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문외한이라도 와인 애호가라면 ‘이우환’이라는 이름이 낯설지는 않을 테다. 보르도의 전설적인 와이너리이자, 아티스트 레이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샤토 무통 로칠드 Chateau Mouton-Rothschild의 2013 빈티지 주인공이 바로 이우환 화백이었기 때문이다. 1924년 장 카를뤼 Jean Carlu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1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당대를 풍미했던 아티스트만을 초청했던 곳이라 한국의 작가가 선택된 것은 업계에서는 꽤 큰 이슈였다. 우리 부부도 2년 전 방문한 무통 로칠드에서 그의 작품을 눈으로 확인하고 묘한 감동을 느꼈다. 외국에 나가면 다 애국자가 된다는 말에 공감한다.
그의 간결하지만 명료한 붓 터치를 설치 미술로 감상할 수 있는 곳이 이탈리아에도 있다. 바로 토스카나의 ‘아마 Ama’ 마을. 키안티 지역의 노른자위라고 할 수 있는 가이올레 인 키안티 Gaiole in Chianti에서 남서쪽, 차로 약 20분 거리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우리 부부는 이 마을을 두 번 방문했다. 처음 여행했을 때 마을 주위를 가득 메운 포도밭과 지평선 넘어 아스라이 내려앉던 주황빛 석양을 잊지 못해 최근에 지인들을 데리고 다시 한번 방문했다.
아마 마을은 이전에 소개한 바르바레스코 마을보다 더 작은 규모다. 와이너리도 하나. 레스토랑도 하나. 숙박 시설도 하나다. 하지만 이곳의 유일한 와이너리인 카스텔로 디 아마의 명성과 와이너리 오너의 예술에 대한 자부심으로 탄생한 컨템퍼러리 아트의 향연은 이곳을 그 어느 와인 마을보다 특별하게 만들었다. 본래 ‘우리가 사랑한 와인 마을’의 취지는 매력적인 와인 마을과 그 안(혹은 근방)에서 만날 수 있는 여러 와이너리를 소개하는 것이지만, 부득이하게 이번에 소개하는 아마 마을은 ‘카스텔로 디 아마’ 한 곳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글의 폭은 좁아졌으나 좀 더 심도 있게 이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누구나 짐작 가능하지만, 카스텔로 디 아마의 이름은 ‘Ama’ 마을에서 비롯됐다. 지금은 아주 작은 중세 마을이지만, 500년 전에는 키안티의 와인 허브라고 일컬을 만큼 포도재배와 와인 메이킹이 성행했던 곳이다. 토스카나의 대공이자, 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된 페터 레오폴드 Peter Leopold는 아마 마을에 대해서 “This is the most famous, most fertile part of all Chianti”(키안티 지역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비옥한 땅)라고 언급했다.
카스텔로 디 아마가 설립된 것은 1960년대. 와이너리는 ‘아마’ 마을의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모인 여러 가족에 의해 시작되었다. 70년대에는 여러 번 소유주가 바뀌었고, 마침내 현 오너인 마르코 팔란티 Marco Pallanti가 와이너리에 합류하면서 영광이 시작됐다. 그는 와이너리를 최초 설립했던 가문의 딸인 로렌자 세바스티 Lorenza Sebasti와 결혼했고, 현재는 독자적으로 부부에 의해서 와이너리가 운영되고 있다.
마르코 팔란티는 세계적인 와인메이커다. 이탈리아 최고의 와인 가이드인 <Gambero Rosso>는 2003년 올해의 와인메이커로 그를 뽑았고, 2005년 다시 올해의 와이너리로 카스텔로 디 아마를 선정했다. 마르코 팔란티가 창조한 키안티 클라시코 산 로렌조 Chianti Classico San Lorenzo는 <Wine Spectator>가 2010년 꼽은 세계 100대 와인 중 6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와인도 와인이지만 마르코 팔란티의 예술 사랑은 마을 전체를 현대 미술관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2000년부터 아티스트를 초대해서 예술 작품을 마을 안에 남겨왔다. 초대된 아티스트들은 마을에서 지내면서 토스카나 전통 음식과 아마 와이너리의 와인을 마시고 전통적인 이탈리아 가옥에서 머물면서 마을 어딘가에 작품을 완성해나간다. 지극히 이탈리아다운 장소에서 그들만의 예술혼을 불태우는 셈이다. 지금까지 와이너리와 협업한 아티스트들은 아래와 같다.
Michelangelo Pistoletto(2000), Daniel Buren(2001), Giulio Paolini(2002), Kendell Geers(2003), Anish Kapoor(2004), Chen Zhen(2005), Carlos Garaicoa(2006), Cristina Iglesias(2008), Nedko Solakov(2007), Louise Bourgeois(2009), Ilya and Emilia Kabakov(2010), Pascale Marthine Tayou(2012), Hiroshi Sugimoto(2014), Lee Ufan(2016), Roni Horn(2017)
익숙한 이름이 마지막 즈음에 있다. Lee Ufan(이우환). 그는 2016년 아마 마을에서 약 한 달간을 지내면서 무통 레이블에 그렸던 그림과 비슷한 작품을 남기고 갔다. 작품 이름은 <Topos(Excavated)>. 번역하면 ‘(발굴된)토포스’다. 본래 ‘Topos’란 그리스어로, ‘장소’를 뜻한다. 어두운 방 중앙에 무통에 그렸던 붉은색 그림이 마치 ‘발굴된’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맞은편에는 작품에 빛을 쏘는 조명을 설치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바닥의 바깥에는 자갈이 깔려 있고 내부는 정돈된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수많은 스크래치를 볼 수 있다. 이것들도 하나하나 이 화백이 망치와 정으로 돌을 파낸 자국들이다. 전 세계 주요 도시를 다니면서 대단하다고 평가받는 설치 미술을 수차례 봐 왔지만, 이우환 화백이 창조한 이 공간은 특별한 느낌을 들게 한다. 오로지 한 작품을 위해 마련된 한 공간. 작품과 공간이 완벽하게 공존하는 느낌이다.
비단 이우환 화백의 작품뿐만 아니라 마을에 있는 모든 작품들이 경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2012 – Pascale Marthine Tayou – Le Chemin du Bonheur
2005 – Chen Zhen – La lumière intérieur du corps humain
2004 – Anish Kapoor – Aima
2001 – Daniel Buren – Sulle vigne: punti di vista
2006 – Carlos Garaicoa – Yo no quiero ver mas a mis vecinos
2000 – Michelangelo Pistoletto – L’albero di Ama. Divisione e moltiplicazione dello specchio
2003 – Kendell Geers – Revolution/Love
작품들은 마치 숨바꼭질을 하듯 마을 곳곳에 전시되어 있는데, 이들을 찾아다니는 재미도 쏠쏠하다. 개인적으로는 Kendell Geers의 <Revolution/Love>가 제일 좋았다. 거꾸로 읽으면 어렴풋이 읽히는 Revolution. 바로 읽으면 그 안에 숨어 있는 LOVE. 어두운 셀러 안에서 빛나는 붉은 창의성을 처음 본 이라면 누구든 감탄해 마지않을 것이다.
카스텔로 디 아마가 자랑하는 두 곳의 포도밭이 와이너리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마을을 거닐면서 그 현장을 둘러볼 수 있다. 와이너리 최고의 와인 중 하나인 라파리타 L’Apparita를 만드는 포도밭은 양조장 바로 맞은편에 있다. 이 작은 포도밭은 또 다른 포도밭인 벨라비스타 Bellavista의 일부인데, 포도밭 전체에 크고 작은 돌이 가득한 진흙 토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메를로를 재배하기에 안성맞춤인 셈이다. 포도가 탐스럽게 익어가는 여름, 가을 한낮에는 햇빛이 아주 강렬하지만, 해발고도가 450~550m로 꽤 높은 편이라 밤은 또 서늘하다. 메를로 100%로 만들어지는 라파리타가 왜 이탈리아 최고의 메를로 와인 중 하나로 꼽힐 수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테루아다.
우리 부부는 와이너리 직원과 함께 마을과 와이너리 곳곳을 둘러본 뒤에 고즈넉한 방에서 아마의 와인들을 테이스팅할 수 있었다. 총 4종의 와인, 퍼플 로제 Purple Rose, 아마 키안티 클라시코 Ama Chianti Classico, 산 로렌조 키안티 클라시코 그란 셀레찌오네 San Lorenzo Chianti Classico Gran Selezione, 라파리타 L’Apparita와 올리브 오일까지 리스트에 올랐다. 시음한 모든 와인들이 훌륭했으나, 특히 라파리타의 강렬한 인상과 긴 여운은 여행 내내 잊을 수 없었다.
아마 마을에 온다면 와이너리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 <Il Ristoro di Ama>에서 현지 음식을 반드시 맛봐야 한다. 18세기에 지어진 역사적인 건물에 자리한 이 레스토랑에서는 지오반니 Giovanni 셰프가 제안하는 신선한 시즌 메뉴가 연중 선보인다. 앞뜰에서 재배한 유기농 재료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모든 플레이트에 싱그러움이 가득하다. 가격도 저렴한 편. 파스타 종류가 10~15유로, 메인이 25유로 정도다. 햇살 좋은 날 레스토랑 테라스에서 와인 한 잔과 함께 음식을 즐긴다면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훗날 우리 부부가 이탈리아를 재방문한다면 언제나 그랬듯이 새로운 와인을 찾아 나서는 것으로 일정을 채워나가겠지만, 카스텔로 아마 와이너리만큼은 반드시 재방문 리스트에 올려 둘 것이다. 그곳의 와인은 언제나 우리를 감탄하게 만들고, 매해 발굴되는 새로운 아티스트의 작품은 언제나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물론 아마 와인을 곁들인 테라스에서의 점심 식사 역시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