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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기억을 소환하다 : Champagne Laurent Perrier

맛, 기억을 소환하다 : Champagne Laurent Perrier

백경화 2016년 4월 5일

기억을 저장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가장 쉽게는 사진을 찍어 남길 수도 있고, 순간의 감정을 글로 남길 수도 있으며, 기타 특정한 기억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만한 개인적인 자극도 무수히 많다.
전에 읽었던 소설의 주인공은 과거를 냄새로 기억하는 습관이 있어 어떤 일을 정리하고자 할 때는 향수를 바꾸는 버릇이 생겼다는 내용을 본 적도 있는 걸로 봐서는 인간의 감각으로 각인된 기억은 꽤 강력한 자극으로 남는 듯 하다.

기억은 때로는 왜곡된 사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어쩌면 지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의 순수한 사실이 아닌 시간을 지나온 나의 복합적인 정서로 믹스된 왜곡된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짓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완전한 팩트든, 시간이 더해지면서 살이 붙은 왜곡된 기억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그에 대한 논의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원초적인 감각에 함축적으로 기생하고 있는 기억이라는 녀석이다.

나의 생활권에서 멀든 가깝든 어쨌든 낯선 곳으로 여행하게 되면 그곳에 대한 이미지는 여행 이후에 아주 간결한 몇 가지의 감각으로 남는다. 그곳에 있는 순간을 남기려는 최소한의 노력으로 스마트 폰의 카메라로 남기는 사진 몇  백장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몇 가지의 감각이다. 사실 사진은 내 세포 안에 숨겨진 감각을 들여다보는 촉매제에 불과할 때가 많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맛의 기억이 당시를 회상하게 하는 촉매제의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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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맛이 당시의 기억을 상기시키는지, 당시의 기억이 맛을 상기시키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어쨌든 조금 더 분명한 존재가 있는 것에 기준을 두고 볼 때 맛이 기억을 상기시킨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 물론 일방적이지 않은 상호 관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올해처럼 겨울이 길게 느껴진 적도 없는 때, 미세 먼지가 가득 찬 뿌연 하늘이 파랗고 맑은 하늘을 그리워하게 할 때, 따뜻한 것도 더운 것도 아닌 스산한 기온이 은근히 어깨를 움츠러들게 할 때마다 나는 베트남 호이안의 따뜻한 햇볕을 그린다. 자세하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여행 당시 호이안의 날씨는 적잖이 습도가 높았던 것도 같다. 오후가 시작할 무렵에 한차례 소나기가 오듯 비가 왔었고 이윽고 해가 떴으니 리조트를 나와 호이안 시내를 어슬렁거릴 때에는 분명 피부에 착착 감겨드는 것 같은 습도를 그다지 좋게 느끼진 않았을 듯 싶다. 지금 다시 떠오르는 기억으로도 외출 시에는 항상 우산을 챙겨 나갔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물론 그 이후에도 햇살이 좋은 다른 곳으로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지만) 따뜻한 햇살의 여유로움이 그리울 때 호이안이 그리운 이유는 한 가지인데 그것은 반미와 샴페인 로랑 페리에의 기억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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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는 바게트 안에 각종 허브와 고기, 베트남식 소스를 더한 샌드위치인데 고급 음식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길가에서는 쉽게 반미를 파는 이동식 상점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종이에 한 번 싸고, 비닐 봉투에 담아 주는 반미를 아무렇지도 않게 길을 걸으며 먹는다. 위생적으로 관리된 주방에서 조리복을 입은 전문 셰프가 만들어 내주는 음식도 아니고, 정성스럽게 마련된 식탁에서 정갈하게 먹는 음식도 아니다. 그냥 간식 겸 먹는 길거리 음식일 뿐이다. 심지어 오토바이 매연 탓에 숨을 쉬기도 힘든 베트남의 도롯가에서 그나마 지킨 위생이라고는 만드는 사람이 쓰는 일회용 비닐장갑이 전부일 뿐인 이 싸구려 음식이 내게 베트남의 여유를 상기시켜주는 안내자가 될 줄은 당시에는 생각도 못 했던 일이다.

어쨌든 반을 가른 바게트 안에 사실은 어떤 맛인지 짐작도 안 되는 식재료들로 속을 채운 반미를 비닐 봉투에 담아 덜렁덜렁 가지고 리조트 안에는 들어 왔다. 그리고 망고니 패션 프룻이니 하는 열대 과일들도 주섬주섬 사서 왔다. 해가 지고 나면 더 습해지는 베트남의 날씨를 차갑게 보관해 둔 샴페인을 마시면서 보내야지 싶은 마음에 사 들고 온 먹거리들이지만 사실 반미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 게다가 평소 좋아하는 샴페인을 마실 생각이었으므로 반미 따위가 샴페인의 맛과 향을 해칠 것이라는 우려가 있어 샴페인은 열대 과일과 매칭하고 반미는 샴페인을 마시기 전에 속을 채우는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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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새로운 기억의 역사는 항상 기대하지 않았던 의외의 순간에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후부터 나는 평소 좋아하던 샴페인인 로랑 페리에의 맛과 향을 오롯이 그것 그대로 기억하는 법을 잃어버린 듯하다. 내게 샴페인 로랑 페리에는 베트남의 싸구려 간식인 반미와의 매칭이 이루어진 그때 그 맛의 기억으로 각인되었고 그것들이 만들어 낸 베트남의 이미지는 소나기가 지나고 난 뒤의 습한 밤이 아닌 따뜻한 햇살이 바스락거리는 여유 있는 오후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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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런 연상 작용이 일어났는지 구체적으로 논리를 들어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매우 주관적인 경험이긴 하지만 아마도 바게트의 단단한 껍질이 깨물어질 때의 느낌과 샴페인이 처음 입에 들어올 때의 버블의 촉감 그리고 버블이 내는 소리, 그리고 차가운 느낌의 산미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지면서 연상 작용을 일으켜 내지 않았을까 싶다. 이후에는 아마도 바게트 속을 채운 갖가지 식재료들이 내는 복합적인 맛과 샴페인의 향미까지 어우러지면서 순간 맛의 정점을 이루어냈을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순간 해가 뜨고 난 직후, 습하지 않은 청명한 아침에 색이 고운 베트남 전통 의상을 입은 리조트 직원들의 분주한 모습들이 오버랩 됐으리라고 본다.

아쉽다고 해야 할까? 이때 이후 샴페인 로랑 페리에는 오롯이 샴페인의 맛과 향만 가지고서는 전만큼 내게 매력적이지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로랑 페리에를 가장 좋아하는 샴페인으로 꼽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내가 로랑 페리에를 마시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가져다주는 기억의 선물이다.  그때 이후 로랑 페리에는 단순히 맛있는 샴페인이 아닌 기억의 전령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비록 샴페인이 가진 고유의 풍미를 따로 기억해내는 것은 불가능해졌지만 말이다.

지나간 시간을 저장하는 기억. 그리고 그 기억을 다시 소환해내는 특별한 자극.
내겐 그것이 맛이고, 그 맛이 불러일으킨 그때의 여유와 따뜻한 햇살이 지금은 너무나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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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화

여행 한 스푼, 와인 한 방울. 즐거운 와인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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