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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킬라, 숙취의 추억

데킬라, 숙취의 추억

주영준 2016년 6월 6일

tequila

데킬라에 질색하는 동년배 친구들, 그러니까 삼십 대 중반의 친구들이 주변에 꽤 있다. 데킬라? 그 싸구려 술? 좋은 술 많은데 그걸 왜 마셔. 숙취도 지독하고. 다음 날 머리 아파 죽는다고. 손님들도 마찬가지다. 이 칵테일에는 데킬라가 들어가는데요, 하면 질색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거 먹으면 머리아파요. 그래, 체감상 데킬라의 ‘객관적인’ 숙취는 제법 강한 편이다 하다. 하지만 ‘데킬라만 마시면 머리가 아프다’는 문제가 오롯이 데킬라만의 잘못인가?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눈을 감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양주라는 걸 배우기 시작한 어린 시절 말이다. 먼저 위스키를 처음 마셔 본 날을 떠올려보자. 당신의 기억은 모르겠지만, 내 기억 속에서 위스키는 복학생 선배와 연결된다. 대학 시절, 복학생 선배들이 위스키를 많이 사줬다. 한끼에 사천원쯤 하는 대학가의 싸구려 밥집에서 밥을 먹고, 어두컴컴한 술집에 간다. 선배가 한 병에 오륙 만원 하는 위스키를 시킨다. 과일안주라거나 육포 같은 게 나오고, 콜라나 우유 같은 게 나온다. 선배와 하하호호 떠들며 술을 마시다가 술자리는 적당히 끝이 난다. 칵테일? 좋아하던 애와 싸구려 칵테일 바에 가서 맛없는 칵테일을 시키고,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잔을 달그락거리던 어설픔이 아련하다.

그리고 데킬라를 떠올려보자. 돈은 없는데 소주를 마시기는 싫고, 그래도 취하기는 해야겠어. 폼은 잡고 싶고. 소주 한 병에 이천오백 원 하던 그 시절, 싸구려 데킬라는 한 잔에 천 몇 백 원쯤 했다. 저녁 한 끼를 굶으면 데킬라가 세잔이니 저녁 제끼고 술이나 먹자. 그렇게 샷을 때려먹거나 이삼만원짜리 데킬라 보틀을 시킨다. 안주로는 나초인지 하는 과자뿌시레기가 나오고 소금과 레몬과 커피가 좀 나오고. 자, 오늘은 일단 마시고 내일 생각하자. 자, 마셨으니까 10년 후면 우리 삶에서 아무 의미도 없게 될 꿈이라거나, 정의라거나, 예술이라거나 하는 것에 대하여 떠들어보도록 하자. 더 마시자고. 술 떨어졌냐? 더 시켜. 나는 그렇게 친구와 둘이서 데킬라 세 병을 마신 적이 있다. 그 날 안경도 지갑도 모자도 우정도 신발 한 짝도 잃어버렸으나 다행히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아마 다들 비슷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술을 주제로 하는 매거진의 기사를 인터넷으로 보고 있는 너도 그랬을 것이다. 안 그랬다고 뻥치지 마라.

문제는 데킬라가 아니다. 무슨 술이건 스트레이트로 쭉쭉 마시면 빨리 취하고 많이 취하고 다음날도 취한다. 문제는 데킬라가 아니다. 무슨 술이건 과자뿌시레기를 주워 먹으며 병째로 마시면 지독하게 취한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다. 데킬라는 무죄다. 우리가 유죄지. 우리가 유죄인가. 청춘이 유죄지.

아주 가끔 친구들과 데킬라를 마신다. 친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데킬라를 한 병 시키고 나면, 추억의 장이 열린다. 아, 내가 스물 몇 살 때 데킬라 마시다가 자빠져서 깁스를 했다니까. 아직도 비 오면 다리가 시큰거려. 아, 내가 스물 몇 살 때 데킬라를 마시다가 저 놈이랑 사귀었다니까. 정신 차리고 헤어졌으니 망정이지. 대체로 이런 불쾌한 추억들이다. 추억은 그 시절 중요했던 것들을 떠올리게 하고 그것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헤어진 첫사랑이라거나 그 시절 꾸었던 꿈들이라거나 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리하여 우울해진 우리는 또다시 스무 살처럼 안주도 없이 데킬라를 쑤셔 넣고는 다음 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 역시 데킬라는 숙취가 심해. 다시 한 번 데킬라에게 무죄를 선고하자. 우리가 유죄다.

당신은 이런저런 이유로 이런저런 술을 싫어할 수 있다. 이를테면, 나는 와인의 숙취가 너무 심하다고 자주 말하는 친구를 안다. 언젠가 그 친구와 와인을 마셨는데, 주량이 소주 반병인 그 친구는 혼자 와인을 한 병 넘게 마셔댔다. 와인 한 병에 들어있는 알코올 양이 소주 한 병이랑 비슷한데 당연히 다음날 좋을 수가 있나. 막걸리는 배부른데 숙취까지 심하다는 다른 친구도 마찬가지다. 그는 막걸리집에 가면 젓가락도 들지 않은 채 막걸리만 벌컥벌컥 마셔댄다. 야, 배부른 데 뭐 하러 안주를 먹어. 그래, 분명히 와인과 막걸리는 제대로 잘 마신다고 해도 숙취가 심한 대표적인 술이다. 그리고 와인은 향에 비해 도수가 매우 강한 술이고, 막걸리는 배가 부른 술이다. 그렇다고 해서 막 마셔서 배를 채운 후에, 와인과 막걸리는 숙취가 심하네 어쩌네 하면서 술에게 잘못을 모두 전가하는 것은 아주 부당한 일이다. 술꾼의 자격이 없다.

개인적으로 화요41을 매우 좋아하는데, 마시는 것을 좀 주저하는 편이다. 화요를 마시면 항상 끝이 안 좋았다. 화요를 먹고 만취한 채 휘청대다가 가만히 서 있는 전봇대를 고정하는 와이어에 들이박아 안경을 깨먹고 얼굴에 채찍 자국이 난 적도 있다. 화요 잘못인가? 아주 약간 있다고 생각한다. 화요는 알코올 도수에 비해 맛이 지나치게 부드러워서, 혀가 느끼는 취기와 실제의 취기가 많이 다르다. 술에 뇌가 맛이 가고 있는 동안 혀는 ‘아직 알코올 맛을 충분히 못 느꼈다고. 더 마셔도 안전해’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나는 내 멍청한 뇌보다는 조금 더 정확한 혀를 믿는 편이다. 그리고 마구 마시고, 취한다. 화요 잘못인가? 아니, 내 잘못이다. 술에게 잘못을 전가하지 말고, 제대로 마시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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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준

신촌 bar TILT의 바텐더. 사회학 석사. 번역가. 라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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