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를 간신히 덮을 정도로 눈이 내렸다. 불안한 착상 감. 센 바람이 불면 버티지 못하고 다시 방황할 조짐이 강했다. 오늘 오후, 브라티슬라바를 떠난다. 목적지가 많은 날이다. 다 포기하면 편히 숙소 근방을 거닐 텐데. 다시는 못 올 것처럼 하는 내 여행 좌우명에 센 바람이 불어 닥친다. 그냥 마음 편히 날아가 버릴까. 여행 일상처럼 말이야.
결국,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채 나왔다. 혼자 아무 내비게이션 없이 걷는 여행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처량한 편에 가까워지면 여행이 아니다. 목적의식이 약한 와이파이를 켜고 지나가면, 작은 볼거리에도 걸음이 멈춰진다. <I ♥ Sophi>. 흔적의 상태가 양호하다. 눈이 그친 아침, 멀쩡한 흰 도화지에 손글씨를 그렸다. 이 아침에 저 사람은 나보다 먼저 하나를 해냈다. 진정성의 강도는 차치하더라도, 따뜻한 진심이 쌓인 눈 사이로 지나갔다. 얼른 피해야겠다. 소피가 오기 전에. 소피보다 내가 먼저 본 걸 알면, 그의 아침은 무의미해질 테니…
배경지식도 없이 1시간을 배회하다가 다시 호스텔 간판이 보였다. 내가 다시 브라티슬라바에 올 거란 보장이 없기에, 호스텔 직원 찬스를 사용하여 알찬 하루 여행을 계획해보기로 했다. 일단, 음식. 동유럽의 파스타?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폴란드,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헝가리 등 중앙 유럽과 동부 유럽 국가들에서 즐겨 먹는 음식이 있다. 숙소 스태프에게 맥주와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메뉴를 물어봤더니, 망설임 없이 할루슈키(Haluška)를 제안한다. 할루슈키는 무엇인가. 모양은 일정치 않으며 밀가루나 감자 반죽을 이용한다. 보통 밀가루와 물을 섞어 배터(Batter)를 만든다. 강판으로 잘게 간 감자도 배터에 넣을 수 있다. 달걀을 넣을 수도 있지만 슬로바키아의 브린조베 할루슈키 (Bryndzove haluška)에는 달걀을 전혀 넣지 않는다. 밀가루와 으깬 감자로도 충분히 걸죽한 배터를 만들 수 있다. 전통적으로, 할루슈키를 만드는 데 특별한 도구가 사용되지는 않았다. 반죽은 나무 도마 위에 얇게 편 뒤 칼을 사용해 곧바로 떼어 낸다. 배터를 구멍 난 할루슈키 체에 통과시켜 작고 불규칙한 모양의 덤플링으로 만든 후에는 버터나 기름을 묻혀서 스튜, 치즈, 베이컨 또는 햄과 함께 먹는다. 감자 경단으로 빚은 것에 양 치즈를 얹은 요리. 약간 느끼할 수 있지만, 탄산이 있는 라거 맥주와 조화가 좋은 요리다.
어느덧, 점심을 종용하는 시간이다. 호스텔 직원의 가르침 대로 흘러온 곳은 슬로박 펍(Slovak pub). 도착해보니 직원들이 분주하다. 오픈 시간을 맞춘다고 한 건 아닌데. 간판부터 입구로 들어가는 길을 보니, 꽤 알려진 가게임을 짐작할 수 있다. 쿠폰이 있으면 10% 할인된다는 공지가 계산대에 보인다. 관광객들에게 특화된 음식점이구나. 절반의 성공이다. 노포를 지향하는 처지에서 살짝 아쉽지만, 중간 정도의 맛과 서비스는 예상할 수 있으니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착석했다. 관광객 수용 공간은 충분했다. 거의 첫 손님으로 들어와서, 최상의 자리를 정하는데 몇 번 머뭇거리며 시간을 소진했다. 메뉴를 고르는 시간은 일사천리다. 이미 정하고 왔기에. 할루슈키와 이 펍을 대표하는 필스너 맥주. 할루슈키 시식 전에 필스너 한 잔이 먼저 나왔다. 기다리고 싶었다. 한여름이었다면, 이유를 따질 것 없이 이미 반쯤 비웠겠지만. 손님이 많은 펍답게 오더 시스템이 담백했다. 바로 나온 할루슈키. 외형과 재료는 다르지만, 콘치즈 느낌이 강했다. 몇 숟가락을 반복한 후 느끼함이 입안을 채운다. 이때 등장해야 하는 게 맥주. 최대한 입안을 해비하게 만든 후, 극강의 탄산을 품은 맥주를 마셨다. 하얀 바탕에 한 줄기 사랑의 메시지. 흰색의 할루슈키가 오늘의 아침을 상기시켰다.
브라티슬라바 오르막길의 초입 부분. 체력은 술기운과 시너지를 이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나무 계단을 두 발로 디디면서, 긍정의 마인드를 생산해 낸다. 여행 다이어트. 한 계단 오를 때마다 생명이 연장되고, 지방이 분해된다. 한결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이윽고 뻥 뚫린 하늘과 함께 늠름한 성곽의 형태가 드러났다. 산악 국가인 슬로바키아는 자연스럽게 고지에 돌을 건축 자재로 사용하는 성을 선호한다. 중세부터 18세기까지 헝가리 왕조의 귀족들은 슬로바키아의 방어하기 쉬운 지역에서 성을 탐했었다. 성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군사적 중요성이 감소하면서 토지 소유주가 주거 기능의 강화 목적으로도 일부 파손되었다.
브라티슬라바 성(Bratislavsky Hrad). 9세기 말에 건축된 성이다. 계란색의 깨끗한 외관과는 달리 꽤 오래됐다. 1811년 성이 불타서 사라졌고, 150년 동안 공을 들여 1968년에 재건이 완료되었다. 현재의 브라티슬라바 성은 국립 박물관의 위치에서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성의 내부보다는 성에서 바라보는 전경에 더 관심이 간다. 성을 빗겨서 흐르고 있는 도나우 강. 강과 신시가지를 이어주는 UFO 다리. 다리 한가운데 85m 상공에 지어진 레스토랑의 모양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 ‘UFO 다리’다. 날씨가 시야를 다소 방해했지만, 브라티슬라바의 시내를 360도 돌아보는 데 무리는 없다. 과거 왕족들의 특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또 다른 펍을 들렀다. 이 펍의 이름은 ‘Bratislavský Meštiansky Pivovar’다. 이곳도 자체 양조시설을 갖춘 펍이다. 목재 인테리어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소환한다. 넓은 공간에 비해 채워진 좌석이 많지 않다. 넓은 테이블을 차지하는 건 예의도 아니고, 내 품격도 아니다. 일오 정렬된 바의 의자 하나에 무게를 실어 맥주 한잔의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메뉴판을 열었다. 제일 상단에 있는 황금빛 라거보다는 그 아래 처져 있는 리스트의 다크 비어(Dark Beer)에 빛이 났다. 곧 떠나는 브라티슬라바. 내게 넌 뭘 선사해 주었는가. 너무 수동적인 여행 자세였나. 프라하의 명성을 뒤집는 임팩트가 내 뇌리에 박혀 있는지 되뇌어 봤다. 4일로는 부족하다. 로마의 4일과 비교하니 부족한 건 핑계일지도 모르겠네. 로마가 규모의 여정이었다면, 브라티슬라바는 은유의 여정이었다. 바라보는 대상에 이입된 내 감정선이 발아하여, 나 자신에게 그 맥을 인지해주었다. 여행 중 지친 육체에 가려진 메마른 내 감정들. 그 감정의 열선을 다시 덥혀준 브라티스라바의 겨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