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와 이세돌의 세기의 바둑 대결. 이세돌의 1승 4패로 끝이 났다. 알파고에게 3연패를 당해 승부가 결정된 순간, 하루아침에 인공지능의 노예로 전락할 뻔했던 인류에게 이세돌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로 위안을 안겨주었다. “이세돌의 패배다. 인간의 패배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화장실에 다녀올 때는 착점하지 않는다는 오래된 바둑의 예의조차 깊게 학습(Deep Learning)하지 않았던 알파고에게는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인공지능은 아직 인류의 품격을 따라잡을 수 없다…”
하지만 이세돌은 마지막까지 인류의 품격을 지켜냈다. 마지막 대국, 그는 상대적으로 불리한 흑돌을 집어 들었다. 결과는 상관없다, 정면돌파의 의지였다. 이세돌은 인간만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운 바둑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정말 원 없이 마음껏 즐겼습니다.”
하지만 ‘바둑의 신’의 출현은 인류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무감각하고 무뚝뚝한 기계가 신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류는 넋 놓고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2016년 다보스 포럼 보고서는 5년 뒤 700만 개 이상의 일자리가 인공지능에 의해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한다. 기계가 인류를 지배할 것이라는 묵시록적 미래가, 팝콘을 입에 주워 담으며 한가롭게 구경하는 SF 영화의 영역 만은 아닌듯 싶다.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250의 150 제곱이라는 경우의 수를 무자비한 연산 능력으로 소화해버리는 인공지능이 우리 눈앞에 있다면, 와인을 테이스팅 하는 로봇도 곧이어 등장하지 않을까? 가능한 일로 보인다. 실제로 인공지능 코(Artificial Nose)가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의 로봇은 단순히 공기 중에 있는 화학물질에 반응하여 그 화학물질의 이름을 정의하는 정도였다. 예컨대, 암모니아 향을 맡고 이것은 NH3라고 말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그 과정이 훨씬 더 정교해졌다. 피트(peat) 향을 맡고 ‘페놀릭’ 성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 향”이라고 하는 적절한 언어로 치환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인공지능은 “매캐하다” “탄 냄새가 난다” “자동차 타이어와 같은 냄새가 난다.” 같은 응용마저 가능하다. 이것은 딥 러닝(Deep Learning)이라는 과정을 통해 가능하다. 바로 알파고가 바둑을 공부한 방식이다. 과학자들은 인공 코에게 향을 표현하는 수많은 단어를 교육한다. 그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표현 뉘앙스 또한 훈련한다. AI(Artificial Intelligence)는 이런 모든 상황과 사례들을 스스로 습득하고 발전시키며 배워간다. 과학자들의 목표는 인간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미묘한 향까지 정확히 찾아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능하다. AI가 와인을 테이스팅 하는 것도. 이미 액체의 산도, 당도, 알코올 도수, 밀도까지 정확히 측정하는 마당에 말이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통해 와인의 지역과 생산지까지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생산자, 와이너리, 빈티지까지. 데이터만 완벽하다면 언제든 AI는 정보를 알아맞힐 수 있다. 바로 빅데이터(Big Data)의 힘이다. 모든 향과 맛을 조합하여 AI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1926년산 샤토 페트뤼스.” 그리고 추측하자면 이런 말까지 덧붙일지 모르겠다. “희귀한 와인인데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샤토 페트뤼스의 역사, 함께 먹으면 좋을 음식까지 덧붙이겠지. 우주의 원자 수만큼이나 많다는 바둑 ‘기보’의 경우의 수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알파고다. 수천 개, 수만 개가 넘는 와인이라고 한들 학습이 어려울까? 요컨대, 인공지능이 와인 테이스팅을 할 수 있는 때가 오고 있는 것이다. 인간보다 정확히, 빠르게, 그리고 한계를 넘어선 수준까지. 1인 1 인공지능이 보급되면, 개인 소믈리에와 항상 함께하는 효과까지 누릴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완벽한 와인 테이스팅 능력을 보여주는 AI 옆에서 한없이 작아져야 할 것인가?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가? 개인적인 생각으로, AI가 범접할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이란 ‘감상’의 영역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감상이란 感想과 鑑賞, 모두를 포괄하는 중의적인 의미다. AI는 주어진 정보를 근거로 와인을 판단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와인은 좋은 와인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런 좋은 점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큰 감흥을 주지 못하는 와인입니다.”라는 감상을 말할 수 있다. 요컨대,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존재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만 아는 AI는 결코 개인적인 감상을 말할 수 없다. “객관적으로 좋은 와인은 아니지만, 내게는 무척 의미 있고 인상 깊은 와인입니다.”와 같은 모순적인 평가는 불가능하다. 이세돌이 마지막 대국, 불리할 것을 알면서도 흑돌을 집은 것과 마찬가지다. AI라면 결코 하지 못할, 모순적인 행동. ‘달리는 기차 밖으로 뛰어내리는’ 자유의지. 그러므로 와인에 관한 평가와 자유로운 감상은 오롯이 인간의 몫인 것이다. 그것은 꼭 논리적일 필요도 없으며, 로봇처럼 딱딱할 필요도 없다. 모든 상상력과 창의력을 동원해 우리는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감상을 자유로이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 와인의 즐거움은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답을 맞혔나 틀렸나에 달렸지 않다. 그것은 와인을 음미하는 과정 속 황홀한 경험에서 비롯한다. 마음속 느낌과 감상. AI가 와인을 정확히 묘사하고 맞출지언정, 인간이 느끼는 황홀함 마저 대신해줄 수는 없다. 와인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더 높은 차원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오직 인간만의 영역이다. 이세돌은 마지막 대국 후, 바둑의 즐거움을 강조했다. “바둑은 즐기는 것입니다. 프로든, 아마추어든 즐기는 것이 바둑의 기본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과연 바둑을 즐기고 있나 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알파고 대국은 정말 원 없이 마음껏 즐겼습니다.” 진정한 승자는 즐기는 자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이번 대국에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가.
AI는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인류도 진화한다. AI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자발적으로 종속되는 대신, 인류의 고유한 ‘감상’의 영역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을 때 말이다. ‘모라벡의 역설’이란 이론이 있다. 인간이 배우기 힘든 체스나 바둑과 같은 연산, 추리, 계산 능력은 컴퓨터에게 쉽지만, 인간에게 무척 쉬운 신체적, 지각적 능력은 컴퓨터에게 어렵다는 사실. 즉, 어려운 문제는 쉽고, 쉬운 문제는 어렵다는 역설이다. 와인을 마시고 즐기고 또 음미하는, 인간에게는 무척 쉬운 과정이 인공지능에게는 몇백 년이 걸쳐도 따라잡을 수 없는 인간의 고유 영역이다. 맛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고, 취향을 만들어내는 일은 알파고라고 한들, 인공 코라고 한들, 결코 따라잡지 못할 일이라는 뜻이다.
언젠가 와인의 세계에 알파고가 찾아온다면 알파고는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남기고 떠날 것이다. “인공지능이 진 것이 아니라 알파고가 진 것이다….” 제아무리 똑똑한 알파고라도, 와인 한 잔을 두고 아름다움에 눈물 흘리지는 못할 것이다. 제아무리 똑똑한 알파고라도, 와인 한 잔을 두고 그 누군가를 가만히 떠올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결론은 명확하다. 덤벼라, 알파고. 와인을 벗 삼아 음풍농월(吟風弄月)하고 아름다움을 누리는 인간을 결코 이길 수 없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