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조약으로 처음으로 수입되어 한국에 등장한 서양의 맥주는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서 자체 생산된 이후 줄곧 오비맥주와 하이트맥주의 양대 대기업 맥주가 한국 맥주 시장을 이끌었습니다. 21세기가 되었을 즈음, 조금 낯설지만 한국에도 수제 맥주가 등장했습니다. 이제 20년이 조금 넘은 한국의 수제 맥주는 미국의 크래프트 맥주의 성장 속도만큼은 아니어도 성장 가능성이 무한합니다.
한국 맥주의 슬픈 과거는 일본 맥주였습니다. 한국의 맥주는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으로 인해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이 일본과 맺은 불평등 조약이었고, 이 조약으로 인해 일본의 상품이 무관세로 수입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맥주도 있었는데 삿포로 맥주가 일본에서 수입된 최초의 맥주였으며, 에비스 맥주와 기린 맥주가 연달아 수입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일본은 우리의 땅에서 그들의 자본과 기술로 맥주를 직접 생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1933년, 대일본맥주(삿포로 맥주, 아사히 맥주, 에비스 맥주가 합쳐진 회사)가 교통의 요지 영등포에 조선맥주 주식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해 12월에는 기린맥주가 역시 영등포에 쇼와(소화) 기린맥주를 설립했습니다. 이 두 회사는 현재의 하이트맥주와 오비맥주의 전신에 해당합니다. 한국 맥주는 줄곧 오비맥주와 하이트맥주의 양강 체제였습니다. 물론 카스맥주가 오비맥주에 흡수되기 전 3개의 맥주 화사가 동시대에 존재하기도 했고, 한독맥주라는 비운의 맥주회사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롯데맥주까지 더해 한국에서 3번째로 3개의 대기업 맥주 회사가 동시에 존재하는 시대입니다.
한국에서 수제 맥주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월드컵이 개최된 2002년입니다. 대한민국은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 대회에서 4강에 오르며 한국 축구사의 변곡점을 썼지만, 이 해 수제 맥주가 처음으로 허용되어 맥주사에서도 변곡점을 썼습니다. 정부는 그동안 묶어 놓았던 경제정책과 문화와 예술 등의 각종 규제를 풀어 국제적인 행사를 앞두고 선진국 수준의 비즈니스 여건을 만들고 대중이 참여하는 문화를 이루어 주었습니다. 주세법에는 소규모 맥주 면허가 도입되어 지금보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소규모 맥주 양조가 허용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이를 ‘하우스 맥주’라고 불렀고 양조한 곳에서 맥주를 팔 수 있는 형태였습니다. 새로운 맥주에 대한 호기심과 대기업 맥주의 지루함은 수제 맥주의 열풍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서울을 중심으로 시작한 수제 맥주는 지방으로 확산되어 2005년에는 115개로 늘어날 만큼 그 인기는 폭발적이었습니다. 이를 흔히 수제 맥주 1세대라고 부릅니다. 서울의 바네하임, 경기의 카브루, 울산의 트레비어와 화수브루어리, 대전∙충청의 바이젠하우스 등이 이 시기에 탄생하여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는 브루어리입니다. 1세대의 수제 맥주의 특징은 대부분 독일식 맥주였다는 점입니다. 황금색의 맑은 필스너, 향긋한 밀맥주 바이젠, 어두운 라거 둥켈은 일명 ‘필바둥’이라 하며 인기를 끌었습니다.
하지만 초기의 열풍은 빠르게 식어갔습니다. 정점을 찍은 수제 맥주 양조장의 개수는 2013년에는 58개로 감소했습니다. 그 이유는 맥주를 만든 곳에서만 맥주를 팔 수 있다는 제한 때문이었습니다. 외부로의 유통이 막히니 더 이상의 이익을 낼 수 없는 구조가 발목을 잡은 것입니다. 전문 양조사의 부족도 문제였습니다. 초반 수입 장비를 도입하면 몇 년간 본국의 양조 기술자들이 함께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들이 떠나자, 맥주의 품질에 일관성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자 열광적이었던 대중들의 관심도 식어갔습니다. 분명 필바둥은 새로운 맥주였지만 이제 필바둥 이외에는 새로울 것이 없었고, 게다가 맥주의 품질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수제 맥주라는 마당을 나온 암탉은 크래프트 맥주가 되었습니다. 꺼져 가던 수제 맥주 시장은 또 한 번의 주세법 개정과 미국 크래프트 맥주의 등장으로 인해 살아났습니다. 2013년에 개정된 주세법에서는 수제 맥주의 외부 유통이 허용되었습니다. 즉 브루펍 마당을 나온 수제 맥주가 크래프트 맥주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2015년에는 소규모 맥주 제조자에 대한 과세표준 경감 조치가 이루어졌고, 2017년 개정에도 소매점 유통 허용, 맥주 재료 확대 등 소규모 맥주 제조자에 유리한 몇 가지 내용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미국의 크래프트 맥주와 맥주 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수제 맥주를 크래프트 맥주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필바둥에 익숙했던 대중들은 미국식 페일 에일과 IPA를 접하게 되었고, 수입사는 미국 크래프트 맥주 이외에도 벨기에 맥주나 영국 맥주 등을 경쟁적으로 수입하였습니다. 수제 맥주 1세대 오너들이 비즈니스 측면에서 시장에 뛰어들었던 반면, 2세대의 오너들은 맥주에 좀 더 집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미 외국에서 실력과 경험을 쌓고 양조를 시작했거나 아니면 외국인들이 직접 운영하는 브루어리들이 등장하였습니다. 수도권의 어메이징 브루어리, 플레이그라운드, 핸드앤몰트, 맥파이 브루잉, 부산의 갈매기 브루잉, 고릴라 브루잉, 와일드 웨이브, 대전∙충청의 더랜치, 칠홉스 브루잉 등이 이 시기에 생겨난 양조장입니다.
2020년은 한국 수제 맥주 역사의 3번째 변곡점이 되었습니다. 스마트 오더가 허용되어 온라인으로 주문하고 찾아가는 서비스도 가능해졌고, 위탁 제조도 허용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맥주의 세금이 종가세에서 종량세로 바뀐 것입니다. 종가세에서는 맥주의 가격에 비례하여 세금을 부과하였지만, 종량세에서는 맥주의 가격과 상관없이 맥주의 양에 비례해 세금을 부과합니다. 수제 맥주가 대기업 맥주에 비해 좋은 재료와 많은 재료를 사용하다 보니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었는데, 이 개정으로 가격 경쟁력 측면이 조금이나마 해소된 것입니다. 플래티넘, 제주맥주, 세븐브로이, 카브루 등 편의점에서 4캔 만 원에 살 수 있는 한국 맥주는 대부분 이러한 혜택을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수제 맥주는 이제 스물을 갓 넘었습니다. 어느덧 보호받아야 하는 나이에서 스스로 성장해야 하는 나이가 된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의 수제 맥주는 성장을 거듭하며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섰습니다. 미성숙한 한국 맥주의 성장을 조심스럽게 지켜봤지만, 앞으로는 성년식을 치른 맥주를 흐뭇하게 지켜봐도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