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수많은 미덕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음식의 맛은 풍부하게, 분위기는 무르익게 해준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물론 가벼운 한 잔으로 기분과 입맛을 돋운 후에는 조금 더 진득한 술을 곁들이며 깊숙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그런 순간에 딱 어울리는 것이 바로 주정 강화 와인, 그러니까 높은 도수의 브랜디를 더해 독하게 만든 와인이다. 백년전쟁 이후 보르도가 영국의 속령에서 벗어나면서 보르도 와인을 대체할 술을 찾던 영국인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와인에 손을 뻗었는데, 이때 영국 수출을 위해 배에 실려 멀리 이동하는 와인의 변질을 막으려고 도수를 높인 것이 주정 강화 와인의 유래라고 한다. 오늘은 널리 알려진 주정 강화 와인의 종류와 그에 어울리는 음식들에 대해 알아보자.
1. 포트 (Port)
포르투갈 제2의 도시, 포르투의 도우루 강 너머 즐비한 와이너리들은 주정 강화 와인 중 가장 잘 알려진 포트 와인을 주로 생산한다. 투리가 나시오날(Touriga Nacional), 투리가 프랑카(Touriga Franca), 틴타 로리츠(Tinta Roriz), 틴타 바로카(Tinta Barroca) 그리고 틴토 카옹(Tinto Cão) 등이 포트 와인 양조에 사용되며, 이들 포도를 발효하다가 일정 시점에 70도 정도의 향과 맛이 거의 없는 포도 브랜디를 섞어 발효를 중지시킨다. 그러면 당분이 알코올로 변하는 작용이 멈추면서 단맛은 남지만, 도수 높은 브랜디를 섞었기에 알코올 함량은 오히려 높아진다.
평균 19~20%의 알코올을 함유한 포트는 얼마나 혹은 어디에서 숙성시키느냐에 따라 프루티하고 상큼한 루비 포트(Ruby Port: 오크통에서 보통 3년 이하로 숙성), 말린 과일과 잼, 초콜릿 같은 아로마를 선사하는 LBV 포트(Late-Bottled Vintage Port: 작황이 좋은 해의 포도만 원료로 하여 4년 이상 오크통 숙성), 풀 바디에 커피와 향신료의 뉘앙스까지 느껴지는 빈티지 포트(Vintage Port: 그해 수확한 최상의 포도만 사용하며 병입 전 숙성 기간은 18~36개월로 짧지만 보틀 에이징 가능), 그 빛깔에 어울리게 너티하고 스모키한 풍미를 자랑하는 토니 포트(Tawny Port: 여러 종류의 빈티지 와인을 블렌딩하여 2~3년은 큰 통에서, 이후에는 작은 통에서 숙성) 등으로 나뉜다.
Pairing: 숙성 방식과 기간에 따라 그 풍미가 달라지는 만큼 포트의 종류에 맞추어 페어링할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상큼한 루비 포트에는 붉은 과일이 올라간 타르트를, 조금 더 진득한 LBV 포트에는 트러플 초콜릿이나 숙성된 파마산 치즈를 곁들여 보자. 견과류의 풍미가 느껴지기 시작하는 빈티지 포트와 에이지드 토니 포트에는 호두나 아몬드, 혹은 고르곤졸라를 비롯한 블루치즈가 어울린다. 적어놓고 보니 디저트가 주를 이루지만, 그렇다고 식사를 마무리하는 단계에서만 포트를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아쉬워할 필요 없다. 포크립이나 풀드 포크(Pulled Pork: 천천히 익혀 손으로 찢은 돼지고기)에 달콤한 소스를 곁들이면 포트와 꽤 괜찮은 짝꿍이 된다.
2. 셰리(Sherry)
과일 체리, 혹은 프랑스어 셰리(Chéri/Chérie: 영어의 ‘달링’에 해당하는 호칭)와 비슷한 발음 때문일까. 셰리라는 술의 존재를 처음 알았을 때 막연히 영롱한 빨간색의 달콤한 술을 상상했었다. 하지만 셰리는 빨갛지도, 대부분 달지도 않다. 화이트 품종으로 만들고 포트와 달리 발효가 이미 끝난 시점에 브랜디를 첨가하기 때문. ‘셰리’라는 이름의 유래 역시 과일 체리나 프랑스어 셰리와는 관련이 없는데, 스페인 남부의 헤레스 델라 프론테라(Jerez de la Frontera)에서 생산되어 붙은 ‘헤레스’라는 이름이 영어식으로 바뀐 것이다.
셰리는 ‘솔레라(Solera)’라는 독특한 블렌딩 시스템을 이용해 일정한 맛과 향을 유지한다. 파이프로 연결된 오크 통을 층층이 쌓아두고, 아랫줄로 갈수록 오래된 술을 담는다. 가장 오래된 술을 일정량 빼서 병입하면 위층에 있던 새 술들이 아래로 내려와 섞이고, 가장 윗단의 빈 공간에는 다시 새 와인을 채운다. 이런 식으로 빈티지가 달라도 풍미의 편차가 크지 않은 셰리가 탄생하는 것이다.
셰리의 종류는 크게 피노(Fino)와 올로로소(Oloroso)로 나누어볼 수 있다. 발효를 마친 와인 위에 ‘플로르(Flor)’라고 하는 이스트의 막이 형성되는데, 이 막은 공기와의 접촉을 막아 와인의 산화를 방지해 주며, 빵의 고소한 풍미와 톡 쏘는 레몬 같은 아로마를 더해준다. 그런데 이 이스트는 알코올 함유량이 많아지면 죽어버린다. 15도 정도로 만드는 피노와 달리 18도까지 올라가는 올로로소에는 플로르가 생길 수 없고, 공기와 만난 와인의 맨살은 산화되어 견과류와 커피, 육류의 향을 갖게 된다.
피노를 오래 숙성해 플로르가 죽으면 피노와 올로로소의 특징을 반반씩 가진 아몬티야도(Amontillado)가, 피노와 올로로소에 농축 포도 주스를 더 하면 각각 달콤한 맛의 페일 크림 셰리(Pale Cream Sherry)와 크림 셰리 (Cream Sherry)가 탄생한다. 처음부터 포도를 말려 달콤한 맛을 강조하는 페드로 히메네스(Pedero Ximenez)도 있다. 시럽처럼 느껴질 정도로 농도가 짙고 백포도로 만드는데도 색이 검정에 가까울 정도로 어두우며, 말린 무화과, 자두, 포도의 풍미를 강렬하게 내뿜는다.
Pairing: 단맛이 없는 만큼 셰리의 페어링 범위는 포트에 비해 넓은 편이다. 피노는 올리브나 아몬드에 곁들여 식전주로 마셔도 좋고 짭짤한 하몽이나 초리조와도 괜찮은 궁합을 자랑한다. 아몬티야도는 새우나 해산물 수프 같은 스타터 메뉴에서부터 로스트 치킨 같은 메인 메뉴까지 커버하며, 올로로소는 보다 무거운 육류 요리 – 소고기 스테이크나 소꼬리 요리, 블랙 푸딩, 파테 등 -과 시너지 효과를 낸다. 달콤한 페드로 히메네스는 초콜릿 아이스크림, 피칸 파이, 모카 푸딩처럼 비교적 묵직한 풍미의 디저트들과 잘 어울린다.
3. 마데이라(Madeira)
와인의 품질 저하를 막고 맛과 향을 오래 보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와인 애호가들은 ‘산화와 열화 피하기’라 답할 것이다. 그런데 대서양의 화산 섬, 마데이라에서 생산하는 동명의 와인 마데이라(Madeira)는 이와 정반대 방법으로 생산된다. 대항해 시대 무렵 이미 와인 산업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마데이라는 아메리카 대륙이나 동인도 등지로 물건들을 실어 보내는 거점 항구이기도 했는데, 포트나 셰리와 마찬가지로 이동 중 와인의 변질을 막기 위해 주정 강화 방식을 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해를 떠났다가 팔리지 않고 돌아온 일부 와인은 떠나기 전과 크게 달라진 독특한 풍미를 자랑했고, 와인 생산자들은 구운 견과와 캐러멜을 연상케 하는 이 매력적인 아로마를 재현하기 위해 45도 이상의 고온 창고에서 와인을 숙성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비교적 저렴한 마데이라는 보일러 시스템이 장착된 스테인리스 배럴 에스투파(Estufa)에서 숙성되며, 고급 마데이라의 경우 태양 빛을 받아 온도가 올라가는 다락방에서 2~3년간 천천히 숙성한다.
마데이라 와인은 양조에 사용되는 주 포도 품종에 따라 세르시알(Sercial), 베르델호(Verdelho), 보알(Boal) 혹은 부알(Bual), 말바시아(Malvasia) 혹은 맘지(Malmsey) 그리고 유일한 레드 와인인 틴타 네그라 몰레(Tinta Negra Mole)로 나뉜다. 주로 틴타 네그라와 베르델호를 블렌딩해 만드는 엔트리급 레인워터 마데이라(Rainwater Madeira)도 있다.
Pairing: 시트러스 계열의 날카로운 산미가 특징인 세르시알은 당연히 생선 요리에 잘 어울리며 아티초크나 아스파라거스, 완두콩 등 단단한 채소와 매치해도 좋다. 세르시알보다 살짝 더 달고 힘찬 산미와 단단한 미네랄리티를 고루 갖춘 베르델호는 생선이나 흰 살 육류, 약간의 매운맛이 더해진 아시아 음식과 합이 좋다. 캐러멜, 시나몬, 태운 설탕 등의 풍미와 보다 강렬한 단맛을 자랑하는 보알은 양고기 요리나 말린 과일, 말린 과일을 넣은 케이크와 어울리며 가장 달콤하고 묵직한 말바시아는 블루치즈, 캐러멜, 크렘 브륄레에 곁들이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