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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탄생 (14부)

14. 와인의 근대화 1

근대라고 하면 보통 서구에서는 동로마 제국의 멸망(AD 1453년)이나 루터의 종교 개혁(AD 1517년)부터 시작해서,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나 2차 세계대전의 끝, 그러니까 1945년 전까지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여기서 ‘와인’의 근대화는 18세기가 시작되는 1700년부터의 이야기를 다뤄본다.

보르도 시를 관통하는 지롱드 강과 포도밭 / 사진 제공: 배두환

1700년대에는 프랑스의 포도 재배 산업이 급격하게 성장한 시기다. 특히 프랑스 와인 산업의 노른자위였던 보르도는 1679년, 영국과의 무역 갈등을 끝내고 영국 시장으로 와인을 재수출할 기회를 잡게 된다. 다만 안타깝게도 이 개방은 보르도 상인들의 기대와 다르게 매우 짧게 끝났다. 1703년, 다시 양국 간에 전쟁이 터지면서 영국 시장은 이로부터 7년 동안 프랑스에는 문을 닫았던 것. 하지만 보르도의 와인 생산업자들은 이 난국을 좋게 얘기하면 슬기롭게, 나쁘게 이야기하면 교묘하게 빠져나갔다. 선박에 와인을 싣고 영국 근처까지 가서 영국의 사나포선에 일부러 나포되는 방법을 쓴 것이다. 여기서 사나포선이라는 것은 승무원은 민간인이지만 교전국의 정부로부터 적선을 공격하고 나포할 권리를 인정받은 무장 선박을 이야기한다.

보르도 최고급 와인들은 무역 전쟁통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 사진 제공: 배두환

와인을 가득 실은 프랑스선 선박을 나포한 사나포선 선장들은 와인을 런던으로 들고 가 경매에 부쳤다. 경매에 낙찰된 와인에 대한 금액은 거진 사나포선의 몫이었고, 일부가 왕실, 일부는 경매가 치러진 선술집 주인에게 돌아갔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포된 선박에 실린 와인들의 주인은 어떤 이득을 얻게 되는 걸까? 이에 대한 정확한 증거나 기록은 없지만, 사나포선 선장과 보르도 와인 상인들간에 모종의 거래가 있을 거로 의심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리고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경매가의 약 4분의 1이 보르도 와인 생산업자들이나 상인에게 돌아갔을 거라고 한다.

당시 포도밭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여겨졌을 수도 있다. / 사진 제공: 배두환

기록이 의하면, 1705년 5월 200배럴에 달하는 오브리옹, 퐁타크 와인이 런던에서 경매로 넘어갔으며, 같은 해 6월에는 230배럴의 오브리옹과 마고가 런던 시장에서 판매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암암리에 판매된 보르도 고급 와인들의 가격은 배럴당 60파운드였는데, 평범한 보르도 와인인 클라레의 2배에 달하는 가격이었다고 한다. 오브리옹과 마고는 1855년 그랑 크뤼 클라세에서 1등급 와인으로 지정되기도 전에,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지도를 지녔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오늘날 보르도에서 와인이란 중요한 관광 산업의 하나이기도 하다. / 사진 제공: 배두환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1705년 한 해 동안 오브리옹, 퐁타크, 마고를 팔아서 올린 수입이 4만 파운드에 달했다고 하는데, 이곳저곳 수수료를 뗀다고 하더라도 사나포 선장과 보르도 와인 상인들의 몫이 결코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얼마이던 간에 보르도 인근 시장에 헐값으로 넘기는 쪽에 비하면 이윤이 훨씬 많이 남는 장사였다고 한다. 이렇게 경매로 넘어간 프랑스 최고급 와인은 영국 전역에서 판매됐는데, 주 고객 가운데 브리스톨의 허비 백작이 있었다. 1703년에서 1710년 동안 그가 남긴 장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1703년 12월 “마구스(마고) 클라레 1호그즈헤드 구입” – 27파운드 10실링.
1704년 6월 “아비뇽 와인(아마도 샤또뇌프뒤파프) 3상자 구입” – 16파운드 10실링.
1705년 7월 “와인 3호그즈헤드, 오브리옹 2호그즈헤드, 화이트 랭군(랑공, 지롱드 강 유역의 남서부 지역 이름) 1호그즈헤드 구입” – 80파운드
1707년 5월 “오브라이언 와인 2호그즈헤드 구입” – 56파운드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정상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던 오브리옹 / 사진 제공: 배두환

18세기 초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포도밭 확산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이유는 단순하다. 돈이 되니까. 고급 와인으로 높은 수익을 올리는 부유층의 투자가 입장에서도, 값싼 와인으로 대중적인 시장을 겨냥하는 소규모 농부들의 입장에서도 와인은 이윤이 꽤 많이 남는 장사였다.
예를 들어 곡물 농사를 지어서 한 집안을 부양하려면 땅이 20~30에이커는 있어야 했지만, 포도 농사는 1에이커만 있어도 충분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포도밭을 법으로 제한했는데, 대표적으로 프랑스 정부는 1731년 국왕의 허락 없이는 새로운 포도밭을 만들 수 없다는 법령을 발표했다. 정부가 포도밭을 제한한 가장 큰 이유는 식량 부족이 우려되어서였다. 가난한 서민들의 삶을 걱정했다기보다 식량 부족이 결국 폭동으로 이어질까 두려웠던 것이다. 물론 보다 타당한 이유에서 보자면, 와인의 공급이 과잉되면 가격이 폭락하게 되고, 결국 더 많은 포도 재배 농가들이 파산할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수 세기에 걸쳐 형성되어 온 보르도 높은 땅 값. 사진은 라피트 로칠드 / 사진 제공: 배두환

하지만 이 법령에 따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심지어 보르도에서 포도를 재배하는 땅의 면적은 귀족 출신의 지주들 덕분에 18세기 내내 꾸준히 증가세를 보였다. 당시 이들은 귀족이라는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포도밭을 일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영국과 네덜란드 소비자들의 입맛에 알맞은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술을 일찍이 도입했다. 바로 이 부분이 보르도가 어떻게 세계 와인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고, 기술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보르도 와인은 주요 고객의 성향에 따라 변화하면서 지금의 명성을 이어왔다. / 사진 제공: 배두환

당시 기록에 따르면, 1744년 보르도의 절반 이상이 포도밭이었으며, 소유주의 90퍼센트가 귀족과 부유한 부르주아였다고 한다. 와인의 품질만 보장이 된다면 작은 땅일지라도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이보다 매력적인 사업은 없었을 것이다. 또한 땅을 소유한 귀족들 중 소작농을 두었던 이들은, 포도밭 임대료를 주로 와인으로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평의원이었던 카스텔노의 경우, 그가 소유했던 땅은 0.08제곱킬로미터 정도였으며, 임대료로 받은 와인이 25배럴이었다고 한다. 당시 와인은 배럴당 900리브르정도의 가치를 지녔기 때문에 그는 2,500리브르라는 수익을 챙길 수 있었다. 금액만으로는 감이 잘 안 오는데, 당시 이 금액의 절반만 있어도 여름용 별장과 겨울용 별장, 4~6명의 하인, 마차, 좋은 옷, 고급 와인과 음식, 연회, 여행을 즐기면서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라피트와 라투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던 세귀르 백작의 1년 수입은 최소 10만에서 18만 리브르에 달했다고 한다. 상위 1%인 셈이다.

샤또 라피트 로칠드 / 사진 제공: 배두환

보르도의 일부 고급 와인들은 높은 가격을 유지하면서 영국 시장에서도 활발하게 판매가 되었지만, 서민들을 겨냥한 평범한 프랑스 와인들은 포르투갈 와인에 밀려 빛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바로 영국과 포르투갈 사이에 체결된 메수엔 조약 때문이다. 이 협정의 골자는 포르투갈 와인에 부과하는 관세를 프랑스 와인의 3분의 2정도로 낮추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대가로 영국의 직물은 포르투갈에서 특혜를 누렸다. 참고로 당시 영국에서 포르투갈 와인에 부과된 관세는 배럴당 7파운드였지만, 프랑스 와인은 배럴당 20파운드였다고 한다.

포르투갈 도우루 항 / 사진 제공: 배두환

포르투갈 와인 산업은 메수엔 조약 덕분에 급속도록 발전했는데, 이 당시 영국에서 수입한 와인의 3분의 2가 포르투갈 와인이었다고 한다. 나머지는 스페인이었고, 여태 이야기했던 프랑스는 전체의 4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포르투갈의 대표 와인은 포트 와인이었다. 현재 포트 와인이 누리고 있는 전 세계적인 성공은 거슬러 올라가면 이 메수엔 조약으로 비롯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1730년대, 포트 와인은 수요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한 곳의 몰락은 한 곳의 성공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 사진 제공: 배두환

하지만 포트 와인이 계속 장밋빛 대로만 걸었던 건 아니다. 급작스런 인기와 엄청난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던 상인들은 저급 와인을 섞어서 가짜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색깔이 짙은 와인과 옅은 와인을 섞기도 하고, 독한 와인과 약한 와인을 섞은 다음에 설탕과 알코올을 넣고 당도를 높이고, 딱총나무 열매로 색깔을 내고, 후추, 생강, 계피와 같은 향신료로 맛을 더했다. 즉, 와인이 아닌 혼합주를 포트 와인으로 속여 판 것이다. 꼬리가 길면 밟히듯 이런 행위가 영국에서 발각이 되었고 건강에 해롭다는 이미지가 대중들 사이에 퍼지면서 포트 와인 수입 양은 곤두박질쳤다. 물론 가격도 대폭락.

도우루 밸리 / 사진 제공: 배두환

포르투갈 정부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도우루 강 와인 산업을 감독, 관리하는 기구를 재빨리 창설했다. 이때 탄생한 알토-도우루 포도원 조합은 도우루 강에서 와인을 만들 수 있는 지역을 제한하는 동시에 포도의 재배부터 와인의 선적, 그리고 판매까지 와인 산업의 모든 단계를 관리하는 기구로 성장해갔다. 심지어 지역에서 자라던 딱총나무를 모두 없애서 위조의 가능성을 근절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딱총나무 열매의 향과 맛이 궁금해질 정도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와인의 원산지 통제와 보호의 원조는 프랑스의 AOC가 아니라 포르투갈의 도우루 밸리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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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쟁이부부

선후배 사이였던 와인 매거진 기자 출신 남자, 소믈리에 출신 여자. 살아오며 경험한 와인의 절반을 함께 마셨고, 앞으로 만나게될 와인들은 항상 같이 마시게 될 동반자 관계. 평소엔 식당 주인, 때론 여행작가, 이따금 와인 강사, 이곳에선 와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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