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오키나와로 가족 여행을 갔을 때 음식 이름 때문에 작은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처제는 평소 아귀찜을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 ‘아구 요리’를 통 크게 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키나와 사람들도 아귀를 먹을까요? 좀 이상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오키나와에서 아구(あぐ)는 생선이 아니라 돼지고기 품종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오키나와의 아구는 제주도의 흑돼지와 굉장히 비슷합니다. 오키나와에서는 구이뿐만 아니라 샤브샤브로 먹을 정도로 소고기처럼 좋은 육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해프닝 덕분에 우리 가족은 오키나와에서 아귀 찜이 아닌 아구 구이를 찾게 되었고 여전히 회자하는 이야깃거리가 되었습니다.
아차차차! 오늘의 이야기는 돼지 이야기가 아니므로 다시 화제를 돌려 오키나와의 햄버거와 루트 비어에 대해 말해 보겠습니다. 이 루트 비어가 오키나와의 아구처럼 맥주가 아니면서도 맥주로 오인하기 딱 쉬운 음료라서요.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72년까지 미국의 지배를 받았던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가장 미국적인 모습을 가진 지역입니다. 오키나와에 주둔한 수많은 미군과 가족들이 그들의 문화를 들여와 오키나와에 널리 퍼트렸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 특징은 음식 문화에서 도드라지는데, 오키나와를 여행하다 보면 수많은 스테이크와 타코스(멕시코 음식 타코에 밥을 섞은 음식), 그리고 햄버거와 아이스크림 가게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중 A&W라는 햄버거 패스트푸드 프렌차이즈는 놀랍습니다. 미국에서 시작한 이 햄버거 프렌차이즈는 이제 본국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지만 오키나와에만 26개의 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참고로 오키나와에는 KFC가 11개, 맥도날드가 36개 있습니다). 오키나와에 A&W가 처음 문을 연 때는 1963년입니다. 일본 본토에서는 KFC가 버거 프렌차이즈 사상 처음으로 1970년 나고야에 문을 열었고, 맥도날드가 그 이듬해인 1971년 긴자에 문을 열었으니 A&W는 일본 본토보다 7년이나 앞서 도입한 버거 프렌차이즈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오키나와에서 맥도날드는 1976년 오키나와 중부의 도시 우라소에(마키미나토점)에 문을 열었습니다.
저는 오키나와 여행을 하면서 작정하고 A&W를 방문해 보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전 여행에서 비교적 접근성이 좋은 아메리칸 빌리지 점과 나고 점을 방문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 여행에서는 이왕이면 A&W의 역사를 훏어볼 수 있는 1호점과 2호점을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A&W 1호점은 오키나와 현(縣) 중부의 도시 오키나와 시(市)에 있는 야기바루점입니다. 오키나와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아메리칸 빌리지나 나하를 제쳐두고 대체 이런 곳에 1호점이 있다니 처음엔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키나와 시가 되어버린 이곳은 과거에 가데나 미공군기지가 근처에 있었고, 미군들이 기지를 나와 가장 많이 유흥을 즐기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1호점의 입지로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미군들은 이 지역을 코자(コザ)라고 불렀습니다. 아메리칸 빌리지가 생기기 전까지는 오키나와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 오키나와에서 가장 큰 레저 및 쇼핑 단지가 생기고, 가데나 공군기지의 규모는 점점 축소되면서 코자의 활기는 점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규모가 작아진 코자는 옆 동네인 미사토와 합해져 오키나와 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63년에 생긴 A&W 야기바라점은 세월이 풍파를 그대로 맞으며 여전히 이 도시에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
제가 야기바루 점을 방문한 시간은 오전 9시입니다. A&W는 대부분 비교적 아침 일찍 문을 열고 늦게 문을 닫습니다. 보통 7시에서 9시 사이에 문을 열고 자정쯤에 문을 닫는데, 24시간으로 영업하는 지점도 3곳이나 있습니다. 야기바루 점은 코자 중심가에서 330번 국도를 타고 3킬로미터쯤을 달리다 보면 도로 옆에 ‘덩그러니’ 있습니다. 방문한 시간이 아침이라 그런지 더더욱 덩그렇다는 기분이 듭니다. 도로보다 조금 높은 언덕에 우뚝 솟은 텅 빈 곳에 외롭고 쓸쓸하게 말 그대로 ‘휑뎅그렁하게’ 있습니다. 입구로 오르는 곳에 주황색 녹슨 간판만이 ‘미국에서 태어난 A&W 야기바라점은 오키나와 1호점’이라며 반기고 있습니다. 문장마저 쓸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야기바라점은 미국에서 태어난 A&W의 오키나와 1호점입니다’라고 쓰며 좀 더 자연스러울 것 같지만, 협소한 간판에 문장을 구겨 넣어야 했으니 의미를 전달했으면 역할은 다한 것 같습니다.
입구의 길을 따라 올라가 봅니다. 눈에 띄는 것은 흰색 지붕과 주황색 기둥이 있는 드라이브 인입니다. 드라이브 인은 건물과 조금 떨어진 주차장에 있고, 메뉴판과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전선이 삐져나와 있고 군데군데 녹슨 부분이 많아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흔한 드라이브 스루와 비교해 보면 자동차에 승차한 채로 주문하는 방식은 비슷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드라이브 스루는 한 방향으로 들어선 후 차례를 기다려 마이크로폰으로 주문하고 건물의 창문 넘어서 점원이 내어 주는 상품을 받지만, 드라이브 인은 우선 주차장에 주차하고 마이크로폰으로 주문하면 점원이 직접 나와 상품을 건네 주는 방식입니다.
야기바루점은 처음부터 드라이브 인을 계획하고 만들었습니다. 당시 미군 가데나 기지 내에는 패스트푸드점이 없었습니다.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들은 이미 마이카 붐이 되어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었고 주말이 되면 자동차로 접근하기 쉬운 곳으로 가 외식을 즐겼습니다. 야기바라점이 도시의 중심이 아니면서 큰 도로를 끼고 드라이브 인 레스토랑을 시작한 것이 나름 성공한 이유입니다. 참고로 일본 본토에서 처음으로 드라이브 스루를 도입한 가게는 맥도날드로 1977년입니다. 건물 한쪽에서 마이크로폰을 통해 주문하고 창문 넘어 상품을 받는 지금의 맥도날드 드라이브 스루 방식과 똑같은 방식이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자동차 주문 방식 또한 오키나와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매장 안으로 들어가 한 바퀴를 둘러본 후 햄버거를 주문해 봤습니다. 맥도날드에 비해서 곳곳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집니다. 전체적으로 5~60년대 배경의 미국 영화에 나올 법한 분위기와 곳곳에 일본어로 된 안내판이 있는 풍경이 합쳐져 묘하게 코스모폴리탄적인 느낌을 내고 있습니다. 이 두 문화가 섞인 분위기는 매장 직원에게 상품을 주문할 때도 묘하게 감지됩니다. 이곳은 영어와 일본어가 모두 통하는 곳입니다. 저는 되도록 일본어를 쓰려고 노력했지만, 대화가 제대로 통하지 않을 때는 영어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그니처 메뉴인 A&W 버거를 주문했습니다. 단품이 790엔이고, 감자튀김과 루트 비어가 들어간 세트가 1,230엔입니다. 가장 비싼 버거이지만 맥도날드와 비교해 봐도 비슷한 가격입니다. 버거의 내용물은 실합니다. 깨가 잔뜩 뿌려진 빵 사이로 쇠고기 패티와 베이컨, 상추와 토마토가 있고, 두터운 모차렐라 치즈가 감칠맛을 더합니다. 저는 오키나와에 올 때마다 A&W의 이곳저곳 지점을 방문하며 이 시그니쳐 버거를 먹어 봤지만 한 번도 맛에 대해 실망해 본 적은 없습니다.
지점명 : A&W 屋宜原店 (Yagibaru Branch/ 오키나와 1호점)
주 소 : 700 Yagibaru, Kitanakagusuku, Nakagami District, Okinawa 901-2304
설립일 : 1963년 11월 1일
A&W 2호점인 마키미나토 점의 방문은 나하에서 아메리칸 빌리지로 이동할 때를 노렸습니다. 오키나와의 국도 58번 도로는 나하에서 시작하여 오키나와의 서해를 따라 오키나와 중부를 거쳐 북부까지 이어진 도로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동해안을 남북으로 달리는 7번 국도와 비슷합니다. 이 도로를 타고 나하를 조금 벗어나면 우라소에 시에 닿습니다. 우라소에의 마키미나토 강의 주변에는 한때 미군들과 그의 가족들이 살았던 외인 주택가가 있습니다. 현재 외인주택가는 빵집이나 옷 가게 등으로 재탄생하여 레트로한 감성을 즐기는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이곳에는 A&W 2호점뿐만 아니라 1963년에 처음 문을 연 오키나와의 아이스크림 프렌차이즈인 블루씰 1호점, 1976년에 문을 연 맥도날드 1호점이 반경 500미터 내에 몰려 있습니다. A&W 마키미나토 점은 1호점보다 더욱 엔다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국적인 정서가 가득합니다. 엔다(エンダー)는 이곳 사람들이 A&W를 친근감 있게 줄여 부르는 애칭입니다.
매장에 들어서기 전 건물 위로 우뚝 서 있는 옥상 간판이 단연 눈에 띕니다. 간판의 가장 높은 곳에는 주황색과 갈색이 원을 그리는 A&W 시그니처 마크가 보입니다. 추측하건대 주황색은 버거를 갈색은 루트 비어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간판 상단에는 ‘SINC1969 MAKIMINATO’라는 문구로 이 매장의 약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옆에는 매장의 이름보다 더욱 크게 ‘Root Beer”라고 쓰여 있습니다. 브라운 컬러의 단발머리를 한 매장의 점원이 살짝 미소 짓고 있고(사실 저는 어색한 미소로 보입니다만) 그 앞에는 그녀의 얼굴만큼 큰 루트 비어의 머그잔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뒤편에는 블론드 컬러의 단발머리를 한 점원이 드라이브 인 손님에게 루트 비어 두 잔을 서빙하고 있습니다. 간판에서 암시하듯이 루트 비어는 A&W의 주력 상품입니다. A&W의 역사를 살펴보면 A&W가 탄생하게 된 배경은 버거가 아니라 루트 비어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도대체 루트 비어는 무엇일까요?
루트 비어는 A&W의 시그니처 음료입니다. 이름과는 다르게 알코올이 전혀 들어 있지 않고 맥주가 아닌 음료입니다. 1919년 약국 점원이었던 로이 알렌이라는 청년은 아픈 친구를 위해 자신의 특기를 발휘해 약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러 약초와 뿌리 식물의 에센스를 조합하여 음료처럼 마실 수 있는 일종의 강장제를 만들어 주었는데 이것이 점차 약보다는 맛있는 음료로 애용되면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비알코올 음료이지만 맥주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당시가 금주법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1920년부터 1933년까지 미국은 술의 제조나 판매, 운반을 헌법으로 금지했습니다. 금주법의 시대는 대중적인 플라시보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비록 진짜 맥주를 마시지는 못하지만, 맥주라고 현혹하는 가짜 음료를 마셔도 취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금주법 시대에 유행한 가짜 맥주는 루트 비어 말고도 또 있습니다. 진저비어(Ginger Beer)도 그중 하나입니다. 진저비어 또한 미국 금주법 시대의 산물입니다. 진저비어는 원래 1700년대 중반 영국에서 설탕, 생강, 물을 섞어 발효해서 만든 알코올성 생강 맥주였지만 이를 미국에 수출하기 시작하면서 1920년대 금지법에 따라 무알코올 버전으로 만든 것입니다.
햄버거와 루트 비어를 사기 위해 매장 안으로 들어섭니다. 마침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메뉴판 위로 소박한 ‘MERRY CHRISTMAS’ 장식이 보입니다. 벽면에는 오리지널 굿즈를 파는 공간이 있습니다. A&W 마크가 선명한 모자나 티셔츠가 있고, 루티라는 봉제 인형이 귀여운 미소(저는 이 또한 음흉한 미소로 보입니다만)를 짓고 있습니다.
버거와 감자튀김, 어니온링, 그리고 기대하던 루트비어를 주문합니다. 머그잔으로 건네받은 루트 비어는 A&W 로고에 있는 색과 정확히 일치하는 갈색의 음료입니다. 거품이 조금 남아 있는데 추가 주문을 하면 플로트라고 하는 거품을 음료 위에 올려줍니다. 그 모습이 마치 백미(白米) 차를 휘저어 만든 오키나와 전통 음료 ‘부쿠부쿠(ブクブクー)’ 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소통의 오류가 있었는지 플로트 없이 나와 아쉬웠습니다.
루트 비어는 콜라와 비슷한 청량음료로 보이지만 그 맛은 개성이 아주 뚜렷합니다. 흡사 우리나라의 유명한 자양강장제가 연상되기도 하고, 모기약(실제 맛본 적은 없지만), 물파스, 감기약, 알 수 없는 향신료 맛이 납니다. 처음에는 이 맛이 신기하기도 하고 여러 약재가 들어갔다니 건강한 음료라는 생각으로 마셨는데, 이제는 뒤늦게 고수 식물의 맛에 길든 것처럼 이 맛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지점명 : A&W 牧港店 (Makiminato Branch / 오키나와 2호점)
주 소 : 4 Chome-9-1 Makiminato, Urasoe, Okinawa 901-2131
설립일 : 1969년 8월 25일
오키나와에 여행을 간다면 A&W에 들려 조금 특별한 맥주(라고 쓰고 음료라고 읽습니다)를 마셔보세요. 참고로 루트 비어는 오키나와에서 캔 음료로도 판매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