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 하이덴취(海淀区) 지춘리(知春里) 근처에는 고만고만한 상점들이 줄을 잇는, 90년대 초반 서울 여의도 모습을 그래도 담아낸 아파트 상가 단지가 있다. 필자는 밤마다 집에서 지춘리까지 천천히 걷는, 일종의 걷기 운동을 두 어 달째 하고 있다. 안 가본 길을 걷고, 새로운 길을 알아내는 맛이 좋아, 동서남북 가로질러 걷다보니 우연히 도착한 동네다.
그리고 그곳엔 ‘서울’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자그마한 옷 집이 한 곳 있다. 그 집을 지날 때마다 조용히 속으로 읊조려 본다.
‘서…울…’ 이라고.
서울. 서울에서 나고 자라, 마치 공기처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서울을 떠올리면,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오랜 시간 서로의 시간을 공유했던 소중한 인연들까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연들이 파란 하늘 한 꼭지 어딘가에 무수한 바람이 되어 흩어진 듯 느껴진다.
그리고 그 상점을 지날 때마다 낮은 음성으로 낮게 불러보는 서울이라는 소리는 내 속에서 꺼내는 소리마져 조금도 억지스럽지 않아 더 듣기가 좋다.
비록, ‘가짜’ 서울일 뿐이지만 지금 필자가 살고 있는 이 도시 어느 한 켠에 자그마한 간판으로 달려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분이 좋아 휘파람을 불러보고 싶은 날이다.
그런 면에서 어떤 무엇의 정체가 비록 ‘가짜’ 일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무궁한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이 물건이 지닌 진짜 속성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찾아간 곳은 중국 최대 규모의 짝퉁 시장 수수가(秀水街)다.
베이징에는 수수가(秀水街), 홍교시장(紅橋市場), 야시우(雅秀) 등 총 3곳 대규모 짝퉁 시장이 조성돼 있다. 그 가운데 최근 내외부 시설을 리모델링하며 세련된 외관으로 꾸며놓은 곳은 단연 수수가()가 꼽힌다. 원래는 지하상가의 노점식 시장이었지만, 지금은 백화점 형식의 외관으로 꾸며놓아, 내국인보다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명물 시장으로 유명세를 얻고 있다. 대부분 러시아, 유럽 등 서양인들이 많이 찾아오는 탓에 수수가 인근 지역에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유럽식 커피 전문점과 레스토랑이 줄 지어 들어서 있다.
실제로 지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는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이 곳을 찾아 실크제품을 무더기로 사 갔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총 지하 1층부터 지상 8층까지 모두 ‘짝퉁’ 제품만 판매하고 있다.
주로 판매하는 제품은 의류, 가방, 시계, 실크제품, 캐시미어 등 제품으로, 진주 제품이 특히 유명하다. 또 해외 유명 브랜드 제품을 그대로 모방한 짝퉁 소형 가전 제품과 블루투스, 음향기기 등 다양한 제품이 상점 외부에 전시돼 있는데, 상점 외부의 제품은 주로 B급 짝퉁으로, 상점 내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진품과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완성도 있게 만들어진 A급 제품들이 전시돼 있으니 잊지 말고 상점 안 쪽을 자세히 관찰하면 더 좋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지하에서 판매하고 있는 큰 트렁크 하나를 먼저 구매하고, 높은 층으로 올라갈 때마다 구매한 제품을 트렁크에 담는 방식으로 제품들을 대량으로 구매하는데, 십 여가지 물품을 트렁크에 차곡 차곡 쌓고 있는 서양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 중의 하나다.
단, 물건을 구매하기 이전에는 반드시 ‘타오지아환지아(讨价还价)’ 또는 ‘야오지아환지아(要价还价)’로 불리는 중국식 흥정을 해야만 같은 물건이라도 더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곳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가운데 ‘타오지아환지아’를 가장 잘하는 민족은 단연 한국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 실제로 상점 상인이 처음 요구한 제품 가격에서 무려 10분의 1가격으로 구매에 성공하는 사례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때문에 상인들에게 한국인 관광객들은 그야말로 ‘흥정의 달인’으로까지 불리울 정도다.
한국인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은 매장은 건물 2층에 자리잡고 있는 수 십여곳의 캐시미어 상점들이다. 실제로 일반 백화점에서 수 천 위안에 판매되는 품질 좋은 캐시미어 제품들이 이곳에서는 불과 300위안(약 5만 4천원) 내외에 구매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5~6월 시기 이곳 캐시미어 매장을 방문하면 한 겨울에 수 백위안에 판매되던 고급 제품들을 50% 할인된 가격으로 더 저렴하게 만나 볼 수 있으니, 역 시즌 할인을 위해 이 시기 이곳을 찾는 것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다.
알뜰한 쇼핑을 마친 후 지친 몸을 위해 1층 테라스에 자리한 유명 해외 브랜드 커피숍을 찾아 이 곳을 찾은 서양 관광객 틈에 앉아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다. 서양인 일색인 이 곳에 앉아 있다보면 이곳이 혹시 유럽 어느 도시의 카페는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인데, 그 기분을 잠시 만끽하는 것도 기분 전환에 좋다.
‘짝퉁 중국’이 가진 어두운 이미지를 잠시 내려놓기만 한다면, 수수가만큼 저렴한 가격에 품질 좋은 제품을 만나볼 수 있는 곳도 없다.
저작권이라는 현실적 문제를 잠시 접어두고, 진짜와 가짜에 대한 관념만을 논의하자면 이는 분명 받아들이는 이의 마음가짐에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실제로 필자가 존경하는 중국 베이징 대학 철학과 모 교수님은 줄곧 학생들에게 비싼 책을 구매하기보다, 온라인 상에서 불법적인 방식으로 다운 로드를 받아 제본하는 형식으로 공부할 것을 추천하신다.
지식은 공유재이며, 책 값으로 비싼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인데, 온라인에서 불법적으로 다운 받을 수 있는 자료들 중에는 교수님 자신의 서적도 상당하다. 그는 자신의 책을 구매하지 말고, 그것을 다운 받도록 하신다.
가짜도, 짝퉁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진짜보다 더 진짜로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법이지 않을까.
✈찾아가시는 방법
▪베이징 지하철 1호선 용안리(永安里)역 하차 후 도보 2분, 역에서 나오신 후 고개만 돌리시면 바로 보입니다.
▪쇼핑몰 영업 시간: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