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도시,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 개인적으로 동유럽 여행 코스를 기획하면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나라다. 꼭 가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알려지지 않은 낯선 나라라는 점이 유일한 이유였다. 좀 더 여유가 있었다면 세르비아를 시작으로 알바니아와 코소보 등도 가고 싶었다.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해 분쟁국 중 세르비아를 대표로 리스트에 넣었다. 베오그라드는 발이 닿는 순간부터 낯섦이 강했다. 얼마 전까지 벌어진 내전의 흔적도 쉬이 찾아볼 수 있으며, 건물에서 풍기는 낮은 채도의 아우라는 날 밀어내는 것만 같았다. 언어 해독력도 현저히 떨어질뿐더러 세르비아 사람들의 영어 대화 능력도 생각보다 낮았다. 버스 터미널에서 호스텔까지 1.7km. 긴장 속에 오롯이 감으로 찾아갔던 숙소. 여행 중 처음으로 세르비아 집시 부자가 접근해서 내 돈을 갈취하려고 했다. 물론 힘으로 뿌리치고 나왔으나, 이 경험은 내 머릿속을 하얗게 만든 베오그라드의 첫인상이 되었다.
호스텔 입구 바로 옆에 걸린 작은 액자. 먹으로 그린 말(馬)과 한자로 써진 낙관. 낯선 곳에서 발견한 동양다움. 이게 뭐라고 괜히 안심된다. 호스텔 주인의 취향일까, 동양 관광객을 대비한 전략일까. 여행의 묘미란 이런 게 아닐까. 작은 소품과 표지판, 길거리에 붙어 있는 포스터. 내 나라에서는 관심 밖인 지형지물이 낯선 나라에서는 일종의 ‘단서’로 작용한다. 나 홀로 탐정이 되어, 짧은 시간 동안 도시에 걸려 있는 것들로 신상(?)을 파악하고 적응하려는 움직임. 때론 오판해도 그건 시행착오라는 좋은 변명이 받쳐주고 있으니, 전혀 두려울 게 없다. 지금 난 세르비아란 나라를 어르고 달래고 있다. 내 편이 되어줄 거란 단서들을 수집하는 중이다. 저 말(馬) 그림 하나로 충분하진 않지만, 최소한의 위안은 된다. 들어가자. 또 다른 단서를 찾으러. 동유럽 여행지 중에 가장 준비를 하지 않은 곳이 베오그라드다. 한꺼번에 10개국을 이어서 가는 여행이라 관심의 경중이 다를 법도 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마지막으로 간택된 베오그라드라서 뭔가 손이 덜 간 자식 같은 곳이다. 오로지 숙소 예약만 했을 뿐, 나머지는 이제 만들어가야 한다. 처음 의지할 동아줄은 호스텔 매니저. 걸어서 갈 수 있는 칼레메그단(Kalemegdan)을 지도에 표시해 준다. 베오그라드에 오면 누구나 거쳐 가는 관광지이며, 사진찍기 좋은 관광지라고 한다. ‘누.구.나.’라는 말은 내가 가장 좋아하지 않는 추천 사유다. 정보가 전혀 없는 나로서는 찬밥도 주면 먹어야 했다. 가깝다는 말에 카메라만 챙겨 나갔다. 다시 그 집시 무리가 나타날까 봐 노심초사. 경계 단계를 높여 움직였다.벗겨진 건물 외벽만큼이나 거친 동네가 베오그라드다. 그라피티로 상흔을 가리기에는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칼레메그단에 가까워지자, 저 멀리서 정신없이 흐물거리는 요새의 깃발이 발걸음의 정조준을 알려준다. 베오그라드는 약 2,000년의 세월 동안 분쟁을 겪은 도시다. 요새의 문을 지나자마자, 양쪽에 대포가 포진되어 위화감을 조성한다. 그에 대비해 주변 사람들의 표정은 온화하다. 운동하러 나온 시민과 사진을 찍으며 표정을 가꾸는 여행객이 뒤섞여 있다. 과거의 전장이 현재의 쉼터로. 카리스마 넘친 장년 시절을 지나 독기 빠진 노인의 모습이 이 요새에 담겨있다. 성곽 너머로 보이는 강은 Y자 모양을 하고 있는데, 두 강이 만나는 형태다. 사바 강과 도나우 강. 도나우 강은 2,850km나 되는 강이라 여러 국가를 거쳐 흐른다. 독일에서 시작되어 오스트리아, 세르비아, 헝가리를 지나는, 마치 호색가 카사노바를 연상케 하는 강이다. 그 기운이 맞는지, 연인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다. 낮에는 민낯이지만, 밤에는 분첩을 열어 붉은 화장기 도는 하늘로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당긴다. 같은 벤치에 앉은 영국에서 온 연인이 내게 말해준다. 여기는 낮보다 밤에 아름다운 곳이라고. 본인들은 어젯밤에 왔었단다. 그래 난 저녁에 선술집에 가리라. 사회적 혼란기를 극복하고 국가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던가. 정치적으로 복잡한 얼개를 생활과 문화로 풀어가려 했던가. 저항의 문화에서 화려한 소비로 베오그라드의 한복판이 트렌디하게 세팅되었다. 크네즈 미하일로바 거리 (Kneza Mihailova Street)는 베오그라드의 가장 큰 줄기다. 김빠진 거리는 여기부터 변신의 바람이 분다. 뉴욕의 맨해튼과 비견해도 될만한 쇼핑의 중심지다. 청춘들의 집결지이자, 세계 추세의 꼭짓점이다. 파괴의 본거지인 곳에서 이 거리는 고정관념의 파괴였다. 그러나 쇼핑과 난 큰 교집합이 없다. 패션 중심지 속 술꾼인 나에게는 눈 맞춤 정도가 전부다.
청담동 거리보다 북촌 거리를 선호한다. 소박한 탐미주의자. 화려한 튤립보다는 도로 옆에 아슬아슬하게 자라는 들꽃에 애정이 간다. 크네즈 미하일로바 거리 끝자락에서 왼쪽에 인디 풍의 소박한 거리가 나온다. 예술의 거리로 알려진 스카다리야 거리(Skadarlija Street)는 집시와 예술인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건물 앞에 한 화가가 올려놓을 수 있는 곳마다 작품을 세워 놓는다. 이 광경은 인사동 그 어딘가와 닮아있다. 작품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음악가의 등장은 거리를 풍성하게 하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다. 카페와 레스토랑도 겸손하다. 크네즈 미하일로바 거리에서 못 본 세르비아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나라든 움트는 예술과 문화가 존재하는데, 그 실마리를 스카다리야 거리에서 만났다. 생각보다 일찍 그리고 쉽게 마주쳐서 감개무량하다.
낙서의 나라로 기억될 것만 같다. 온 건물이 스케치북이다. 메시지와 그림으로 도배된 도시. 그 와중에 자국 맥주 브랜드가 보였다. 옐렌 피보(Jelen Pivo). 붉은 사슴이 브랜드 이름 위에서 포효하고 있다. 세르비아를 대표하는 라거 맥주다. 호스텔에 들어가기 전, 근처 마트에 들러 데리고 왔다. 도수도 5%로 무난하며, 탄산감도 부담감 없다. 오랜 목마름을 해갈하는데 제격이다. 이 이상도 이 이하도 아니다. 이젠 소규모 브루펍이 필요하다. 이 문제는 호스텔 매니저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와이파이가 되는 로비에서 검색에 들어갔다. 가장 먼저 검색 망에 걸린 곳이 블랙 터틀 펍(The Black Turtle Pub)이다. 베오그라드에서 5개의 매장이 있을 정도로 규모를 갖춘 펍이다. 대강의 약도를 메모하고 떠났다. 문제는 가는 경로마다 지나치는 거리의 이름을 해석할 수 없었다. 답답하고 짜증이 밀려 들어왔다. 선택과 집중의 필요성을 운운했다. 5개 중에 얻어걸릴 작전으로 나섰다고 낭패를 보기 일보 직전이다. 손을 놓고 다시금 감에 이끌려 걸었다. 목적을 잃는 여행은 없다. 보이는 게 모두 여행의 기록이고 경험의 자산이다. 여행자의 긍정 마인드로 내성을 끌어모았다. 투지에 발한 발견은 기쁨의 화로를 지핀다. 블랙 터틀 펍 간판을 찾았다. 5개의 매장 중 어느 곳인가는 중요한 화두가 아니었다. 펍 안은 좀 어수선했다. 실내 흡연이 가능하며, 전용 맥주잔도 부족해 보였다. 여직원의 친절도는 동유럽 특유의 시크함으로 무마된다. 자연스레 바에 앉아, 정성이 덜 간 코팅된 메뉴판을 보며 공부하기 시작. 처음 마셔본 맥주는 훈제 라거(Smoked Lager). 알코올 도수는 5%이며, 고전적인 독일 바이에른에서 유래한 훈제 맥주다. 향은 약간 스위트하면서 탄내가 나는데 그 맛이 매력적이다. 별미는 두 번째 맥주인 딸기 맥주(Strawberry Beer)다. 풍부한 거품 속에 잠자는 붉은 빛이 미각을 자극한다. 새콤하게 마무리하고 나왔다. 베오그라드의 붉은 밤은 이렇게 기억되었다. 부다페스트로 가는 날. 버스에 올라탔다. 나를 포함해 10명 정도의 승객이 의자에 체중을 싣고 출발을 기다린다. 스마트폰을 조작하는 이는 나뿐이고, 대각선에 앉은 청년의 휴대전화는 딱 봐도 통화와 문자 기능에 충실했다. 세르비아에서 헝가리로 넘어가는 아침. 베오그라드 버스 터미널은 싸늘했다. 연식이 오래된 간판과 안내문조차도 창백했다. 스스로 티켓을 끊고 게이트를 찾아가야 할 형국이었다. 세르비아 언어는 읽을 수조차 힘든 문자라서 눈뜬장님은 감으로 동선을 탐색한다. 버스가 출발했다. 어디나 그렇듯, 국가와 국가의 접경 선이 가까울수록 주변은 단순해진다. 땅과 하늘로만 압축되는 도로를 지나다가 건물 앞에서 버스가 멈추고 시동이 멎는다. 버스 기사는 마이크로 퉁명스럽게 뭔가 말하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눈치를 살폈다. 사람들은 짐을 들고 내린다. 뭐지? 갈아타나? 이방인은 최대한 현지인 코스프레를 하며, 늘 그랬듯이 가방을 메고 나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중에 최대한 주변의 문자를 흡수하려 두리번거렸다. 잡아낸 단어는 보더(Border). 국경선이구나. 신분증 제시를 공지하고 가방을 열어보란다. 열린 가방을 대충 보더니 담배, 술, 마약이 있는지 물었다. 손짓은 건성이다. 난 애연가도 아니고, 마약을 한 적도 없고, 술은 베오그라드에서 산 게 없으니 ‘No’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눈에 총기가 없는 직원은 날 통과시키고 다음 사람을 맞이했다. 괜히 겁먹었네… 라고 열린 가방을 닫으려는데, 술 한 병이 형광등에 반사되어 보였다. 폴란드에서 샀던 보드카. 온몸의 털이 솟는 순간, 동시에 그것마저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포커페이스. 상관없던 걸까. 아니면 못 본 걸까. 걸렸다면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