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에서 2010년 초반까지 한국에 사는 프랑스와 스페인 출신의 친구들이 고국에 다녀올 때마다 꼭 챙겨왔던 음식들이 기억납니다. 당시 한국에서 쉽게 찾을 수 없었던 치즈와 함께 그들이 유럽에서 즐겨 먹는 햄과 마른 소시지 등을 겹겹으로 진공 포장해 가져와 같은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나 그들의 음식을 그리워하는 이들과 함께 나누어 먹곤 했었죠.
이제는 한국에서도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 다양한 유럽 스타일 햄을 만들고 슈퍼마켓에서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는데, 머나먼 한국뿐만 아니라 유럽 외 여러 나라에서 샤퀴테리 전문점, 햄 전문점이 생겨날 만큼 유럽인들의 햄이라는 음식이 세계 곳곳으로 알려졌지요. 유럽인들이 아주 오랫동안 즐겨온 다양한 종류의 햄, 그리고 그와 함께하면 더 즐겁게 먹고 마실 수 있는 술에 대해 알아봅니다.
<햄(Ham)의 분류와 만드는 주요 과정>
햄은 대개 염장 혹은 훈제한 후 익히거나 익히지 않은 채 숙성 시켜 만드는 돼지고기를 뜻합니다. 햄을 만드는데 중요한 방법은 크게 다섯 가지로 설명해 볼 수 있어요.
1) 고기를 자르는 방식 : 시중에선 뼈가 안에 있는 채로, 또는 일부분에만 뼈가 포함되어 있거나 뼈가 없는 여러 형태로 햄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정강이 살 끝부분으로 만든 햄은 대개 지방이 더 많은 경향이 있는 반면, 돼지 엉덩이 살은 살코기가 많은데 그래서 자르기에 더 쉽지요.
2) 염장 혹은 염지하기 : 햄을 만들기 위해 중요한 과정 중 한 가지는 염장 혹은 염지법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소금물에 담가 훈연하는 방식은 매우 흔하게 사용하는 방식이며, 마른 상태에서 겉면을 소금으로 절여 소금기가 고기에 퍼지면서 보존할 수 있는 상태로 변하는 방식도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3) 열을 가해 익히기 : 열을 가해 완전히 익히거나, 일부만 익히는 것 혹은 전혀 열의 도움을 받지 않는 세 가지 방식을 고루 씁니다. 열로 익힐 때는 고기의 내부 온도가 최소 64도 가량 되어야 하며, 58도 가량으로 열을 가하는 것은 일부만 익히는 방식을 위한 온도입니다. 완전히 익힌 햄은 데우기만 해서 먹을 수 있지만, 더 낮은 온도에서 부분적으로 익힌 햄은 먹기 전 꼭 완전히 익혀 먹는 것이 좋습니다.
4) 훈제하기 : 훈제 과정을 거치는 햄은 38도 가량의 낮은 온도에서 며칠 혹은 몇 주에 걸쳐 훈제해 특별한 맛과 향을 갖게 됩니다.
5) 숙성하기 : 숙성의 기간이 길수록 햄은 특유의 강하고 진한 맛과 향을 가지게 됩니다. 염장-훈연-온도와 습도가 유지된 공간에서 숙성하는 과정을 1년에서 약 7년까지도 거치는 햄들은 시간이 지나 마르고 곰팡이가 슬기도 한 겉면을 제거하고 먹어야 하지만, 한 번 맛보면 잊기 힘들만큼 독특한 맛과 향을 자랑합니다.
<꼭 한 번쯤 맛봐야 할 유럽의 햄과 그에 어울리는 술>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음식이 다르듯 햄도 숙성기간 만드는 방식과 부위에 따라 다양한 맛과 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럽을 여행할 때 혹은 여러 햄을 파는 전문점에서 한 번쯤 찾아보고 맛보면 좋을 만한 햄과 그에 어울리는 술이 무엇이 있을까요?
1) 하몽 이베리코(Jamón Iberico) : 스페인의 햄으로 그 훌륭한 맛처럼 가격도 높은 편이지만, 미식가들은 하몽 이베리코가 유럽, 아니 전 세계의 햄 중 제일이라 손꼽습니다. 포르투갈과 국경을 마주하는 스페인에서 흑돼지 이베리코가 도토리를 먹고 자라며 숲을 자유로이 뛰어노는 등 하몽을 만들기 위한 돼지를 기르는데 필요한 환경과 먹이 등이 법으로 엄격히 정해져 있습니다. 베요타(Bellota)는 최소 3년간 도토리를 먹고 방목하여 자라는 돼지로 만든 햄을, Cebo de campo(세보 데 캄포)는 곡물을 먹고 자라며 자유로이 방목한 돼지로 만든 햄, de Cebo(데 세보)는 시리얼을 먹고 사육된 돼지로 만드는 햄을 말하며 베요타(Bellota)로 갈수록 가격과 그 맛의 깊이가 높아집니다.
하몽 이베리코와 셰리, 그리고 샴페인 : 햄과 치즈에 어울리는 술은 레드와인을 쉽게 상상해볼 수 있지만, 오히려 하몽 이베리코와 잘 어울리는 술은 드라이하고 가벼운 화이트 와인, 피노 셰리, 그리고 스파클링 와인입니다. 가볍고 산도 있는 와인들은 진하지만 섬세한 하몽 이베리코의 맛을 돋보이게 해주며, 하몽의 지방을 입안에서 정리해주는 훌륭한 보조역할을 합니다.
2) 쿨라텔로 디 지벨로(Culatello di Zibello) : 스페인의 하몽 이베리코만큼 햄을 만드는데 긴 과정과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으로 잘 알려지고 유명한 이탈리아의 최고급 햄입니다. 14세기부터 파르마 지역에서 만들어지며 여러 상을 휩쓸어온 이 햄은 현재 에밀리아 로마냐 지역에서 기른 돼지로만 만들 수 있습니다. 매우 부드럽고 풍부하면서 정제된 맛을 자랑하는 쿨라텔로는 와인의 뉘앙스도 느낄 수 있는데, 이는 돼지고기의 최고급 부위를 소금, 후추, 마늘 그리고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의 혼합물에 염장 및 숙성을 하기 때문이며, 이후 돼지의 방광에 넣어 실로 단단히 묶고 오랜 기간 숙성을 더 합니다.
쿨라텔로와 에밀리아 로마냐 지역의 드라이한 말바시아 혹은 람부르스코 와인 : 쿨라텔로가 나는 곳에서 만들어지는 드라이한 말바시아 혹은 람부르스코는 복합적이면서 잘 정돈된 쿨라텔로의 맛과 짭짤한 느낌을 잘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만약 레드 와인을 택하고 싶다면, 바디가 가볍고 너무 무겁지 않은 맛과 향의 와인을 선택하는 것이 쿨라텔로의 맛을 최대한 즐기기에 좋습니다.
3) 잠봉 드 바욘느(Jambon de Bayonne) : 미식의 나라 프랑스 남서쪽에서 최소 7개월 이상의 숙성 기간을 거치는 이 햄은 아두흐(Adour) 강 유역에서 나는 소금으로 염장하고, 시원하며 공기가 잘 통하는 공간에서 숙성하는 기간에 헤이즐넛 등 특유의 향과 맛이 나타나는데, 최대한 얇게 썰어 입에서 녹는 듯 없어지는 햄의 질감과 맛을 느껴보면 좋습니다. 요즘은 햄 그 자체로 언제든 상관없이 맛보지만, 과거엔 궁중이나 부유한 가정에서 올리브, 치즈, 아스파라거스 등과 함께 햄을 담아 전채로 제공했다고 합니다. 프랑스인들은 잘 구운 바게트 빵을 구해 버터를 바르고 그 위에 잠봉 드 바욘느 햄을 얹어 자주 즐깁니다.
잠봉 드 바욘느와 프랑스 산도가 있고 과실 향이 좋은 레드 와인 : 모르공(Morgon)이나 레니에(Régnié)처럼 보졸레 출신 가메 품종으로 만든 레드 와인과 햄의 궁합히 좋습니다. 산도과 과일 향은 풍부하지만 타닌이 과하지 않아 햄의 맛을 지나치게 가리거나 압도하지 않는 레드 와인이므로 서로에게 잘 어울리는 조합입니다.
4) 이스타르스키 프르수트(Istarski pršut) :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자주 먹는 햄으로 염장해 말리는 과정을 거쳐 만들고 얇게 잘라 전채나 아티잔 빵에 얹어, 때로는 염소젖 치즈를 곁들여 먹습니다.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서유럽의 국가에서 만드는 프로슈토나 하몽에 비해 만드는 방식은 간단해 보이지만, 이 지역 토종 돼지 특유의 짙은 붉은 색 고기를 껍질과 지방을 제거해 염장 등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큰 차이점입니다. 소금, 후추, 마늘 그리고 여러 가지 허브를 섞어 만드는 염장 혼합물을 돼지고기에 잘 발라 몇 개월간 말리는 과정 후, 6개월에서 8개월간 천천히 발효되는 과정을 통해 복잡미묘한 맛의 이스타르스키 프르수트가 탄생합니다.
이스타르스키 프르수트와 이스타르스카 말바지아(Istarska Malvazija) 화이트 혹은 테란(Teran) 레드 와인 : 아직은 크로아티아 밖에서 이 햄과 지역의 와인을 맛보는 게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처의 유럽이나 크로아티아를 여행할 때 맛봐야 할 조합은 지역의 로컬 포도로 만든 화이트와 레드 와인 그리고 이스타르스키 프르수트 햄의 조합입니다. 산도와 산뜻한 과일 향을 자랑하는 화이트, 산도가 좋고 향신료의 향을 담은 레드 와인은 각기의 햄과 각각의 다른 매력으로 조화롭게 다가옵니다.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 프리울리 베네치아 줄리아에서도 해당 와인을 찾아볼 수 있으니 언젠가 한 번 꼭 시도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