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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제퍼슨이 보르도에서 한 일

제인 앤슨이 토머스 제퍼슨 미국 전 대통령이 보르도에서 지낸 짧은 시간 동안 그가 그 지역에 미친 영향에 관해 썼다. 그리고 그가 후에 3대 미국 대통령으로 ‘미국 최우선’ 스타일의 정책을 추진하려 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교훈도 포함되어 있다.

미국이 ‘미국 최우선’ 정책을 실시하려 준비하는 지금이야말로 미국의 역대 대통령을 모두 통틀어 가장 친유럽적이었던 3대(1801-1809)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을 돌아보기에 좋은 시기가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같은 이유로 그의 업적에 대해 호들갑을 떨지 말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보르도에 간 제퍼슨

보르도에는 제퍼슨의 동상도,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없지만 그는 분명 이 도시의 역사에 큰 공헌을 했다. 잘 살펴보면 기념 명패 두어 개를 찾아볼 수 있는데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를 ‘프랑스와 미국의 우정의 상징’이라 칭송한, 미국 영사관 벽에 붙어 있는 명패다. 그리고 2015년 3월 13일, 샤르트롱 부둣가에 가론 강을 따라 토머스 제퍼슨 둑이 만들어졌고, 보르도의 와인 박물관 시테 뒤 뱅에는 토머스 제퍼슨 강당이 있다.
그중에서도 둑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보르도는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하는 프랑스 해군이 떠나는 핵심 출발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라파예트 후작도 1777년에 포이약을 통해 미국으로 떠났다. 그런데 보르도가 제퍼슨을 보르도 와인의 상징으로 쓰기에는 그 근거가 조금 약하다. 사실 그가 대사로 프랑스에 머물렀던 1784년부터 1789년까지의 4년 동안 보르도에 있었던 것은 5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제퍼슨이 그곳에 오기 9년 전인 1778년에 보르도를 방문해 ‘1등급(First Grouth라고 철자를 잘못 쓰기도 했다)’ 와인을 처음 발견한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공이 더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심지어 그는 1778년 4월 1일 블라이에서 JC 샴페인이라는 이름의 네고시앙을 반복적으로 만나며 미래의 1등급 와인에 대해 메모를 남긴 점에서도 제퍼슨보다 앞선다. 그 네고시앙은 그에게 그 지역에서 가장 훌륭한 네 가지 와인에 대해 알려주었고, 애덤스는 “1등급 와인 샤토 마고, 오브리옹, 라피트, 라투르가 좋다”고 적었다. 그로부터 거의 2년 뒤인 1780년 4월, 존 애덤스는 파리에서 보르도에 있는 미국 상인 존 본드필드에게 편지를 써서 “보르도 와인, 그중에서도 최고의 품질을 지닌 와인 한 통”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그는 그중에서도 생테밀리옹의 샤토 카농을 특히 좋아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점에서는 나의 개인적 시각에서 취향이 매우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보르도와 사랑에 빠진 미국인의 상징으로는 제퍼슨이 단연 눈에 띈다. 그의 짧지만 강렬했던 보르도 방문에 대한 기록 중 최고는 베르나르 지네스테가 남긴 것이다. 1936년 태어난 그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네고시앙이자 샤토 소유주(1950년부터 1977년까지 샤토 마고를 소유했었다)로서 평생에 걸쳐 다양한 글을 썼다. 첫 에세이를 출간한 것은 35세 때인 1971년이었고, 첫 번째 소설은 1986년, 49세 때였다. 그의 책은 가볍게 읽기 아주 좋은데, 그중에서도 『레 샤르트롱(Les Chartrons)』이라는 책에 엉성하게 꾸며낸 에두아르 맹통이라는 등장인물을 통해 쿠르티에라는 직업이 잘 묘사되어 있으니 꼭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다시 제퍼슨으로 돌아가 보자. 지네스테는 제퍼슨이 보르도뿐 아니라 유럽의 어느 포도원을 돌아다녔는지 아주 자세히 설명한 것은 물론, 지역 주민과 그 지역을 다녀간 여행자들의 눈을 통해 당시의 보르도가 어땠는지 아주 흥미로운 배경 지식을 제공한다.
제퍼슨은 1787년 5월 24일 보르도에 도착하여 샤토 디켐과 샤토 카르보니유를 방문했다. 보르도 시에 도착해서는 호텔 드 리슐리외에 묵었는데, 지금은 이것을 재현하기가 쉽지 않다. 본래 건물이 갤러리 라파예트 근처의 패스트푸드 식당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7년 전 개장한 그랜드 씨어터 오페라 하우스에서 걸어서 몇 분 거리에 지나지 않으니 찾아보기 쉬울 것이다.
지네스테에 따르면 제퍼슨은 24일 금요일 페삭에 있는 샤토 오브리옹과(이 와인을 처음 맛본 건 프랑스 대사로 그의 전임자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에게 초대된 자리였을 것이다) 빌나브 도르농에 있는 오늘날의 샤토 퐁탁 몽플레지르에 갔다. 토요일은 편지를 쓰고, 사람들을 만나고, 당시 관례대로 그랜드 씨어터에서 연극 두 편을 연달아(첫 번째는 볼테르의 비극이었고, 그 다음은 데퐁테인과 달라이락이 쓴 코믹 오페라였다) 관람했다. 일요일인 26일에는 은행에서 돈을 찾아 세탁비와 숙박비를 지불했고, 월요일에는 손님들과 거하게 아침 식사를 한 뒤, 배를 타고 블라이로 향했다.
그의 일기에는 그가 찾아간 포도원과 마신 와인들이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묵었던 호텔이 어땠는지, 참석했던 식사는 무엇이었는지 거의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가 어디에 흥미를 보였는지 잘 알 수 있다. 대신 그와 함께했던 다른 손님들이 남긴 기록이 그의 행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보르도에 있는 동안 그는 샤토 디켐(정확한 양은 기록되지 않았다)과 오브리옹(24상자), 라피트(250병)를 주문했다. 보르도 와인의 미국 진출이 제대로 시작된 것이다.

제퍼슨과 불운의 1807 출항금지법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조금 아쉬운 결말이 있다. 제퍼슨의 외교 정책을 찾아보았는데, 그는 미국을 우선으로 삼는 것을 전혀 꺼리지 않았다. 그는 미국 군대를 외국 전쟁(흥미진진하게도 트리폴리에서 벌어진 해적과의 싸움이었다)에 파병시킨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1803년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 영토(사실상 오늘날의 중서부 거의 대부분)를 1,500만 달러에 매각할 때에는 프랑스와의 친분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덕분에 미국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영토를 두 배로 늘릴 수 있었다.
상황은 그 이후부터 내리막을 걷기 시작한다. 어쩌면 제퍼슨을 역외지향적 미국의 챔피언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사실 끝없는 전쟁으로 물의를 일으킨 건 영국과 프랑스 아닌가. 제퍼슨도 처음에는 두 나라 모두와 무역을 계속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영국과 프랑스군이 미국 상선을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더는 그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반대 방향으로 극단적인 조치를 취해 1807년 출항금지법을 통과시켰다. 영국 및 프랑스와 모든 무역을 금지한 것이다.
「교토산업대학교 이코노믹 리뷰」에 실린 실비아 마르자갈리의 2014년 연구에 따르면 그 결과 프랑스 항구, 특히 보르도로 들어가는 미국 상선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미국의 수출은 1억 800만 달러에서 2,200만 달러로 곤두박질쳤으며, 상당 지역의 경제가 피폐해졌다. 제퍼슨은 1809년 3월, 임기를 몇 주 남기고 이 정책을 중단했지만 미국 외교사에의 흑역사인 점은 부인할 여지가 없다.
그들이 이보다 더 어두운 역사를 새로 쓰지 않기를 빌어본다.

 

CREDIT

        • 작성자

          Jane Anson

        • 번역자

          Sehee Koo

        • 작성일자

          2017.1.26

        • 원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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