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와인 여행을 준비할 때 유독 뇌리에서 떠나지 않던 포도 품종이 있었다. 이름은 ‘모스카토 디 스칸초 Moscato di Scanzo’. 앞에 ‘Moscato’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흔한 모스카토 류의 한 종이라고 생각했지만, 자료를 조사하다 보니 이 품종이 레드 품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모스카토 품종 계열에서 (아마도) 유일할 것으로 여겨지는 레드 품종. 이미 그 시점부터 이 포도 품종으로 만든 와인을 마셔보고 싶었던 것 같다.

모스카토 디 스칸초는 포도 품종의 이름이면서 DOCG 명이기도 하다. 그것도 이탈리아에서 가장 작은 DOCG로, 롬바르디아 Lombardy 주의 베르가모 Bergamo 근교에 있다. 보통 이탈리아에서 어떤 와인 산지가 DOCG 명을 획득하려면 그 자체로 특수성과 역사성을 지녀야 한다. 즉, 다른 이탈리아 와인 산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유의 품종과 그로부터 탄생한 와인이 오랜 시간 동안 전승되어 왔고 또한 그 품질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키안티 Chianti DOCG라고 하면 바로 산지오베제 Sangiovese라는 레드 품종과 메디치 Medici 家의 역사가 떠오르는 것처럼.

모스카토 디 스칸초 DOCG도 특수성과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루카 폴리니 Luca Pollini의 저서 <이탈리아 토착 품종으로의 여행>에 의하면 모스카토 디 스칸초는 베르가모 포도 재배의 역사적 상징과 같은 존재다. 고대 로마인들에 의해 이곳에 심어졌고 지금까지 전승되어 왔다. 로마 군인들은 참전에 대한 포상으로 베르가모의 비옥한 평지와 언덕을 하사받았고, 정복의 표시로 포도나무를 심기 시작하면서 포도재배는 베르가모의 매우 중요한 산업이 되었다. 당시 이 와인들은 바쿠스 신전에 바쳐지기도 했다.

과거에 수확한 포도를 나르던 나무통 / 사진 제공: 배두환

이 품종에 대한 최초의 자료로는 1347년 6월 8일 자의 것으로, 알베리코 다 로쉬아테 Alberico da Roschiate가 <일정량의 moscatello rosso를 Priatini로부터…>라고 기록한 것과, 도나토 칼비 Donato Calvi가 자신의 일지에 <1398년 moscatello rosso di Scanzo를 이동함>이라고 쓴 내용을 통해 증명된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 와인은 늘 생산량이 적고 귀했기 때문에 귀족이나 왕가에서 즐기는 명품 와인의 대열에 끼어 있었다. 물론 지금도 매우 적은 양만이 유통되기 때문에 한국에는 소개 되지 않았고, 이탈리아 내에서도 구하기 매우 까다로운 편이다.

모스카토 디 스칸초는 ‘명상 와인 Meditation Wine’으로 불린다. 보통 ‘명상 와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와인들은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다. 즉, 다른 음식이나 안주가 없이 와인을 명상하듯이 오랜 시간 음미하며 즐길 수 있다는 이야기다. 몇몇 매우 잘 만들어진 디저트 와인이 이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간헐적으로 몇몇 명품 레드 와인들도 가능하다. 우리 부부가 베네토의 아마로네 명장인 달 포르노 로마노 Dal Forno Romano를 방문했을 때 우리를 안내해 준 가문의 일원이 자신의 아마로네를 명상 와인이라 표현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실제로 그의 아마로네는 그 자체로 완벽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다. 오히려 모든 와인들에 공식처럼 붙는 음식과의 매칭이 어렵다고 판단될 정도였다.

여하튼 모스카토 디 스칸초가 명상 와인으로 불리는 이유는 이 와인이 모스카토 디 스칸초 포도를 말리거나 혹은 보트리티스 Botritys 화 된 포도를 골라서 양조한 디저트 와인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를 파시토 Passito라고 부른다. 모스카토 디 스칸초를 재배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베르가모 인근의 스칸초로쉬아테 Scanzoroschiate의 가파른 언덕뿐이다. 이곳에서 모스카토 디 스칸초는 ‘베르가마스카’ bergamasca라 불리는 석회 토양에서 페르골라 Pergola 방식으로 재배된다. 수확은 보통 9월 말에서 10월 초에 시작되며 매우 완숙하고 건강한 포도만을 손으로 일일이 골라서 진행한다.

포도를 말리는 건조대 / 사진 제공: 배두환

수확된 포도는 다시 손 세척을 거쳐 보통 21~50일(참고로 최장 12월 말까지 하기도 한다) 정도 통풍이 잘되는 곳에서 말린다. 이 부분은 아마로네를 만드는 방식과 비슷하다. 건조실 온도와 습도 등의 환경이 매우 중요하며, 포도에 곰팡이가 피는 것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 건조된 포도는 압착을 해서 즙을 짜내고 이후 반드시 유리나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발효 및 숙성을 진행한다. 나무는 쓰지 않는다. 모스카토 계열의 품종이 지닌 민감한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스카토 디 스칸초의 고유의 풍미가 보존될 수 있도록 양조하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숙성 기간은 최소 2년.

규모가 작은 양조장 / 사진 제공: 배두환

완성된 와인은 약 16도 정도의 알코올 도수를 보이며 잔여 당은 9~10% 정도다. 색은 오렌지 뉘앙스가 감지되는 진홍빛을 띤다. 향에서는 말린 장미, 아카시아 꿀, 계피, 잼, 감초 등의 복합적인 향들이 특징적이다. 입에서는 적절한 단맛과 부드러운 질감이 느껴진다. 숙성이 진행된 와인에서는 담배와 초콜릿도 감지된다. 앞서 명상 와인이라고 이야기하며 와인 자체로 즐기기를 추천하긴 했지만, 달콤한 페이스트리나 초콜릿 혹은 블루 치즈와 매칭해도 환상의 궁합을 보인다. 서빙 온도는 18~22도 정도로 살짝 차갑게 즐기는 것이 좋다. 추천하는 테이스팅 글라스는 코냑 글라스처럼 볼이 풍만한 스타일.

현재 이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산지는 롬바르디아에 국한되어 있으며 앞서 언급한 Moscato di Scanzo(줄여서 Scanzo) DOCG와 발칼레피오 Valcalepoi DOC에 속해 있는 ‘Moscato Passito’다. 이 산지와 근접한 도시인 베르가모는 패션과 금융의 도시 밀라노에서 차로 약 1시간 30분 거리에 있기 때문에 밀라노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하루 정도 시간을 내서 들러볼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당시 우리 부부는 롬바르디아주의 발텔리나 Valtellina 와인 산지를 둘러보고 바로 베네토 주로 넘어가는 일정이었지만, 이 와인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려 하루를 온전히 이 와인을 경험하는 것에 투자하기로 했다. 우리 부부가 선택한 와이너리는 파뇬첼리 폴시에리 Pagnoncelli Folcieri였다.

파뇬첼리 폴시에리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작은 DOCG인 스칸초 DOCG에서도 가장 작은 생산량을 보이는 와이너리다. 모스카토 디 스칸초를 재배하고 이를 와인을 만드는 것에 오랜 시간 동안 헌신해 온 가문으로, 1950년대 지안카를로 파뇬첼리 Giancarlo Pagnoncelli에 의해 설립되었다. 본업은 약사였기 때문에 단순한 취미 정도로 시작했었다. 50년대에 최초의 6병을 생산했던 기록이 있고, 1962년에 최초의 빈티지 와인을 탄생시켰다. 이후 사업을 확장하면서 모든 가문의 일원들이 모스카토 디 스칸초 와인을 만드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오너 또한 그의 후손이며 프란체스카 Francesca와 페데리코 Federico 파뇬첼리 남매가 운영하고 있다. 당연히 모스카토 디 스칸초 DOCG 와인에 집중하고 있지만, 이 품종으로 만든 일반 스틸 와인과 그라파, 맥주까지 생산한다. 특히 일반 스틸 레드 와인인 옴브라 로싸 Ombra Rossa(붉은 그림자라는 뜻)는 모스카토 스칸초의 본래 특징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와인이다. 에일 스타일의 모스카토 맥주와 그라파도 매우 훌륭하다. 그야말로 숨겨진 보석을 만난 느낌.

모스카토 디 스칸초 껍질로 만든 그라파 / 사진 제공: 배두환

우리 부부가 파뇬첼리 폴시에리를 방문한 것은 매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3개월간의 이탈리아 와인 여행에서 만난 가장 독특하고 의미 있었던 와이너리였는데, 비단 그들이 선보이는 와인 때문만은 아니다. 와이너리는 17세기에 지어진 매우 고풍스러운 저택 안에 있다. 저택 내부는 17세기의 모습 그대로를 매우 충실히 재현하고 있으며, 아름다운 정원도 인상적이고 저택 내부는 박물관을 연상시킬 정도로 아름다운 벽화와 오래된 물건들로 가득하다. 참고로 그들의 와인의 레이블을 장식한 벽화는 저택의 천장 벽화를 그대로 프린팅 한 것이다.

와인 레이블은 천장의 벽화를 본따 만들었다. / 사진 제공: 배두환

양조장은 저택 뒤에 위치한 작은 가옥을 개조해 1층에서 와인을 만들고 2층에서는 포도를 말린다. 지하 셀러가 그들의 양조장이고 오래된 빈티지의 와인을 보관하는 와인 셀러 역할을 한다. 그야말로 가내 수공업의 전형이라 할 수 있고, 그래서 더 특별하다.

와인을 보관하는 지하 셀러 / 사진 제공: 배두환

우리 부부는 여기서 그들이 생산하는 모든 주류를 테이스팅 했다. 우선 ‘MUSCAT’라는 이름의 맥주는 모스카토 디 스칸초의 과즙을 10% 섞어서 상면 발효시켜 만든 에일 맥주의 일종이다. 브리티쉬 에일 같은 향과 맛이 나는데, 텁텁하지 않고 부드러우면서 힘이 있는 놀라운 풍미를 지녔다.

모스카토 디 스칸초로 만든 맥주 / 사진 제공: 배두환

두 번째로 테이스팅한 옴브라 로싸는 메를로 80%와 모스카토 디 스칸초 20%가 블렌딩 된 레드 와인이다. 퍼플 루비 칼라를 띄고 레드 체리, 라즈베리 향이 지배적인 신선한 스타일이었다. 부드럽고 싱그러워 함께 준비된 치즈, 살라미, 빵에 아주 좋은 매칭을 보여줬다.

옴브라 로사 레드 와인 / 사진 제공: 배두환

세 번째로 테이스팅한 모스카토 디 스칸초는 블랙베리, 건포도, 잼, 꿀, 담배, 초콜릿 등의 부케가 화려하게 피어나며, 입에서는 스위트한 스파이시 캐릭터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곶감과 같은 한국적인 풍미도 느껴졌다. 마지막의 그라파는 세련된 알코올과 어렴풋이 느껴지는 신선한 포도의 과즙 향이 매력적이었다.

와인의 특수성, 그리고 주인장 남매의 친절함, 저택의 고풍스러움.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잊지 못할 경험으로 남았던 특별한 하루. 모스카토 디 스칸초, 그리고 파뇬첼리 폴시에리는 독특한 와인을 찾아 헤매는 모든 와인 애호가들을 위한 우리 부부의 헌사라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