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네 번째 와인바 Talk, 와인 글라스 1
와인잔은 와인의 맛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칠까? 이것은 필자가 운영하는 와인바를 찾는 많은 손님이 가진 궁금증이다. 일전에 와인바 단골이 해준 이야기가 있다. 와인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지인과 식당에 방문하여 와인을 주문하는데 지인이 말하길 “이 식당에 준비된 고급 와인잔에 맞는 와인은 메뉴 이쪽 부분에 있는 와인들이니 이쪽 메뉴의 와인을 시키면 된다”라고 했다며, 와인을 와인잔에 맞춰 골랐다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필자에게 들려주었다.
와인잔의 종류에 따라 와인의 맛과 향이 달라진다는 것은 와인을 배웠거나 와인에 흥미를 느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필자도 와인의 맛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 식당에 준비된 와인잔에 따라 와인을 골라본 기억은 없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와인을 진중하게 대한다는 이야기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와인잔에 따라 왜 와인의 맛과 향이 달라지는 것일까? 와인은 품종이나 와인이 생산되는 산지 등에 따라 와인의 스타일과 특징이 달라진다. 와인잔은 와인이 가진 이 고유한 특성을 가장 잘 표현 할 수 있도록 모양과 크기 등이 각각 다르게 고안되어 있다. 와인에 맞는 적절한 잔을 선택했다면, 다른 잔에 마셨을 때보다 훨씬 풍부한 향과 맛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와인을 잘 마시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좋은 와인잔을 찾는 것이다.
최근에는 여러 나라로부터 많은 종류의 잔이 수입되면서 대중들도 다양한 생산자의 와인잔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종류가 다양해지다 보니 와인잔 하나 선택하는데도 고민이 따른다. 모양은 다 예쁜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차이가 있고, 잔을 들어보면 무게도 각각 다르고 크기도 다르다. 저렴한 것은 몇천 원짜리부터 비싼 것은 십만 원대를 넘어가는 것들도 있다. 종류별로 다 갖춰놓고 싶지만, 여유가 없으면 이 와인잔의 홍수 속에서 나에게 맞는 적절한 와인잔을 찾아내기도 쉽지 않다.
좋은 와인잔의 기준을 알고 고르면 선택이 쉬워진다. 좋은 와인잔은 얇고 투명하며 단단하다. 와인을 마실 때는 향과 맛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는 색의 시각적인 아름다움도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색을 명확하고 맑게 표현하는 와인잔의 투명도도 와인잔을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와인잔은 대부분 유리(glass)나 크리스털(crystal)로 만들어지는데, 유리와 크리스털의 차이는 만들어지는 재료와 성분에 있다. 크리스털이 유리보다 경도가 높고 투명도도 높아서 고급 와인잔은 크리스털을 더 선호한다. 여러 번 반복해서 사용해야 하는 와인잔이 너무 약하면 금세 깨지거나 부러지기 때문에 와인잔의 강도도 꼭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와인잔의 두께는 입에 닿는 촉감과 잔에서 입으로 와인이 넘어오는 감각에 영향을 끼친다. 손님에게도 이렇게 설명하면 이해하지 못하다가 두꺼운 잔과 얇은 잔을 동시에 준비해서 비교하게 하면 금세 차이를 인정한다. 잔을 얇게 만들기 위해서는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잔이 얇을수록 가격이 높아진다. 과거에는 와인잔의 높은 경도를 위해 성분에 납을 섞어 만들었지만 납 성분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알려지고 난 뒤 더는 납 성분을 첨가하지 않고 잔을 만들고 있다.
와인잔은 와인의 종류에 따라 크게 스파클링(sparkling) 와인잔, 화이트(white) 와인잔, 레드(red) 와인잔으로 나뉘며 레드 와인잔은 보르도(Bordeaux) 잔과 부르고뉴(Bourgogne) 잔으로 다시 나뉜다. 최근에는 품종이나 지역에 따라 이름 붙여진 많은 종류의 와인잔이 출시되어 이렇게 네 가지로만 나누기에는 부족하지만, 많은 생산자가 전통적으로 이렇게 잔을 분류하고 있어 이 글에서는 일반적으로 나뉘는 네 가지 분류로 설명하기로 한다.
스파클링 잔의 경우 폭이 매우 좁고 높이가 높은 긴 형태의 글라스가 많이 쓰인다. 스파클링 와인의 특성상 와인을 마시는 내내 잔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거품을 눈으로 즐기기 위해 긴 형태의 플루트(Flute)라고 불리는 잔을 사용한다. 모양은 예쁘지만, 와인 고유의 향을 즐기기엔 좁은 잔의 입구가 방해되기도 해서 그것을 보완한 입구가 조금 넓으면서 긴 형태의 튤립(tulip)이라고 불리는 잔도 많이 사용된다. 과거에는 쿠페(coupe)라는 입구가 넓고 높이가 낮은 잔이 사용되기도 했는데 입구가 너무 넓어 향과 기포가 빠르게 사라지는 단점이 있고 와인을 많이 담을 수 없을뿐더러 와인잔의 이동 시에 넘쳐흐르기 쉬워 불편함이 컸다.
기포가 강하고 톡 쏘는 산도가 좋은 스파클링 와인은 긴 형태의 플루트 잔이 어울리고, 기포가 섬세하면서 우아한 향이 일품인 샴페인(Champagne) 종류는 튤립 잔이 잘 어울린다. 스파클링 와인의 풍부한 향을 온전히 즐기고 싶은 경우에 화이트 와인잔에 담아 마시기도 한다. 디캔팅(decanting)을 고려해야 하는 빈티지(vintage) 샴페인이나 최상급의 샴페인이라면 샴페인의 버블에 집착해 플루트 글라스에 마실 게 아니라 좋은 레드 와인 글라스에 담아 본연의 맛을 섬세하게 즐기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