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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의 침략으로 시작된 한국 맥주의 비긴즈

외세의 침략으로 시작된 한국 맥주의 비긴즈

염태진 2023년 9월 4일

지난 기사에서 한국 크래프트 맥주의 역사를 짚어 봤습니다. 하지만 깊게 다루지 않은 부분이 크래프트 맥주가 아닌 한국 대기업 맥주의 역사입니다. 그중 한국에서 맥주의 시작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맥주는 외세의 침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맥주의 시작을 조선시대 맥주, 최초의 맥주 사진, 영등포라는 3가지 시선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금주령에 언급된 조선시대의 맥주는 무엇이었을까?

조선시대에도 맥주가 있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선시대에는 맥주가 없었습니다. 서양의 맥주가 이 땅에 들어온 때는 조선이 거의 몰락하고 외세의 개입이 본격화된 개화기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개화기 이전에 ‘맥주(麥酒)’에 대한 언급이 조선왕조실록에 두 번이나 나옵니다. 어떤 사연일까요?

신윤복이 그린 풍속도 ‘주사거배’

첫 번째 맥주에 대한 언급은 1755년 영조 31년 9월 8일의 기록입니다. 임금은 금주령을 실시하면서 일부의 술을 제외하는데 여기에 맥주라는 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조는 금주령을 엄격하게 시행한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조는 처음에는 형평성의 문제도 있고 일괄적으로 시행되지 않으면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금주령에 조심성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술이 사람의 몸을 해치고 곡식을 소모해 버리니, 술의 폐단이 더 크다며 금주령의 생각을 내비칩니다. 그러면서 좋은 계책을 냅니다. 왕부터 서민까지 술을 금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일부의 술에 대해서는 예외를 두는 것이었습니다. 제사나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베푸는 술에는 예주(醴酒)를 사용할 수 있고, 군인들에게 내리는 술은 탁주만 쓰며, 농민들의 술인 보리술(麥酒)과 탁주는 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맥주가 언급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위에서는 왕공(王公)에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제사와 연례(宴禮)에는 예주만 쓰고 홍로(紅露)·백로(白露)와 기타 술이라 이름한 것도 모두 엄히 금하고 범한 자는 중히 다스리겠다. (중략) 군문(軍門)의 호궤(饋饋)에는 단지 탁주(濁洒)만을 쓰고, 농민들의 보리술(麥酒)과 탁주 역시 금하지 말아야 한다.”

두 번째 맥주에 대한 언급은 같은 해 9월 14일의 기록입니다. 금주령에 예외 사항을 여럿 두다 보니, 생각한 대로 금주령이 지켜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첫 번째 금주령을 내린 후 곧바로 금주령을 다시 하교하며, 제사나 나라 잔치 등에는 예주는 허락하지만, 탁주와 맥주도 금지하라는 내용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향촌(鄕村)의 탁주(濁酒)는 바로 경중(京中)의 지주(旨酒)이니, 위로 고묘(告廟)하고 아래로 반포한 후에는 한결같이 해야 마땅하다. 경외의 군문(軍門)을 논하지 말고 제사(祭祀)·연례(讌禮)·호궤(犒饋)와 농주(農酒)는 모두 예주(醴酒)로 허락하되 탁주와 보리술(麥酒)은 일체로 엄금하라.”

그럼, 당시 맥주라 칭한 보리술의 맛은 어땠을까요? 조선 후기 금주령에서 언급한 맥주에 대해서는 레시피가 나온 문헌이 없어 제조 방법과 맛까지 알 수는 없습니다. 대신 조선 전기에 쓰인 <산가요록>이라는 요리책에는 맥주라고 언급된 술의 제조 방법이 나옵니다. 이 책에 의하면, 맥주는 보리를 재료로 하고 밑술에 덧술을 덧치는 방식으로 만든 전통주입니다. 막걸리와 흡사한 형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양의 맥주와는 다릅니다. 서양의 맥주가 맥아와 홉을 사용하여 풍미와 쓴맛을 낸 술이라면, 조선시대의 맥주는 보리로 빚은 발효주 중의 하나였습니다. 대신 알코올 도수가 무려 15도가 넘었다고 하니 선조들의 독한 술에 대한 열망을 느껴볼 수가 있습니다.

최초의 맥주 사진이 의미하는 것은?

신미양요 당시 외국인 종군기자 펠리체 베아토가 찍은 사진은 한국 최초의 맥주 기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사진에는 허름한 옷차림을 한 조선인이 맥주병을 가득 들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맥주병은 대략 10병 정도, 정면에 보이는 삼각형 모양의 라벨로 봐서는 영국의 유서 깊은 양조장 배스(bass)의 맥주입니다. 맥주병 밑으로는 <Every Saturday>라는 미국 잡지가 보이고, 손가락에서 한 번도 빼지 않았을 것 같은 담뱃대도 보입니다.

신미양요 당시 맥주병을 들고 있는 조선인의 사진

이 사진을 찍은 경위에 대해서는 2021년 <어재연 장군 순국, 신미양요 150주년 기념 학술회의>의 학술지(이하 학술지)와 일본에 거주한 외국인 기자 윌리엄 그리피스가 지은 <은자의 나라, 한국>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베아토는 이탈리아계 영국인 기자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상업 사진과 전쟁 사진을 찍었으며, 중국, 일본, 한국 등을 모두 다녀본 최초의 종군 사진사이기도 합니다. 그는 일본에서 활동하던 중에 미국의 함선에 올라 조선으로 들어온 후 신미양요의 전 과정을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이 사진도 그중 하나입니다. 사진에 찍힌 인물은 인천부의 아전 ‘김진성’이라는 하급 관리입니다. 인천부는 조선시대 23부제 중 하나의 지방 행정조직이었습니다. 아마 김진성이라는 인물은 미국의 함선이 처음 도착한 지역의 마을을 대표하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다른 문헌에는 하급관리가 아니라 마을 이장이라고 표현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 사진 외에 거의 동일한 곳에서 촬영된 3인의 단체 사진이 있습니다. 이 사진에 있는 인물은 의주 통사 문정관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미국의 함선이 인천의 어느 한 동네에 도착했을 때, 지역의 하급 관리였던 김진성이 먼저 배에 올랐고, 나중에 보고받은 후 조정에서 파견한 3인의 관료가 배에 올라 사진에 찍힌 것입니다.

신미양요 당시 의주 통사 문정관 3인의 사진

그리피스의 책에는 조선인 4명이 미국의 함선에 올라탄 경위가 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신미양요는 1886년 평양의 군민들이 공격해 불에 태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책임과 통상을 요구하기 위해 침략한 미국과 이를 방어하기 위한 조선 간의 전투입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있은 지 5년이 지난 후 미국은 1871년 일본 나가사키에 기함과 포함이 포함된 함대를 정박시키고, 5월 16일에 나가사키를 출항하여 강화도로 향했습니다. 강화도 강어귀에 도착한 함대는 탐사를 위해 일부의 군인들을 보트에 태워 보냈습니다. 보트에 탄 수병들이 뭍으로 올라간 것은 5월 28일입니다. 뭍에 올라온 수병들은 주민들의 친절한 대접을 받았으며, 구리 단추나 푸른 제복, 유리병 같은 신기한 물건들을 보여주며 환심을 샀습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함대가 당분간 머무르겠다는 뜻을 전달하고 작약도와 영종도 사이에 함대를 정박했습니다. 함대가 정박하자 몇몇 마을 사람들이 나룻배를 타고 접근해 주저 없이 갑판에 오른 건 5월 30일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대원군이 곧 3명의 관리를 대표로 파견할 것이라는 문서를 전달하고 융숭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배를 두루 구경하고, 식사와 술을 대접받았으며, 갑판 위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이때 찍힌 사진이 이 귀중한 최초의 맥주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한국에서 찍은 최초의 맥주 사진으로 한국의 맥주사적인 의미가 있지만, 서양인이 한국에서 찍은 최초의 한국인이라는 점에서 사진사적인 의미가 더 큽니다. 하지만 다소 아쉬운 점은 당시 서양인이 조선인을 바라보던 시선입니다. 이 사진의 작품명은 <문명인을 응시하는 조선인> 혹은 그리피스의 책에서는 <문명의 첨단>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작품명에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문명인이고 이 사진에 찍힌 사람은 비 문명인이라는 멸시가 깔린 듯합니다. 베아토가 어떤 의도로 사진을 찍었는지는 추측해 볼 일이지만, 그리피스가 쓴 이 사진에 관한 설명은 더 분명합니다. 그는 이 사진에 대한 설명으로 “얼마나 흡족한 표정인가, 이 사진을 보라”라고 헀습니다. 그는 이 조선인이 매우 공순했으며, 이러한 아슬아슬한 순간에도 함박 같은 미소를 짓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조선 사람에게 최초로 준 선물이 알코올, 맥주 그리고 술이라니, 기독교 국가로서의 미국의 훌륭한 상징치고는 얼마나 기이한 혼성곡인가“라면서 이 사진을 매우 기이한 일인 듯 우쭐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피스의 글을 읽고 베아토의 사진을 다시 보면 사진의 의도가 보입니다. 학술지에서는 맥주와 잡지는 근대의 산물이고 문명인의 선물이지만 갓을 벗어 던진 상투 차림의 모습과 비위생적인 담뱃대는 야만의 산물이며, 비 문명인이라는 외국인의 시선이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서양인이 이 사진을 보고 은연중에 아시아인을 멸시하는 감정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최초의 맥주 양조장이 영등포에서 시작한 이유는?

신미양요 전투의 결말에 대해 아시나요? 우리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통해서 신미양요 전투의 모습을 비교적 생생하게 알고 있습니다. 전투는 조선인 344명 사망, 미군 3명 사망이라는 결과로 알 수 있듯이 미국이 압도적으로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수일 동안 수교 협상만 하다가 원하는 협약을 체결하지는 못하고 어재연 장군의 깃발만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이때 미국의 함대에는 일본의 외무성 하급 관리인 안도 다로라는 정보원이 있었습니다. 이 정보원은 전투를 끝까지 지켜보고는 조선의 병력 상황을 일본에 넘겼으며, 이것은 4년 후 일본이 강화도 조약을 성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일본은 미국이 하지 못한 조선의 개항을 성사한 것입니다.

강화도 조약은 조일수호조약이라고도 하는데, 일본과 맺은 불평등 조약입니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부산, 원산, 제물포의 세 항구를 개항하였고, 개항장의 일정 지역에 일본인이 거주하는 것을 허용하였습니다. 거주하는 일본인은 점점 늘어갔고, 개항을 통해 서양의 신문물이 들어왔습니다. 이 중 하나가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이 마시기 위한 맥주였습니다. 일본 맥주가 정식으로 수입된 것으로, 이것은 곧 한국에서 맥주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처음으로 수입된 맥주는 삿포로 맥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삿포로는 1876년 홋카이도에 세워진 맥주 양조장으로, 일본에서 일본인이 세운 최초의 상업양조장이기도 합니다. 일본의 첫 상업 맥주가 한국의 첫 수입 맥주가 된 셈입니다. 이어서 에비스 맥주와 기린 맥주가 연달아 수입되었습니다. 1910년이 되면 한국에 일본 맥주회사의 출장소가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맥주를 수입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맥주는 한국에 거주하고 있던 일부 부유한 외국인들이 마시던 술로 한국인들이 마실 수 있는 술은 아니었습니다. 맥주의 가격도 비쌌습니다. 일본 비빔밥이 50전, 맥주 한 병이 75전이라는 기사가 당시 동아일보(1921년 4월 21일)에서 보이는데, 맥주가 물 건너온 밥 한 끼보다 비싼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평소 직장인 점심의 3~4배에 달하는 스테이크 맛집의 한 끼보다 비싼 것이 맥주였습니다.

맥주의 수입이 늘어나면서 일본인들이 우리의 땅에 맥주 양조장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1920년대입니다. 그러다가 1933년이 되어 영등포에 조선맥주주식회사(이하 조선맥주)가 설립되었습니다. 이것이 한국에 세워진 최초의 맥주 양조장입니다. 조선맥주는 일본의 대일본맥주의 자회사로 만들어진 회사입니다. 대일본맥주는 지금으로 치면 삿포로 맥주, 아사히 맥주, 에비스 맥주가 합병하여 설립된 맥주 회사로 당시 일본에서 70%의 점유율을 보일 정도로 큰 회사였습니다. 조선맥주는 일본 자본과 조선 자본의 7:3의 비율로 설립되었습니다. 설립 당시부터 일본의 자본 비율이 큰 데다 양조 기술 모두 일본에서 들여온 것으로, 양조장이 한국 땅에 있을 뿐 거의 일본 회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맥주는 크라운 맥주라는 상표를 사용했으며, 1998년에 하이트 맥주로 사명을 바꾸었고, 2005년에 소주 회사와 합병하여 지금의 하이트진로가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대일본맥주의 점유율을 제외한 나머지 점유율을 가지고 있던 기린맥주는 1933년 12월에 역시 영등포에 쇼와기린맥주(소화기린맥주)를 설립했습니다. 쇼와기린맥주는 해방 후 일본인들이 떠나고 적산 공장으로 지정되었다가, 쇼와기린맥주의 주주이기도 했던 두산 박승직 사장이 계승하여 이름을 동양맥주로 바꾸고 OB맥주라는 상표를 사용했으며, 1995년부터 회사명이 오비맥주가 되었습니다.

영등포의 조선맥주

영등포의 OB맥주

그런데 최초의 맥주 양조장들이 모두 영등포에서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조선맥주는 영등포가 다른 지역과 철길로 연결되어 있어 맥주를 수출하거나 맥주 재료를 수입해 오기 좋다고 했습니다. 또한 근처에 흐르는 샛강의 물맛이 좋고 수량이 풍부해 맥주를 양조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쇼와기린맥주도 맥주를 수송하기 위한 역과 선로가 있어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일본이 조선에 맥주 공장을 짓기 위한 시도는 1920년대부터입니다. 이때 적당한 토지를 찾고 수질 또한 좋은 곳을 찾았는데, 평양이나 경성도 후보지 중의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편리한 교통, 수질의 문제, 수해의 염려 등을 고려하여 최종적으로 후보에 오른 곳은 영등포였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군수 사업이 활발해지면서 방직 공장이나 가공 공장 등 다양한 공장 시설이 영등포에 들어오게 됩니다. 당시 영등포역 주변에만 24개의 공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영등포는 원래 경기도 시흥군 소속이었으며 1936년에 서울에 편입되었습니다. 영등포는 토지의 가격이 서울에 비해 저렴하고, 경인선과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교통이 편리했으며, 산이 없는 평지에 한강을 끼고 있어 각종 공장을 짓기에 적합했습니다. 조선맥주와 쇼와기린맥주는 이렇게 입지 조건이 좋은 곳에 공장 부지의 문제가 해결되자 곧바로 맥주 공장을 설립한 것입니다.

최초의 양조장 터를 찾아가는 영등포 시간 여행

조선맥주의 양조장 부지는 지금의 영등포 푸르지오 아파트입니다. IMF 이후 경영이 악화한 하이트맥주는 이 용지를 매각하고 저렴한 부지를 찾아 공장을 이전하였습니다. 그곳이 현재 하이트맥주 공장이 있는 강원도 홍천입니다. 영등포 푸르지오 아파트에 가면 110동과 113동 사이에 있는 놀이터 안에 맥주통 조형물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대한민국 맥주의 시초를 기리는 곳에 “예로부터 물이 깨끗하고 좋기로 유명한 곳에 1933년 우리나라 최초의 맥주 공장이 설립되었다”는 내용의 기념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 관심을 받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어 안타깝습니다.

영등포 아파트 단지에 있는 한국 최초의 맥주 양조장 기념 조형물

영등포 공원 내에 있는 오비맥주 기념 조형물

쇼와기린맥주의 양조장 부지는 지금의 영등포 공원입니다. 1933년부터 1997년까지 운영되었던 영등포 공장은 주변이 개발되고 거주지가 들어서면서, 공장 소음으로 주민들의 민원과 항의가 빗발치자, 서울시가 오비맥주와 합의하여 공장용지를 매입하여 공원으로 조성하였습니다. 오비맥주는 1997년 경기도 이천으로 이전하였습니다. 영등포 공원에는 현재 맥주 담금솥이 조형물로 남아 있습니다. 이 담금솥은 1933년부터 쇼와기린맥주가 맥아를 끓일 때 사용하였던 것으로, 오비맥주가 이전하면서 서울시에 기증한 것입니다.

그 밖에 영등포에는 근대 역사의 흔적이 가득합니다. 대선제분 공장 부지는 현재 근린생활시설로 재생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타임스퀘어 자리는 과거 경성방직이 있던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곳에서 새로운 맥주 공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문래동에는 일제 강점기 철공소 건물을 개조해 만든 비어바나 양조장과 펍이 있고, 영등포역 앞 오래된 먹자골목에는 적산 가옥에 자리 잡은 아트몬스터가 있습니다. 외세의 침략으로 시작된 한국 맥주의 자리에 근사한 크래프트 맥주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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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태진

맥주인문학서 저자. 맥주로 내장도 채우고 뇌도 채우며 '날마다 좋은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 iharu@kakao.com / 인스타 iharu04 / 브런치 https://brunch.co.kr/@ih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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