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종로를 좋아한다. 진짜 서울의 모습을 담고 있는 듯한 종로. 종묘 근처로 해서 귀금속 시장과 청계천, 철물 상가로 이어지는 그 낯설고 오래된 건물들. 비 오는 날이면 쾨쾨한 냄새가 슬쩍 묻어나고, 해가 쨍쨍 내려치는 날이면 짐을 나르는 사람들의 땀내와 청계천의 청명한 냄새가 어우러진다. 현대식 고층건물이 빼곡한 뒤편에 자리한 그 작은 골목골목들. 500년 수도의 본 모습은 거기에 있다. 사람들이 살아가고 시장이 형성되는 그곳.

<사진 : 서울미래유산>

사실 부채를 부치며 장사하는 할아버지나 짐 나르는 아저씨들의 전용인 그 작은 골목을 들어가 본 적은 없다. 청계천을 따라 내려오며 구경을 하다 번화가로 나와 식사하거나 커피를 마시기 일쑤다. 그런데, 며칠 전 우연한 기회로 그 골목을 들어갔다. 오래됨, 나이듬, 노동의 전유물인 그 골목은 내 예상처럼 구불구불하고 불친절한 길이었다. 하지만 나와 친구의 목표는 맛집 프로그램에 나온 순대국집. 좁다란 골목과 커다란 부자재의 방해는 불청객인 우리를 막지 못했다. 그 더운 날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도착한 순댓국집은 허름하고 좁은, 오래된 동네 골목에 자리 잡아 아는 사람만 안다는 그런 부류의 맛집이었다. 메뉴는 딱 세 개. 순댓국, 모둠 안주, 술국.

식탁은 에메랄드색 플라스틱이고 의자는 등받이 없는 동그란 검은 의자, 주방과 홀의 경계가 모호한 그런 작은 식당 안에는 이미 몇 분의 아저씨가 자리를 잡고 있었고 젊은 여자는 나와 친구뿐이었다. 쭈뼛거리며 자리에 앉아 순댓국을 주문했다.

앉아 있는 우리 뒤로 땀내를 흥건히 풍기는 아저씨 한 분이 터덜터덜 앉았고, 그 옆 테이블에는 세련된 회색 양복바지에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얇은 고동색 가죽구두를 신은 30대 남성분이 앉았다. 그들도 모두 순댓국을 시켰다. 옷차림도 각각, 생김새도 들쑥날쑥, 나이대와 성별도 천차만별인 사람들이 모두 순댓국을 시켜 좁은 식당 안에서 같이 먹었다.

뭐, 먹는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그 순댓국은 정말 맛있었다. 보통의 찹쌀 순대가 아닌, 고기와 야채로 창자를 채운 순대와 머리 고기로 가득한 뚝배기는 순식간에 비워졌다. 국물은 어찌나 시원한지. 흰 접시에 담아져 나온 깍두기 한 조각에 밥 말아진 국물만 먹어도 모자람이 없었다.

순댓국에 어찌 술이 빠질쏘냐. 우리는 소주 한 병을 시켜 너 한잔, 나 한잔하며 잔을 채웠다. 문 앞에 자리 잡은 아저씨들은 모둠 안주와 함께 벌써 두 병을 비운 참이었다. 순댓국을 반절 이상 먹고나서 시킨 소주라 안주가 금방 부족해졌다. 친구랑 나는 엄청 고민했다. 모둠 안주를 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 하지만 그때는 1시 반밖에 되지 않은 시간이었고 한 명은 취준생, 한 명은 대학생은 우리는 쪼그라든 지갑 사정을 생각하며 안주 고민을 접었다. 반쯤 남은 소주는 다음을 기약하며 뚜껑을 덮어놓고 햇볕이 작열하는 여름의 종로 거리를 알딸딸한 기분으로 걸어 다녔다.

듣기만 해도 더워지는 순댓국. 순댓국은 약간 쌀쌀한 늦가을에 가장 어울린다. 아니면 춥고 배고픈 겨울날 손을 비벼가며 집 앞 아무 식당에서나 시켜먹어야 진정한 맛이 우러난다. 고급 식당이 아닌 조그만 식당에서 후루룩 먹어야 진짜배기 ‘순댓국‘을 먹은 것 같다. 발달 과정만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후기 장터를 중심으로 발달한 음식으로, 양반들은 거의 먹지 않았고 시장 상인들과 서민들이 주로 애용했다.

순대가 맨 처음 기록된 6세기 중국의 농경 서적인 제민요설에 의하면 ‘양고기와 양장으로 만든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1039년 북송 때 발간된 사전인 집운에 순댓국 ‘참‘에 대한 뜻풀이가 실려있는데 돼지 창자에 산초가루와 겨자, 된장, 소금을 넣고 끓인 국이라고 나온다. 사실 이때만 해도 손이 많이 가는 고급 음식이었으나 조선 시대 후기 장터나 주막에서 보부상과 농민의 철분, 단백질 보충용으로 쓰이면서 대중적인 음식이 된 것이다.

뭐, 우리나라에서만 순대가 서민적인 음식인 건 아니다. 서양문명 국가에 나가보면 시장이나 마트에 소시지가 주렁주렁 걸려있는 걸 쉽게 볼 수 있다.

<사진 : worldfood.com>

소시지나 순대나 만드는 방법은 똑같다. 돼지 창자에 여러 가지 소를 넣은 게 순대이고 고기만 채운 게 소시지다. 어느 게 먼저 시작됐다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우리나라 아니, 동양 뿐만이 아니라 돼지 창자 요리는 전세계에서 사랑받는다. 중요한 건 예전부터 서민의 배를 채워주는 음식이었다는 것. 전통이라 말하기는 모호하지만 어디서든 쉽게 구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순대를 이용한 음식은 많고 많지만 그 중 으뜸은 순댓국이다. 밥이 들어있어 탄수화물 보충에 고기와 순대가 들어있어 단백질까지 보충되는 든든한 한 끼 식사. 술안주로도 손색이 없는 뜨끈한 국물 음식. 시장이 형성된 곳이라면 항상 들어선 순댓국집.

종로에 또 다른 추억이 생겼다. 종로 주민이 들으면 화낼 수도 있는 말이지만, 종로는 투박하고 정겹다.

<사진 : blog.donga>

구수하고, 비좁다. 24년 인생 중 탑 5에 들만 한 순댓국 집과 청계천을 따라 줄줄이 늘어선 복잡한 가게들 종묘와 작은 공원. 어느 하나 빠질 것 없이 내 취향이다. 언제 한 번 종로 근처 술집 탐방을 해볼 계획이다. 나만의 종로 리스트를 만들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