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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탄생 (12부)

12. 와인의 신대륙 상륙 – 섬들과 남아메리카

1500년대, 대항해시대를 맞이해 유럽인들의 탐험 정신과 팽창주의가 전 세계로 뻗어 나갔다. 참고로 대항해시대란 항해술을 발전시킨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하는 항로와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와 아시아로의 항로를 발견하면서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하는 등 다양한 지리상의 발견을 이룩한 시대를 말한다. 과거 동쪽으로 하염없이 걸어가 인도, 중국, 러시아를 주로 여행했던 탐험가들은 신대륙으로 나아가기 위해 대서양에 목숨을 걸고 배를 띄웠다. 물론 이 과정이 매우 야만적이었다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와인 이야기만 하자. 어찌 되었든 와인 문화는 새로운 대륙으로 나아갔고, 완벽히 새로운 무대를 맞이하게 됐다.

기록에 따르면 유럽인들이 발을 들여놓은 신대륙에는 자생하는 야생 포도나무는 있었지만, 이를 의도적으로 압착 및 발효해서 와인을 만들어 먹는 이들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삶을 유지하는데 빵과 와인이 없으면 안 됐던 유럽인은 포도밭을 넓히는 한편, 포도를 발효 시켜 와인으로 만들어 마시기 시작했다.

카나리아 제도 / 사진 출처: wikimedia by Lviatour

가장 먼저 이야기할 개척지는 카나리아 제도다. 대항해시대를 주도한 국가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다. 역사학자들도 대항해시대의 시작을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가 주축이 된 15세기 초 중반으로 본다. 아메리카 항로를 개척한 콜럼버스도 (출생은 다르지만) 주 무대가 스페인이었고,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항로를 개척한 바스코 다 가마도 포르투갈 사람이다. 또한 세계 최초로 세계 일주를 했던 페르디난드 마젤란도 포르투갈인이다. (정확히 마젤란은 도중 사망했고 그가 인솔한 함대가 성공했다)

콜럼버스 / 사진 출처: wikimedia by Sebastiano del Piombo

그렇다면 왜 스페인, 포르투갈일까? 이유는 두 국가가 유럽의 변방(특히 포르투갈)이었다는 점과 동방의 강력한 오스만 제국이 등장함에 따라 육로 교역이 어려워지자 그 해결책으로 바다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대항해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비단길은 명맥이 끊겼고, 북유럽 일대에서 해상 무역을 독점하던 한자 동맹도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스페인 정복자들의 식민지 건설, 그리고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 설립을 끝으로 대항해시대는 막을 내리고, 유럽은 식민지 땅따먹기에 혈안이 되는 근대 제국주의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카나리아 제도 / 사진 출처: wikimedia

여하튼 카나리아 제도는 아프리카 대륙의 서쪽, 그러니까 모로코에서 해상으로 100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나마 유럽 대륙에서 가까운 곳이며, 이 카나리아 제도가 바로 대항해시대의 해상 무역의 거점 즉, 배가 기항하고 쉬어가는 요충지였다. 위치가 위치인 만큼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식민지로 만들고 이곳에서 와인을 만들어서 외부로 수출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름조차 생소한 카나리아 와인은 당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카나리아 제도의 주요 섬이었던 테네리페 섬은 와인 수출로 살림을 꾸려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나리아 와인의 주된 마켓은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였는데, 이 와인이 워낙 유명해지자, 17세기에는 최대 고객이 영국으로 바뀌었다. 특히 말바지아로 만든 달콤한 화이트 와인이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기록에 따르면 1620년대에 약 125만 리터의 수출량을 보였는데, 불과 60년 후인 1680년대에는 약 350만 리터 그러니까 병으로 따지면 약 300만 병의 와인이 수출되었다. 당시 영국의 작가였던 제임스 하우얼은 “예전에는 부유층만 조금씩 마실 수 있었던 카나리아 와인을 이제 남녀노소가 우유처럼 마신다”고 언급했다.

환경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화하는 포도나무 / 사진 제공: 배두환

하지만 카나리아 와인의 인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8세기, 주요 소비국이었던 영국과의 무역 거래에서 상호 불균형적인 문제가 발생했던 것. 영국의 주요 수출품인 직물이 카나리아 제도에서는 별로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무역 수지가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값이 오른 카나리아 와인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새롭게 발굴한 값싼 스위트 와인으로 대체되면서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었다.

카나리아 와인 외에도 당대를 풍미했던 대서양의 섬 와인이 바로 마데이라다. 이 섬은 와인 말고도 한 가지로 굉장히 유명한데, 바로 세계적인 축구 선수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고향이라는 점이다. 마데이라 섬의 푼샬 항에는 호날두의 동상이 서 있다. 또한 2017년 마데이라 국제공항의 이름이 호날두 공항으로 바뀌기도 했다. 그야말로 마데이라의 영원한 영웅인 셈이다.

오랜 와인 역사를 자랑하는 마데이라 / 사진 제공: 배두환

포르투갈이 마데이라 제도를 발견한 건 1420년이었다. 당시 이 섬들은 숲이 울창한 무인도였다. 이후 포르투갈이 식민지로 삼고 사탕수수와 그리스에서 가져온 화이트 포도 품종인 맘지(mamsey)를 심으면서 설탕과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여담이지만 1500년대에만 해도 마데이라는 세계 최대의 설탕 생산지였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 밀리면서 본격적으로 와인 산업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이는 막대한 이윤을 남겼다. 마데이라 와인 산업이 당시 번창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마데이라 섬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는 뱃길의 주요 기항지였기 때문이다.

숙성 중인 마데이라 와인들 / 사진 출처: www.madeirawineanddine.com

본래 마데이라 와인은 가볍고 금세 향과 맛이 변하는 평범한 테이블 와인이었다. 하지만, 열대 기후였던 섬의 특징 때문에 보관하던 와인들이 자연스럽게 열화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고, 여기서 독특한 향과 맛이 생성됐다. 그리고 이렇게 열화된 와인에 주정을 첨가해 긴 항해를 버틸 수 있도록 개조했다. 특히 열화 덕분에 생긴 독특한 풍미가 인기 요인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17세기 말 마데이라 와인은 최대 호황기를 누렸으며, 1697년 12월 17일 하루 동안 11척의 선박이 도합 10만 갤런의 마데이라 와인을 싣고 미국의 보스턴과 카리브 해를 향해 떠났다고 한다. 10만 갤런이면 약 40만 리터인데, 이게 단 하루에 실어 나른 양이라고 하니, 1년을 전체로 보고 따지면 어마어마한 양이 만들어진 셈이다.

포트 와인처럼 와인 오프너는 필수가 아닌 선택이다. / 사진 제공: 배두환

참고로 마데이라 와인은 포트나 셰리처럼 주정 강화 와인이지만, 자연적이든 인위적이든 와인에 열을 가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알코올 도수를 끌어 올린 마데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열을 가한다. 하나가 인위적으로 열을 가해 숙성을 빨리 시키는 에스투파젱(Estufagem). 나머지가 태양으로부터 얻는 자연적인 열로 느리게 숙성을 시키는 칸테이로(Canteiro) 방식. 전자는 대중적인 마데이라, 후자는 고급 마데이라에 쓰인다.

하지만 마데이라는 전초기지일 뿐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최대 목표는 아메리카 대륙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볼리비아, 페루, 칠레에 해당하는 남아메리카의 서부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었던 두 나라는 빠르게 포도나무를 재배하고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여기서 와인은 군수품의 일종이기도 했다. 신대륙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원주민과의 대립과 전쟁이 불가피했고, 이 과정에서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서 술, 그러니까 와인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던 셈이다. 또 한 가지 덧붙이면 와인이 더 널리 퍼질 수 있었던데 종교의 역할도 큰 몫을 했다. 와인이 가톨릭 선교원에서 영성체에 쓰였기 때문이다.

광활한 넓이의 남미의 포도밭 / 사진 제공: 배두환

당시 포도재배 면적의 확산 속도는 놀랄 만한 수준이었는데, 1520년대 초 멕시코에서 첫선을 보였던 포도밭이 페루로 전파된 게 1530년대 초반, 그리고 볼리비아와 콜롬비아로 확산된 것은 1530년대 후반이었다. 또한 칠레는 1540년대 초반, 그리고 안데스산맥을 건너 아르헨티나에는 1557년부터 포도 재배를 시작했다. 거의 10년 주기로 대륙을 넘나든 셈이다. 기록에 따르면 1524년, 멕시코의 사령관 코르테스는 오늘날의 멕시코시티에 해당하는 지역의 개척자들에게 포도나무를 심으라고 포고령을 내렸다고 한다. 개척자들에게 땅을 주고, 인디언들을 노동력으로 쓰게 하는 대신 인디언 100명당 최상급 포도나무 1,000그루를 재배하도록 법으로 정했다고 한다.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씁쓸한 대목이다.

이 당시만 해도 캘리포니아는 변방의 작은 와인 산지였다. / 사진 제공: 배두환

아메리카 대륙에 포도 재배가 널리 확산한 데에는 식민자들의 포도 재배에 대한 열정도 있었지만, 아메리카 대륙의 서해안(페루, 칠레, 캘리포니아 등지)이 포도를 재배하기에 좋은 기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페루는 현재 미국이나 칠레에 비하면 와인으로 잘 알려진 편은 아닌데, 그 이유는 필록세라 때문이다. 미국과 칠레와 달리 19세기 말 필록세라의 폐해를 입은 페루는 회생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도 자세히 살펴보면 재앙에서 살아남은 역사적인 와이너리들이 없지 않다. 특히 이까(Ica)라 불리는 지역은 페루 와인의 심장이라고 불린다.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은 본국, 그러니까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서는 식민지의 와인 산업이 날로 번창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것이다. 왜냐면 본국의 상인들은 본토에서 만든 와인을 식민지 시장으로 수출해서 돈을 벌어야 했는데, 식민지에서 와인을 자급자족했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1595년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식민지에서 포도 재배를 새로 시작하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했다고 한다. 물론 성공하지 못했다. 페루는 그 칙령 이후에도 꾸준히 와인 생산량이 늘었고, 칠레 또한 와인 생산은 와인 생산은 북부에서부터 시작됐지만, 곧 산티아고를 중심으로, 중부가 와인 생산의 거점이 되면서 남미를 대표하는 와인 생산국으로 탈바꿈하게 됐다. 다만 아르헨티나의 경우 스페인 정부의 규제 조치를 철저히 따르는 바람에 발전 속도가 느렸다고 한다. 왜 아르헨티나보다 칠레 와인 산업이 세계로 더 치고 나갈 수 있었는지에 대한 작은 해답이 될 수도 있다.

(다음은 북미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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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쟁이부부

선후배 사이였던 와인 매거진 기자 출신 남자, 소믈리에 출신 여자. 살아오며 경험한 와인의 절반을 함께 마셨고, 앞으로 만나게될 와인들은 항상 같이 마시게 될 동반자 관계. 평소엔 식당 주인, 때론 여행작가, 이따금 와인 강사, 이곳에선 와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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