해 브루어리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은 맥주를 증류해 아르망 스피릿이라는 증류주를 만들어 팔았는데, 이것이 순식간에 매진되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본 브루어리나 린데만스 브루어리 등 주변의 브루어가 맥아즙을 추가로 공급해 주어 괴즈 블렌딩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2012년에는 새로운 양조 설비를 설치하며 결국 재건에 성공했습니다.

2016년 10월, 아르망은 공식적으로 은퇴했습니다. 아르망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아르망은 함께 일했던 두 젊은이 미카엘(Michaël Blancquaert) 베르너(Werner Van Obberghen)에게 경영권을 넘겨주었습니다. 미카엘은 그의 조수이자 블렌딩 파트너였고, 베르너는 드리 폰타이넌에서 괴즈를 즐겨 마셨던 손님이었다고 합니다. 아르망은 두 사람을 가르키며 ‘내가 가져본 적이 없는 아들‘이라면서, 수년 동안 두 사람과 블렌더로서의 재능과 전통적인 가치를 공유하며 드리 폰타이넌의 계승자로 확신이 들었다고 합니다.

[아르망은 미카엘과 베르너에게 드리 폰타이넌을 넘겨주었습니다.]

2022년 3월 6일, 아르망은 2년간의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원래 지병이 있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치료가 중단되었고 당뇨병이 병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르망은 람빅 맥주의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전통의 스타일을 고집했고, 람빅과 괴즈의 유산을 미래의 세대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아름다운 괴즈를 만들어 전 세계 사람들에게 맛의 감동을 주었습니다.

[Armand Debelder]

2023년 3월 6일은 아르망 데벨더의 사망 1주기입니다. 그를 가슴 깊이 추모합니다.

염태진

맥주인문학서 저자. 맥주로 내장도 채우고 뇌도 채우며 '날마다 좋은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 iharu@kakao.com / 인스타 iharu04 / 브런치 https://brunch.co.kr/@ih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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