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주류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지난 2017년 세계에서 제일 비싼 와인은 프랑스 부르고뉴의 도멘 드 라 로마네 콩티 Domaine de la Romanée-Conti 라고 합니다. 보통 크기 75cl 한병의 평균 가격은 11,793 파운드, 즉 한화로 약 1700만 원이라고 하네요. 와인 한 잔당 280만 원이라는 얘기지요. 한국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저가 와인이 만원 안팎인 것을 고려하면, 약 천칠백 배의 가격 차가 나는 셈입니다.
대체 이 비싼 와인과 슈퍼마켓의 싼 와인과의 차이는 무얼까요? 알코올 도수가 더 높아 같은 양을 마시면 천 배 이상 취하는 것도 아니고, 위스키나 코냑처럼 삼십 년을 더 숙성시켜서 파는 것도 아닐 텐데, 이 엄청난 가격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전혀 상관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에 바로 내추럴 와인이 시작된 이유가 담겨 있습니다.
와인의 신토불이와 AOC
작년 안식년 여행 중, 가족들과 발리에 갔습니다. 술을 고르다 보니, 흥미롭게도 발리에서 생산하는 와인이 있더군요. 열대성 고온 다습한 그곳의 기후는 와인을 만드는 유럽 포도 품종인 비티스 비니페라(Vitis Vinifera)에 적합하지 않을 텐데 말이지요. 살펴본 결과, 포도를 호주에서 수입해와 양조만 발리에서 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우리가 접하는 보통 이상 품질의 와인들은 거의 다 포도가 재배된 원산지에서 양조 및 병입됩니다.
한때 유행하다 지금은 촌스럽게 들리는 표어, 신토불이만큼 와인에 적합한 표현이 없어 보입니다. 맥주, 위스키, 소주 등은 대부분 산지와 원료가 정해져 있지 않고, 재료의 선별과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질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해당 산지에서 생산된 좋은 포도가 필요합니다. 좋은 포도로 나쁜 와인을 만들 수는 있어도, 나쁜 포도로 좋은 와인을 만들 수는 없다는 말도 있지요. 와인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테루아(terroir), 포도가 자라고 익는 땅과 자연이며, 이를 담아내는 것이 이상적인 와인 생산자의 가장 큰 목표입니다. 즉, 와인과 토양은 둘이 아닌,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매년 포도 열매를 키워내는 토양과 자연, 그리고 그 지역의 오랜 전통과 노하우가 함께 하여 생산되는 독특하고 고유한 와인. 이것이야말로 여타 주류와 다른, 와인만의 개성이자 정체성의 근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보호하기 위하여 1935년 일찍이 프랑스는 원산지 통제 명칭 (아펠라시옹 도리진 콩트롤레 Appellation d’Origine Controlée, AOC)법을 입안하였습니다. 오늘날, 전세계 와인 생산국 대부분이 이와 비등한 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호강에 받쳐 요강에 똥 싸는 소리
세계인구는 처음으로 10억을 넘긴 1804 년 이후, 두 배인 20억이 되는데 120여 년이 필요 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그의 배인 40억으로 증가는 단 47년이 걸렸지요. 이런 폭발적 인구증가에도 불구하고 인류 전체가 기아에 허덕이지 않을 수 있었던 건, 20세기의 혁명적인 농업 발전 덕분이었습니다. 종자 개선, 기계화 및 화학 농약 및 비료의 확산은 농업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키며 우리를 먹여 살렸습니다.
18 세기부터 시작된 산업혁명 및 급속한 과학의 발전으로 인류는 땅과 자연을 하나의 도구로 여기게 됩니다. 여러 작물을 동시 재배하는 대신, 수확량 최대화를 위해 한가지 작물만을 집중적으로 생산하는 단일재배가 퍼지고, 잡초제거가 중요해집니다. 효율성을 위해 쟁기질 대신, 화학 제초제를 사용합니다. 불행히도 제초제는 논밭뿐 아니라, 주변 목초지와 삼림지대도 황폐화합니다. 해충을 잡아먹던 자연 포식자의 서식지가 줄어들고 천적이 없으니 해충은 신나게 번식합니다.
증가하는 병충해로 인해 농작물 손실이 생기자, 농약을 씁니다. 처음엔 잘 먹히던 농약이 점차약발이 떨어집니다. 살아남은 질병과 해충에서 내성이 생겼기 때문이죠. 게다가 더 강력한 변종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는 더욱더 독한 농약 사용으로 이어집니다. 문제는, 육상식물의 80%는 뿌리가 직접 필요한 영양소를 흡수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뿌리 주변에 있는 균근(mycorrhiza) 혹은 질소 고정 박테리아를 통해야 영양소 흡수가 가능하지요. 그러나 농약의 강한 화학성분은 토양에 있는 이런 이로운 미생물마저도 죽게 합니다.
식물의 영양소 흡수를 돕던 것들이 죽으니, 식물은 영양실조에 시달립니다. 농약과 세트로 파는 화학비료를 사다가 밭에 부어줍니다. 화학비료는 대체로 무기염, 즉 소금의 형태를 띱니다. 짠 음식 먹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듯, 식물은 화학비료가 함유된 토양에서 필요 이상으로 수분을 흡수합니다. 산업화 농산물이 무게와 부피만 크고 맛이 떨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생명을 보듬는 토양이 황폐화되고 주변 생태계의 균형이 깨지니, 나날이 인공화학제품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맙니다. 열매와 곡식을 키우고 영글게 하던 대지는 그 생명력을 잃고 한낱 뿌리를 지탱하는 물리적 도구로 전락합니다. 현대 농업의 서글픈 악순환입니다.
어렸을 때 밥상머리에서 반찬 투정이라도 할라치면, “가스나, 참말로 호강에 받쳐서 요강에 똥 싸고 있데이” 핀잔을 듣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숨 부지할 음식도 없어 굶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농약인들 어떻고, 대지가 죽어간들 어떻습니까? 이렇게나마 농업 생산성이 좋아져 전 인류를 먹여 살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앗, 그런데요. 지금 우리는 와인 얘기를 하고 있었지 말입니다. 쌀과 밀가루가 없어 굶어 죽는 사람은 들어봤어도, 와인이 없어 굶어 죽은 사람, 혹시 들어보셨나요? 와인은 질을 희생해서 양을 추구해야 하는 도덕적 무게를 짊어진, 인류생존을 위한 최소필수품이 아니라 기호품입니다. 자연과 신이 내린 선물이라던, 대지의 표현을 담는다던 와인이 정체성을 포기하면서까지 생산량을 최우선시하는 단순 농산물로 전락하다니요. 게다가 유럽연합에서는 지난 몇 십 년 동안 지나치게 증가한 생산량 때문에 와인이 남아돌아, 80년대에는 저품질의 포도밭을 갈아엎는 캠페인인 “Vine pull scheme”까지 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와인, 맥도날드랑 뭐가 달라?
와인 초보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와인계의 신화적 인물, 로버트 파커 Robert Parker. 미국 메릴랜드주의 변호사였던 그는 1978 년부터 와인 애드버킷 Wine Advocate 이라는 잡지를 출간하기 시작합니다. 와인 업계에 종사하지 않으면서도 전문가 못지않은 지식을 가진 파커는 보르도와 고급 와인을 위주로 하여 100점 만점으로 점수를 매겼습니다. 복잡한 글이나 분석 대신 명료한 숫자로 된 파커의 점수는 와인 문외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지요.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파커 점수는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평판을 중요시하는 부유한 베이비붐 세대들의 소비성향에 딱 알 맞춤이었고, 로버트 파커는 와인 마케팅 역사에서 유례 없는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사십 년이 지난 지금도 로버트 파커 포인트, 즉 RP는 와인 시장에서 절대적 영향을 과시합니다.
문제는, 파커의 개인적 점수들이 전 세계 와인 시장에서 엄청난 영향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파커가 선호하는 보르도 품종의 레드를 위주로, 농익은 포도로 만들어 새 오크통에서 숙성시킨 스타일이 높은 점수를 얻으며 시장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를 벤치마킹하며 토양이나 기후 조건에 상관없이 너도나도 이런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달큼한 검은 과일 향에 새 오크통의 바닐라, 삼나무, 커피, 훈제 등의 향. 농익어 부드러워진 포도의 타닌에 오크의 타닌이 더해져 입안을 가득 메우면서도, 높은 알코올과 낮아진 산도로 달짝지근, 매끈한 목 넘김을 가지는 파커 취향의 와인. 이런 «인터내셔널 스타일»로 분류되는 와인들이 시장에서 높은 가격을 형성하며 잇따라 성공합니다. 과다성숙과 오크로 하나같이 비스무레 하게 성형한 술들이, 와인의 가장 중요한 요소, «장소감 Sense of place»를 잃고 매장 진열대를 채웁니다.
한편, 와인이 대중화되고 일반상품화 되면서 기후조건이 좋은 신세계에서는 대량으로 포도를 생산 및 양조하는, 와인의 대규모 산업화가 이뤄집니다. 유럽 구대륙의 소규모 생산자들 보다 걸린 판돈이 큰 만큼 위험을 줄이기 위해 온갖 첨단 기술과 방법을 동원합니다. 대형마트나 체인에서 저가로 대량 판매할 상품이므로, 결함 없이, 완벽하게 대중의 입맛에 맞춘 «기술적인 와인».
단맛을 선호하는 신세계 대중의 취향에 맞게 발효 후 포도당 혹은 열처리된 포도 주스를 더합니다. 그리고 비싼 오크통 대신, 오크 칩이나 조각을 넣어 차 우려내듯 우려내어, 흔한 인터내셔널 스타일의 고급 와인과 비슷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저명한 와인 화학자이자 양조자인 야이르 마갈릿은 한 국제 와인 콩쿠르 심사에서 전 세계에서 온 열다섯 병의 고급 와인을 시음한 후, 이렇게 말합니다.
“분명 모두 정말 아름답고 잘 만들어졌지만, 시음 후, 마치 한 곳에서 온 마냥 획일화된 맛을 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중적인 맛, 혹은 단맛이 나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파커 스타일의 고급 와인이나, 대량생산된 저가 와인은 오히려 와인을 처음 접하는 사람의 입맛에 더 친절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와인은 당분 외에도, 산도, 타닌, 질감, 구조감과 여운이 조화를 이루며, 생산된 장소, 연도, 생산자에 따라 각기 독특한 표현을 가지는 섬세한 음료입니다. 마치, 세상에 완벽히 같은 존재가 없고, 같은 부모 아래 나온 자식들, 심지어 쌍둥이들조차도 다 다른 개성을 가진 우리 인간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표준화 되어가는 와인 시장에서 가장 큰 손해를 볼 사람은 바로 소비자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줄어드는 것이지요. 자신이 나고 자란 땅과 자연을 충실히 담아내는 와인 한 잔은 마치 잘 쓴 명작 한 권과 같습니다. 비행기를 타지 않고 조금의 상상력만으로도 집에 앉아서 전 세계를 여행하며 역사의 흔적까지 느낄 수 있지요. 제일 잘 팔리는 스타일로만 비슷비슷하게 만들어진 와인으로는 슬프게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만 원짜리 와인과, 천칠백만 원짜리 와인의 차이점
그럼 다시, 첫 물음으로 돌아와 볼까요? 만 원짜리 와인과 차 한 대 값에 맞먹는 이 비싼 와인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여러 차이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요인은 바로 로마네 콩티의 상징성과 고유성일 것입니다.로마네 콩티라는 이름을 가진 1.8ha, 약 5500평의 밭에서, 산업화하지 않은 방식으로 자란 포도로, 전통적 방식으로 빚은 와인. 물론 매해 겨우 5000~5500 병만을 생산하는 희소성도 하나의 이유겠지만, 그 정도의 소규모 와인 생산자들은 부르고뉴나 다른 지역에서도 얼마든지 있고, 희소성이 반드시 높은 수요와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하나의 테루아, 그곳에서 나는 와인만이 가질 수 있는 진정성과 장소감, 정체성. 이에 충실하다는 것은 다른 와인들이 흉내를 내거나 따라 할 수는 있을지언정, 절대로 똑같을 수 없음을 뜻합니다. 반대로, 토양과 자연에서 동떨어져, 첨단농법과 각종 화학제품으로 안전하게 대량생산되어, 대중에 입맛에 알맞게 맞춤상품으로 만들어지는 와인은 너무도 쉽게 대체재를 구할 수 있지요. 귀하지도, 희소하지도 않으며, 유행에 따라 시장성만 남은 와인이 장수하며 귀한 대접을 받기 힘든 이유이기도 합니다.
땅, 자연과 공존하기보다는 생산성 혹은 이윤을 가장 우선시하는 시장의 논리. 이로 인해 인공적이고 개성이 없는 와인이 범람합니다. 여기에 반기를 들며 곳곳의 와인 생산자들이 내추럴 와인을 시작합니다.
다음 글 에는 내추럴 와인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참고문헌
텔레그래프, https://www.telegraph.co.uk/business/2017/08/14/10-expensive-bottles-wine-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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