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이 바빴던 2017년 겨울 어느 날, 오레곤 와인 시음회 행사 참석 메일을 받았다. 다른 일에 집중하던 나는 순간 작년 여름 오레곤 윌라멧 밸리(Oregon Willamette Valley)에서의 며칠이 꿈만 같이 머릿 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 유쾌한 기억에 잠겨 있던 중 꼬리를 무는 생각은, “나는 왜 그렇게 현지에서 즐겁게 마셨던 오레곤 와인을 한국에서는 거의 마시지 않을까? 왜 다시 부르고뉴 와인만 고집하게 되었을까?”
피노누아 와인은 나에게 설렘의 와인이다. 프랑스어를 공부하던 그 푸릇푸릇하던 대학 새내기 시절, 부르고뉴 와인을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 때문에 신세계 와인에서도 부르고뉴 스타일의 피노누아 (Burgundy style Pinot Noir)를 찾곤 했다. 에디터의 이전 캘리포니아 기사 시리즈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내 입맛에 맞는 피노누아 와인 찾기”가 와이너리 기행의 목적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부터 오레곤까지 갖가지 피노 와인을 찾아 마셔보며 결국 깨달은 건 그 지역의 기후와 토양과 사람 – 즉 천지인(川地人)의 영향을 받고 탄생한 와인은 그 곳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으므로, 원산지로 와인을 견주지는 말자는 것이었다.
“Do you like Burgundy? Why don’t you try Pinot Noir from Oregon?”
십여 년 전 미국 생활 당시, 동네 와인샵의 프랑스 부르고뉴 코너에서 행복한 미소를 띠던 나에게 한 점원이 말을 걸었다. 나에게 피노누아 라면 그냥 무조건 프랑스 부르고뉴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현지에서는 “그래. 미국에서는 미국 와인도 좀 마셔봐야겠지.” 라며 추천하는 와인을 선뜻 구매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오레곤이 어디 붙어있는 곳인지도 몰랐고, 윌라멧 밸리라고 하면 더더욱 생소한 지역이었다. 그때 처음 마셔본 오레곤 피노누아 와인은 꽤나 감명적이었고, 이후 종종 오레곤 와인을 주변 사람에게 추천하곤 하였다. (첫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기 마련이다. 당시 내가 마신 와인은 Penner-Ash – 1998년 설립된 와이너리로써 백악관 국빈 만찬 와인으로 선정되는 등 현재 대표 오레곤 와이너리라 해도 될 정도로 유명세를 가지고 있다.)
이후 세월이 지나고, 피노누아 와인에 대한 열망 때문에 부르고뉴는 물론이고 오레곤을 갔다. 캘리포니아에서부터 시작한 “와이너리 찾아가기” 기행을 마치며, 부르고뉴 스타일의 피노누아를 신세계 와인에서 찾는다는 건 나의 약간의 오만과 무지가 섞인 바램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부르고뉴와 오레곤의 비슷한 점
전 세계 와인 생산 지역 중에 적포도 품종 중 피노누아만 지배적으로 재배되는 지역은 단 두 군데밖에 없다. 그중에 한 곳은 물론 피노누아의 고향인 프랑스 부르고뉴, 다른 한 곳은 미국 오레곤이다.
오레곤 – 왜 피노누아가 잘 자라는 걸까? 오레곤 와인산지 중 윌라멧 밸리는 오레곤 전체 와이너리의 80%가 자리 잡고 있고, 오레곤 주 와인 생산량 75% 가 생산되고 있는 지역이다. 서늘한 기후에서 잘 자라나는 피노누아를 재배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캐스케이드(Cascade) 산맥이 있고 서쪽으로는 태평양 해안이 근접해 있다. 또한,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오레곤의 위도는 부르고뉴의 위도와 거의 같다.
부르고뉴와 오레곤의 다른 점
천,지,인의 요소 중 기후는 유사성이 있으나, 두 지역의 토양은 차이가 있다. 부르고뉴는 석회암과 이회토가 혼합된 충적토를 기반으로 하는 지역이지만, 오레곤은 화산토 위주이다. 빙하가 녹아 흐른 물과 화산재가 흘러 쌓인 토양이 조성된 지역이다. 오레곤 주 내 화산은 20여 개가 있으며, 이 중 몇 개는 활화산이다.
몇천만 년 간 충적된 토양에서 오랜 기간 뿌리내린 포도나무, 그리고 화산토 지역 내에 새로이 조성된 포도밭의 비교적 수령이 어린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포도로 양조한다. 부르고뉴는 모노폴(Monopole, 단일밭에서 자란 포도로 양조한 와인)이 인정받지만, 필자의 경험상 단일밭의 와인보다는 몇 개의 포도밭에서 수확한 포도로 블렌딩한 와인이 오레곤 와인의 특성을 보다 잘 표현한다고 본다.
프랑스 와인은 테루아를 중시하는데, 특히 부르고뉴 와인은 유명한 도멘의 와인밭 토양에 따라 그 특성이 묻어나는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미국의 와인 메이커 중 피노누아를 양조하는 와인 메이커나 와이너리 오너는 상당수가 부르고뉴 와인 애호가이다. 미국땅에서 그 문화와 음식에 어울리는 피노 와인을 만들고 싶은 열정으로 양조하게 된 사람들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걸까? 구세계와 신세계 피노누아 와인의 중간선상의 점을 찍는게 오레곤 와인의 특징이 아닌가 한다. 과일향 위주의 느낌과 버섯 등 땅에서 나는 향 위주의 느낌을 고루 갖춘 와인 말이다.
오레곤 피노누아 와이너리의 역사는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까. 오레곤 와인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시점은 불과 1970년대 말이다. 1979년 부르고뉴에서 손꼽는 규모의 네고시앙인 로베르 드루앵 (Robert Drouhin)이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한 고미요(Gault-Millau) 와인 올림피아드 블라인드 테이스팅 행사 당시 유명 부르고뉴 와이너리를 제치고 2위를 차지한 것이 이리(Eyrie) 와이너리에서 만든 오레곤의 피노누아 와인이었다. 이 사건 이후 로베르 드루앵은 오레곤을 방문했고, 이곳이 피노누아 품종을 키우기에 최적의 땅이라고 판단하여 와이너리를 만들고 부르고뉴의 기술로 와인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후 1980년대에 들어서며 젊은 와인메이커가 몰려들기 시작하였으며, 현재 오레곤 내에는 약 700여개의 와이너리가 있다.
아직까지 국내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포틀랜드라는 도시에서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윌라맷 밸리. 포틀랜드는 커피와 맥주로 잘 알려진 도시인데, 바로 옆에 유명 와인산지를 두고 있다는 게 재미있다. 실제 포틀랜드 시내에는 맥주 브루어리가 많이 보이고, 와인샵이나 와인바는 그닥 보이지가 않는다. 하여튼, 오레곤은 아직도 변화와 변혁을 거치고 있는 지역이고, 이 지역 기후와 입지를 활용하여 와인을 양조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부르고뉴와 비교해 볼 때 오레곤은 일조량이 상당히 높고 미국의 비옥한 토지에서 자란 채소와 과일은 약간의 단내를 가지고 있다. 채소에서조차 아삭하면서도 단 느낌이 난다고 해야 할까. 이러한 로컬음식 특성에 어울릴만한 와인도 역시 과일적 특성을 보다 가지고 있어야 – 어느 정도의 당도를 가지고 있어야 – 음식과도 자연스런 마리아주를 보일 수밖에 없다.
부르고뉴의 피노누아는 미네랄리티와 버섯 등 땅의 느낌을 상대적으로 풍부히 가지고 있다. 필자가 작년 여름 오레곤을 다녀오고 뜨거운 한국의 여름을 지내고 나니, 낙엽 떨어지는 가을에는 부르고뉴 피노에 더 손이 갈수 밖에 없었다. 이제 따사한 봄날. 오레곤의 피노가 보다 끌리는 건 그 와인의 특성과 매력 때문이 아닐까.
BLICE, 좋은 와인의 기본을 나타내는 약어로, Balance (균형), Length (여운), Intensity (강도), Complexity (복합성), 마지막 단어 E는 Expressiveness (표현력)을 뜻한다. 특정지방이나 품종의 특성을 잘 나타낼 때 와인의 표현력이 좋다고 하는데, 오레곤의 피노누아는 오레곤 토양과 기후, 음식문화에 어울리는 그만의 매력이 있다. 피노누아 와인만으로 세계적으로 명성을 인정받은 오레곤 윌라멧 밸리. 표현력에서 보면 정말 훌륭한 와인이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신선하고 단짠한 음식과 한잔 마시던 피노 와인이 오늘따라 참 그립다. 올봄에는 오레곤 피노누아 한잔, 꽃바람을 맞으며 즐겨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