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국립극장에서 한국 전통주 시음회를 마치고 루마니아 대사님 초대로 저녁 식사를 했다. 늦은 시간이라 대사님의 관저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며 루마니아 현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식사에 루마니아의 전통주인 폴링카(Palinka)가 서빙되었다. 폴링카는 루마니아의 전통술로 주로 자두, 살구, 체리 등 과일을 증류한 증류주, 브랜디이다. 그렇지 않아도 시음회 때 귀빈에게 계룡백일주와 폴링카가 비슷하다고 들은 바가 있어 호기심을 안고 테이스팅했다. 서빙된 폴링카는 자두로 만들었는데 검은 과실의 풍미와 적당한 산미가 느껴졌다. 한 모금 마시니 입안에 알코올이 짜릿하게 느껴지고 뒤이어 향긋한 자두와 오크의 묵직한 향이 퍼졌다. 고도주라 술기운도 오르고 시음회도 성공적으로 끝나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날 홀가분한 마음으로 즐긴 자유시간. 루마니아 국립 박물관, 올드타운을 구경하고 저녁에는 시음회에 함께 애써준 모닝 루마니아 팀장인 Johnny가 루마니아 전통 레스토랑인 “Caru’ cu Bere”를 소개해주었다. 130년이 넘은 부카레스트의 가장 오래된 레스토랑으로 루마니아 전통 음식과 공연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서양에서는 음식 주문하기 전에 음료, 술을 먼저 주문하는 게 일상이지만 Johnny는 폴링카부터 주문하였다. ‘설마… 빈속에 샷부터 마신다고?’ Johnny에 의하면 루마니아 음식이 치즈와 고기 위주이기 때문에 폴링카 같이 독주를 마셔서 소화를 돕는다고 한다. Aperitif 라고 부르는 식전주는 보통 씁쓸한 맛이 도는 술을 칵테일이나 얼음에 섞어 낮은 도수로 마시곤 했다. 하지만 폴링카처럼 45도가 넘는 고도주를 샷으로 마시는 건 처음 겪어본 일이었다. 시작부터 기분 좋게 술 한 잔에 여러 음식이 나왔다. 루마니아 전통춤 공연도 멋지고 중간에는 댄서들과 손님이 즉석 춤을 추기도 하며 작은 축제 분위기를 만끽했다.
그다음 날은 부카레스트에서 2시간 반 북쪽에 위치한 브라쇼브(Brasov)로 떠났다. 길을 돌아가기는 하지만 트랜스파가라산(Transfagarasan)을 둘러 가기 위해 렌터카를 빌려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 트랜스파가라산은 자동차 광고에 자주 나오는 길로, 산과 호수를 따라 길을 깎아 경사와 커브가 굉장히 굽이진 도로이다.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드라이브하고 싶은 도로로 손꼽히는 곳이다.
외진 시골을 따라 1차선밖에 없는 도로를 2시간 달려 트랜스파가라산의 시작점에 닿았다. 커다란 호수를 따라 길이 얼마나 구불구불한지 속도를 내는 건 엄두도 내지 못한다. 중간에 100마리 정도의 양 때를 만나기도 하고 멋진 경치에 탄성을 내지르며 2시간 30분 동안 드리프팅 하는 기분으로 나름 멋진 드라이브를 즐겼다.
여기서 2시간을 더 달려 드디어 브라쇼브에 도착하였다. 유럽을 자주 여행했지만, 그중에서도 브라쇼브의 분위기는 독특했다. 중세 동유럽의 느낌이 가장 많이 느껴지는 곳으로, 오래된 건물의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7시간 운전을 끝으로 예약해둔 에어비앤비 숙소로 들어가 호스트인 다니엘을 만났다. 숙소 리뷰를 보니 다니엘이 손님에게 폴링카를 한잔씩 준다고 하길래 루마니아 집을 구경도 할 겸 호기심에 예약했다. 과연 다니엘은 내가 짐을 풀기도 전에 웰컴주를 주겠다며 주방으로 안내했다. 예상외로 상표가 없는 플라스틱 통을 꺼내 술을 따라주었다. “오! 이거 홈메이드야?”라고 물으니 다니엘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자기가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취미로 만드셨는데 돌아가시고 나니 아버지 생각이 나서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서 마시려고 잔을 들었는데 다니엘이 마시기 전에 무슨 과일인지 맞혀보라고 했다. 습관처럼 잔에 코를 갖다 대니 다니엘이 손바닥에 한방을 떨어트려 손바닥을 비비고 술을 증발시킨 후 냄새를 맡으면 더 향을 알 수 있다며 가문의 비법을 알려주더라.
과연 손바닥을 마주하여 비빈 후 향을 맡으니 아리송하게 과일 향이 돌았다. 소믈리에의 자존심을 걸고 “음… 살…구…?”라고 자신 있게 소심히 대답했다. 다니엘이 씨익 웃으면서 맞추었단다. 다니엘이 건배를 외치고 입안에서 살구의 향긋함을 천천히 음미했다. 홈메이드라고 해서 긴가민가했는데 생각보다 품질이 좋았다. 살구 맛도 느껴지고 목 넘김도 나쁘지 않았다. 내 전공을 살려 차근차근 설명해주니 다니엘이 신이 나서 다른 것도 맛을 보여주었다. 본인이 제일 좋아한다는 체리, 그리고 루마니아에서 귀하다는 딸기 폴링카를 맞보았다. 역시 나에게는 술과 음식이 따르나 보다. 에어비엔비에서 이런 경험을 할 줄이야. 이렇게 브라쇼브 여행의 시작은 폴링카와 함께 향긋하게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