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색 레이블이 인상적이었던 루 뒤몽(Lou Dumont). 와인을 소재로 한 만화, “신의 물방울”에도 등장하며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던 와인이 있다. 놀랍게도 이 와인을 만든 사람은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 토박이도 아니고 대대손손 포도밭을 물려받아 와인을 양조한 이도 아닌 부르고뉴로 유학을 왔던 동양인 부부이다. 소믈리에 출신 일본인 나카다 코지(Nakada Koji)와 그의 아내인 박재화 대표가 탄생시킨 이 와인은 그들의 열정과 품질에 대한 고집이 담겨 한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다른 국가에서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와인에 새겨진 ‘천지인’은 하늘과 땅이 먼저고 그다음이 사람이라는 와인 메이커의 철학을 말해준다. 와인은 기후, 토양 등 자연이 빚어내는 것이지 사람이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겸손함이 담긴 와인이다.
프랑스에만 한국인의 손길이 닿은 와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와인 신대륙인 미국으로 가보자. 미국 대통령 조 바이든(Joe Biden) 방한 중 정상회담 공식 만찬주로 사용한 게 미국 나파 밸리의 샤또 몬텔레나 샤르도네(Chateau Montelena Chardonnay)와 다나* 에스테이트 바소(Dana Estate Vaso)인데 그중 다나 에스테이트는 나파 밸리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인이 소유한 와이너리다. 이희상 전 동아원 회장과 그의 사위이자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들인 전재만이 경영하는 와이너리로 알려지면서 엄청난 관심을 받은 와인이기도 하다. 설립 후 3년 만에 세계적인 와인 비평가 중 하나인 로버트 파커(Robert Parker)로부터 100점을 받은 로터스 빈야드(Lotus Vineyard) 등의 싱글 빈야드 와인들과 온다(Onda)가 있다. 모든 업계가 그러하겠지만 와인을 양조하지도 않는 나라에서 온 이방인이 만드는 와인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는 당연해 보인다. 와인 사업에 쏟아부은 막대한 자본의 출처와 실소유주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와인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은 긍정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로는 필립 멜카(Philippe Melka)와 같은 스타 와인 메이커이자 컨설턴트 영입도 포함된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2~3년 전 마셨던 바소(Vaso)도 꽤 괜찮았다. 카베르네 소비뇽을 주 품종으로 하며 다채로운 아로마에 산미와 타닌의 밸런스도 좋은 레드였다.
오리건 주(州)도 미국의 와인 산지 중 하나이지만 한국에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곰표 밀가루로도 알려진 대한제분의 와이너리가 있다. 스페인어로 ‘도서관’이라는 의미를 가진 **라 비블리오테카(La Biblioteca). 오리건에 직접 와이너리를 세운 것은 정말 대단한 도전인데 키우기 까다롭다는 피노 누아(Pinot Noir) 품종이라니 와인 메이커의 열정과 노력이 느껴진다. 연간 생산량은 매우 적은 편으로 찾아보니 비노스(Vinous)로부터 좋은 평가를 꾸준히 받고 있는데 섬세한 와인으로 알려져 있다.
거대 기업의 여러 관심사 중 하나로 주류를 꼽을 수 있는데 한국 대기업도 와이너리 인수에 뛰어들었다. 신세계 그룹 계열사가 인수한 미국의 와이너리, 쉐이퍼 빈야드(Shafer Vineyards). 3,000억 이상을 투자해 인수했다는 보도가 이어지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와인인데 (쉐이퍼 메를로가 없어지고 원포인트파이브가 생긴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가격이 꽤 올라 슬프다. 여하튼 신세계 그룹 계열사 소유가 된 쉐이퍼 빈야드는 전설적인 스크리밍 이글(Screaming Eagle)을 만든 양조가의 와일드푸트 빈야드(Wildfoote Vineyard)를 인수하더니 미국 나파 밸리 내 아틀라스 픽(Atlas Peak)에 위치한 얼티미터 빈야드(Altimeter Vineyard)까지 사들이면서 몸집을 키우고 있다.
마스터 오브 와인 시험 중 가장 어려운 시음 평가를 통과한 최초의 한국인이자 뛰어난 와인 양조가며 마이크로 네고시앙 가람(Garam)의 대표인 남경화 대표는 프랑스 그라브(Graves) 지역 화이트 와인인 ***레 트와 망(Les Trois Mains)을 국내에 선보여 좋은 인상을 남겼다. 품질 좋은 포도를 골라내는 일, 포도밭을 꼼꼼히 돌보는 일, 발효와 숙성의 시간, 섬세한 양조 기술, 와인에 담긴 자연과 사람의 이야기, 와인 레이블로 표현하는 와인의 첫인상 등 많은 요소가 마침내 하나가 되어 만들어지는 와인이 오늘따라 더 대단해 보인다.
*다나는 산스크리트어로 ‘관용’을 의미이며 이희상 회장의 호인 ‘단하’에서 비롯되었다.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거장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대표작, ‘바벨의 도서관(La Biblioteca de Babel)’에서 영감을 받아 지은 이름이다.
***레 트와 망은 소비뇽 블랑과 세미용 블렌딩 화이트 와인이고 와인 레이블도 한국인 디자이너가 참여해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