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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탄생 (15부)

15. 와인의 근대화 2

영국 와인 시장에서 포트 와인이 입지를 굳히고 있을 때 프랑스는 내수 시장의 발전이 이루어졌고, 이와 더불어 포도 재배와 와인 메이킹에 대해서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와인은 과학의 산물이다. / 사진 제공: 배두환

와인은 돈이 되는 중요한 산업이었고, 돈을 필요로 하는 많은 이들의 요청 혹은 자발적으로 여러 분야의 과학자, 농학자, 식물학자, 화학자들이 와인을 만들 때 으레 하던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 발 벗고 뛰어들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보르도 학술원은 와인 서적의 간행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1756년에는 “와인을 생산하고 정화하고 보관하기에 가장 알맞은 방법은 무엇일까? 와인 정화에 계란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라는 아주 긴 주제를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보르도만큼 국외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프랑스에서 보르도와 어깨를 견주었던 부르고뉴 와인도 품질 관리에 박차를 가했다. 디종 학술원이 수신인으로 되어 있는 1777년의 편지에는 “부르고뉴 고급 와인의 판매 촉진 방법 연구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로마네 꽁띠 / 사진 제공: 배두환

프랑스의 보르도는 와인 세계에서 늘 정상에 군림했지만, 이 시기에는 부르고뉴도 가격이 비싸고 귀한 와인으로 자리를 잡았다. 현재 부르고뉴 최고의 와인으로 꼽히는 로마네 콩티와 몽라셰는 그 당시에도 비싼 가격에 거래가 됐다. 하지만 부르고뉴는 내륙에 있었고, 도로나 철도와 같은 기반 시설이 잘 갖추어지지 않았던 당시에는, 항구가 있지 않은 한 해외로 수출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보르도만큼 유명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근처에 있었던 파리에서만큼은 꽤 많은 인기를 누렸다. 당시 파리에서 부르고뉴의 클로 드 부조, 샹베르탱, 본, 뉘 등의 와인은 일반 와인보다 약 50퍼센트 더 비싸게 판매가 되었다. 여기서 로마네 콩티나 몽라셰라면 1/3의 가격이 더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시장에서 보르도 와인에 부과하는 프리미엄에 비하면 이 정도 가격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내륙에 위치해 불리한 상황에서도 일찍이 와인의 세계에서 정상에 군림했던 부르고뉴 와인들 / 사진 제공: 배두환

인구가 빠르게 증가함에 따라 와인의 판매도 빠르게 늘어갔지만, 와인의 색이나, 향, 맛 따위를 두고 평가를 내리거나 찬사를 늘어놓는 행위 자체는 드물었다. 대부분의 서민들은 색의 차이를 이해하고 색의 진하기에 따라 알코올 도수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와인의 품질 개선에 관심을 쏟을 만한 여력이 있는 사람들, 즉 귀족이나 부르주아들은 포도 재배부터 와인 보관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에서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포도 품종도 신중하게 선택했고 수령이 오래된 포도나무를 써서 훨씬 풍부한 맛을 지향했으며, 잘 익은 포도만 골라서 따고, 발효와 숙성에 관해서도 여러 시도를 하면서 품질을 향상시키는 노하우를 점차 깨달아갔다.

와인을 만들기는 쉽지만, 좋은 와인을 만드는 것은 어렵다. / 사진 제공: 배두환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고급 와인을 생산할 여력이 있는 사람들 이야기였다. 영세한 포도밭을 운영하는 생산업자들은 포도밭을 겨우 운영하기에 바빠서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거나 도전, 모험, 실험을 할 여력이 없었다. 예를 들어 당시의 툴루즈 인근의 농부들은 가지치기도 제대로 안 했고, 쟁기질도 2년에 한 번 하거나, 익지도 않은 포도를 따서 발로 밟아 즙을 내고 몇 달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 제대로 말리지도 않은 통에 넣었다고 한다. 당연히 보르도, 그리고 그 인근의 선진화된 와인들과 경쟁할 수가 없었다. 아니,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고급 와인은 그들만의 시장이 존재했고, 대량 생산의 대중 와인은 그 와인을 원하는 시장을 위해 만들면 됐다. 이렇게 프랑스 내에서도 지역마다 와인의 품질 격차가 점차 심해져 갔다.

빠르게 발전한 와인 메이킹 기술로 인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신선한 외국의 와인을 마실 수 있게 됐다. / 사진 제공: 배두환

프랑스의 와인 생산자들의 가장 큰 과제는 와인이 운송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갓 만들었을 때와 같은 신선한 품질을 유지해서 소비자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였다. 당시의 어느 와인 전문가의 글을 보면 당시 와인의 보존 기간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와인은 숙성 기간에 따라 묵은 와인과 햇 와인, 그리고 중간 정도의 와인으로 나뉜다. 햇 와인은 숙성 기간이 2~3개월, 묵은 와인은 1년, 중간 정도의 와인은 4개월에서 1년 사이이다.”

당시 출간된 백과전서의 와인 항목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18세기의 와인은 2000년 전인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비해 달라진 점이 거의 없는 셈이다. 이 시기에 몇 가지 와인의 수명을 늘리는 황당한 방법들이 있었다. 가장 유명했던 악습이 와인에 납을 넣는 방식.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납은 그리스 로마 시대 때부터 17세기까지 긴 시간 동안 사용되어왔다. 그 이유가 납이 와인의 단맛을 높이고 박테리아의 성장을 억제했기 때문이다. 본래 납의 기본적인 성질이 입안에 들어가면 혀의 미뢰를 특이하게 자극해서 단맛을 낸다. 비단 와인뿐만 아니라 외상을 치료할 때도 납으로 만든 연고를 바르기도 했다.

과거에 와인은 단순히 포도로만 만든 술을 지칭하지 않았다. / 사진 제공: 배두환

그러던 납이 17세기에 다양한 질병을 일으키는 원흉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대표적으로 데번셔 산통과 푸아투 산통인데, 여기서 데번셔와 푸아투는 영국과 프랑스의 지역 이름이다. 여기 지역의 사과주와 와인 생산자들이 인근의 생산자들과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납을 와인에 넣기 시작했던 것. 그리고 후에 이를 마신 사람들이 극심한 복통, 변비, 황달, 수족 마비, 시력 상실, 언어 장애, 중풍 등의 증상을 보이면서 문제가 있음이 대두됐다. 17세기 말, 독일의 의사 코켈은 이 수많은 질병의 원인을 술에 함유된 납으로 규정지었고, 결국 독일의 뷔르텐베르크에서는 1696년부터 납 사용을 금지했다. 납의 유해성에 대해서 널리 알려진 것은 18세기부터였는데, 물론 그 이후에도 납 사용의 관행은 암암리에 계속됐다.

샤프탈 / 사진 출처: wikimedia

납의 유행성이 알려진 후 와인의 보관을 책임지는 것으로, 설탕이 지목됐다. 설탕이 어떻게 와인의 장기보관을 돕는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는데, 단순한 이유다. 발효가 시작되기 전에 와인에 설탕을 넣으면 알코올 도수가 높아지고, 높은 알코올 도수를 지닌 와인은 그렇지 않은 와인보다 보관이 길어진다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설탕을 와인에 첨가하기 시작한 것은 1801년부터라고 한다. 여기서 샤프탈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샤프탈은 “와인에 설탕을 넣는 것”. 이 주제를 가지고 논문을 발표한 장 앙투완 샤프탈(Jean Antoine Chaptal)을 이야기한다. 또한 샤프탈은 지금의 설탕을 첨가하는 행위를 일컫는 ‘chaptalization’의 어원이 된 사람이다..

포도의 당도가 미치지 못할 때 간혹 보당을 하기도 한다. / 사진 제공: 배두환

기록에 따르면 설탕을 와인에 넣기 시작한 것은 샤프탈이 저서를 발표하기 훨씬 전부터다. 정확히 와인에 감미료를 사용해야 하는 이유를 지적한 화학자는 마케르라고 한다. 그는 날씨가 좋지 않아 덜 익은 포도로 와인을 만들 경우, 머스트(포도를 짜낸 과즙)의 신맛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이를 개선하기 위해 당분의 비율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덜 익은 포도를 압착해서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시큼한 즙을 얻은 다음에 거기에 설탕을 넣고 발효를 시켰다. 이렇게 해서 1777년 10월까지 1년 동안 숙성시킨 와인을 만들었는데, 이 와인은 농사가 풍년이었던 시기에 유명한 와이너리에서 만든 와인만큼 맛이 좋았다고 한다. 사실 마케르는 와인에 설탕을 넣은 것을 인공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자연에서 얻지 못한 부족분을 메우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최근의 와인들은 대부분 포도의 천연 당분만으로 와인을 만든다. / 사진 제공: 배두환

이처럼 발효의 시작을 앞당기고 알코올 도수를 높이기 위해 설탕이나 꿀 혹은 시럽을 권장한 과학자나 농학자는 꽤 많았다. 하지만 샤프탈의 이름이 유난히 두각 된 것은 그의 저서가 나폴레옹 정부로 바뀌는 시기에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혁명기 동안 내리막길을 걸었던 프랑스의 경제를 회복하기 위한 일환으로 와인 산업 부흥 정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1803년 나폴레옹 정부는 와인 생산업자들에게 <샤프탈의 방식으로 와인을 제조하는 방법>을 배포했다. 그리고 이 책자는 18세기 와인 생산업자들의 바이블이라고 할 정도의 위치를 가진 매우 중요한 참고자료로 역사에 길이 남았다.

한 병의 와인이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결정이 이루어진다. / 사진 제공: 배두환

물론 샤프탈의 명성이 운 때문에 거저 얻어진 것은 아니다. 샤프탈은 이 책을 유명 와인 생산업자들을 상대로 설문 조사까지 벌여 얻는 실전 경험과 과학 이론을 총망라해서 만들었다. 본래 샤프탈이 몽펠리에 대학에서 의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 심지어 화학 교수까지 역임했던 인재였기 때문에 탄생할 수 있었던 역작인 셈이다. 이 책은 토질에 관한 깊은 지식은 물론, 햇빛이 포도밭에 미치는 영향, 와인의 발효 기술과 보관 기술까지 아울렀다. 심지어 샤프탈은 와인은 우유나 물과 달리 자연의 산물이 아니며, 인간의 개입 정도에 따라 결과물이 매우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과거의 악습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지적한 인물이다.

자연과 사람이 조화를 이루어야 좋은 와인이 탄생한다. / 사진 제공: 배두환

이런 시기를 거쳐서 와인이란 ‘자연’과 ‘인간’의 역할이 균형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시각이 널리 자리 잡게 됐다.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와인이란 포도로 만든 술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술을 통칭하는 의미가 강했다. 예를 들어, 와인을 끓이고 졸이고, 다른 와인을 섞고, 소금물이나 꿀, 향신료나 허브 등 이루 말할 수도 없이 다채로운 향신료를 첨가하고, 알코올 도수를 높이고, 나무 열매나 염료로 색을 입힌 모든 것을 와인이라 불렀다. 그래도 샤프탈이 활약하던 그 시기부터 이미 정부는 와인에 세 가지 행위를 금했다. 첫째, 와인에 인체에 해로운 첨가물을 넣는 것을 금지했다. 대표적으로 납. 둘째. 와인의 생산지를 속이는 것을 금지한다. 즉, 아무리 맛과 색이 비슷해도, 심지어 소비자가 차이점을 모를 만큼 무지하다 하더라도, 출처를 알 수 없는 저급 와인을 고급 프랑스 와인으로 속여서 파는 행위를 금지했다. 셋째, 와인의 제조 과정에서 생산자가 허용된 것 이상으로 개입하는 것을 금지한다. 즉 포도가 아닌 다른 열매로 색을 낸다는 등의 행위를 말한다.

1794년 프랑스 정부가 68명의 와인 매매업자에게 샘플을 회수해서 분석한 결과, 와인이라 부를 수 있는 샘플은 겨우 8개에 불과하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대부분의 와인에 물, 사과주, 브랜디, 비트 뿌리 등의 천연 색소나 심지어 인공 색소가 섞여 있었다. 이와 같은 혼란한 시기에 정부의 강력한 규제만이 정직하게 와인을 만드는 생산자들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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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쟁이부부

선후배 사이였던 와인 매거진 기자 출신 남자, 소믈리에 출신 여자. 살아오며 경험한 와인의 절반을 함께 마셨고, 앞으로 만나게될 와인들은 항상 같이 마시게 될 동반자 관계. 평소엔 식당 주인, 때론 여행작가, 이따금 와인 강사, 이곳에선 와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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