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와인 리스트를 받아 든 순간을 떠올려보라. 우선 심장박동은 약간 빨라질 테고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 암호 같은 와인 지역과 품종, 와인명이 펼쳐질 것이다. 침착하자. 당신은 당황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돈과 시간을 투자해 즐기기 위해 온 것이다.
소믈리에는 단순히 코르크를 당겨주는 사람이 아니다. 집에서 스스로 와인을 따서 마시는 건 무척 간편하고 돈도 아낄 수 있지만, 소믈리에가 나에게 맞춰 와인을 골라주고 그에 맞는 서비스를 받을 때 가장 다각적이며 깊게, 새로우면서도 편하게 와인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필요한 비용이라 여기거나 익숙지 않은 서비스일 수 있으나, 이미 업장에 들어와 앉아 있다면 본전 생각을 해보자. 서비스 비용은 이미 당신이 지불하는 금액에 포함되어 있다. 그럼 써먹어야 할 것 아닌가?
대부분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나 좋은 호텔의 식음업장, 그리고 당연하게 와인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와인바에서 소믈리에를 만날 수 있다. 이들은 와인의 맛과 향의 특성뿐만 아니라 포도품종, 재배법, 양조과정 그리고 해당 지역의 특징과 역사까지 파악하고 있는 고도로 훈련된 와인 전문가다.(또 그래야만 한다.) 와인 리스트가 두꺼울수록 이들에게 서비스를 받을 구석이 많지만 막상 테이블에 앉으면 누가 소믈리에인지도 잘 모르겠는 경우가 생긴다. 미슐랭 스타를 받을 정도로 잘 갖춰진 식당이라면 와인 주문을 도와주겠다고 말을 거는 직원이 소믈리에지만, 이 정도 분업화된 식당이 아직은 한국에 많지 않다. 모르면 물어보자. ‘여기 소믈리에 계신가요?’ 자, 이제 게임 스타트.
소믈리에의 지식과 경험을 갈취하여 새로운 취향을 찾거나 혹은 내가 그 순간 원하던 욕구를 완벽하게 만족시켰을 때의 기쁨은 느껴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특별하다. 자신의 취향이 완벽하다면 소믈리에를 갈취할 일은 별로 없다. 리스트를 살피고 먹고 싶은 와인을 콕 집어 주문하면 될 뿐이다. 확신에 찬 눈빛으로 바삭한 피노 그리지오를 먹겠다는 당신에게 에르미타주 블랑을 얘기할 소믈리에는 없다. 하지만, 좀 재미없지 않은가?
소믈리에는 다른 와인 관련 직업과는 달리, 눈앞에서 자신이 오픈한 와인이 손님의 입안에 들어가 있는 순간 손님과 눈이 마주치는 꽤나 끈적한 관계에 놓여있는 직업이다. 인셉션처럼 소믈리에의 머릿속에 들어갈 순 없지만, 한두 번의 대화가 오고 가는 것만으로 소믈리에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와 긍정적인 옵션을 당신에게 안겨줄 수 있는 관계에 있다는 얘기다. 그런 그들에게 말을 걸자, 모르는 건 물어보자. 그들은 언제든 친절히 답할 준비가 되어있다.
와인은 비쌀수록 맛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언제까지나 취향에 맞았을 때 맞는 말이다. 그날그날 쓰고 싶은 혹은 쓸 수 있는 돈을 생각하고서 원하는 가격대를 소믈리에에게 말하자. 돈 얘기하는 게 체면 구긴다고 생각하는 한국 남자라면 원하는 가격대의 와인을 리스트에서 가볍게 짚어주면 된다. 소믈리에는 당신의 예산을 듣지 않고도 파악하는 독심술을 하지 못한다.
당신의 가장 맛있던 와인이 1869던 라크리마 크리스티 델 베수비오 비안코(Lacrima Christi del Vesuvio Bianco)던 실력 좋은 소믈리에는 당신의 성공담을 몇 마디만 듣고도 당신 취향에 맞는 몇 가지 추천 와인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어쨌든 실패담까지 풀어놓는다면 그날의 소믈리에 추천 와인이 실패할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실패한다면? 다신 그 업장에 안 가면 그만 아닌가. 실력 없는 소믈리에까지 커버해 줄 여유는 없으니까.
600여 종의 좋은 와인 리스트를 갖추고 있는 정식당의 경민석 소믈리에는 “70% 이상의 손님은 소믈리에의 도움을 구해 와인을 주문하고 그중 이미 취향이 있는 손님들도 상당수다. 원하는 가격대에 맞춰드리는 것도 소믈리에로서 중요한 역할이다”라고 하면서도 “자신이 모르는 새로운 와인을 모험 삼아 경험해 보겠다는 손님은 드물지만 이럴 때는 추천이 조심스러우면서도 가장 자신 있는 와인을 꺼내놓게 된다. 그 와인에 손님이 만족했을 때 소믈리에로서 더욱 특별한 보람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이도 저도 생각하기 귀찮을 때, 혹은 정말 그날 자기가 먹고 싶은 와인을 자기 자신도 모를 때 넌지시 던져보자. 무슨 와인을 가장 좋아하냐고. 손님의 취향이 아닌 자기 취향을 드러내야 하기에 좀 더 이유가 분명한 와인들을 얘기해줄 것이다. 운이 좋다면 리스트에 적혀 있지 않은 특별한 와인을 꺼내줄지도 모를 일이다. 분명한 건 다음 방문 때 그 소믈리에는 당신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소믈리에를 써먹고 싶은 분들을 위한-혹은 써먹자는-글이다. 방문한 업장에 소믈리에가 없다면 게임이 성립되지 않지만 알아둘 것은, 소믈리에가 있는 업장이라면 오너가 제대로 된 셀러에 와인을 사놓고 소믈리에에게 급여를 지급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즐거움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바라기 때문이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경험과 지식을 – 다른 것도 아닌 식음의 즐거움을 위해 – 현명하게 사용한다면 비용 대비 큰 만족과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경험이라는 우물 속에 갇혀 있지 말라고 소리쳐 봤자 너무 깊게 판 우물이라 들리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